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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성부 Aug 26. 2020

꼰대와의 상생

이상한 서울 나라의 이방인 1-8

이상한 서울 나라의 이방인 - 오성부

1. 여자 꼰대 상사 이야기     

내가 마케팅 회사에 일할 때였다. 내 위의 직속상관은 골드미스였는데 정말 날카롭고 예민한, 그야말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사람이었다.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히스테릭하게 만드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찌 되었든 그녀가 나를 싫어했던 것만큼은 확실했다. 일을 하며 그녀로부터 단 한 번도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었으며 그날 하루 내 이름을 부르지만 않아도 무사 무탈한 하루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물론이고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은 회사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와의 이런 히스테릭한 관계가 풀어지는 타이밍이 찾아왔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퇴근을 하고 여느 날과 다름없이 지하철역으로 향하고 있는데 저 앞 도로 위에 웬 자동차 한 대가 비상등을 켠 채 지나가는 차량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는 게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녀의 차였다.      

“과장님? 왜 여기에 서 계세요? 차에 무슨 이상이 있어요?”

“차가 그냥 섰지 뭐야? 하필 이런 날... 정말 짜증 나 죽겠네!” 


그녀는 핸들을 탁탁 내려치며 온갖 신경질을 다 부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도울까, 하다 멈칫했다. 그간 나를 얼마나 괴롭히던 상사였는데. 내가 이렇게 도와줘봐야 고마움도 모르고 또 히스테릭이나 부리겠지, 생각이 들어 그저 지나가려고 하는데 무언가 마음이 영 내키지 않았다. 나는 돌아서 걸으려다 말고 그녀를 향해 말했다.      

“과장님 잠시 있어보세요. 제 친구들 중에 카센터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는데 연락을 좀 해볼게요.”

“아니야 성부 씨. 그러지 마. 됐어. 나 보험회사 불렀어.”    

그러나 보험회사를 기다리기에는 빗길에 성난 운전자들이 더 이상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나는 서둘러 그녀의 차 트렁크를 열어 삼각대를 설치해 지나는 차들이 잘 지나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 뒤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현재의 상태를 물어보았다. 그렇게 보험회사가 올 때까지 나는 비를 쫄딱 맞으며 그녀의 곤란한 상황을 도와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회사에 갔더니 그녀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평소와 다르게 점심을 같이 먹자며 밥도 사주고 커피도 사주고 또 전날 고마웠다는 인사까지 듣게 된 것이다. 언빌리버블!이라는 감탄사가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들은 진심 어린 고백 한 마디.


“성부 씨, 자기가 그간 나 때문에 고생하고 힘들어했던 거 알아... 정말 미안했어.”     

진심 어린 그녀의 사과에 그동안 내 속에 쌓였단 화가 정말 거짓말처럼 싹 녹아 없어져버리고 말았다.      


누구나 나를 괴롭히고 못되게 군 상대를 고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는 없다. 나 역시 그녀를 속으로는 꽤나 미워하면서 욕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상사와 적이 되어 서로 으르렁대며 피곤한 일상을 보내는 것보다는 이왕이면 상생할 수 있는 쪽을 선택하길 바란다. 내 한 몸 서 있기도 빽빽한 이곳에서 그 선택은 생각지도 않은 횡재를 불러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2. 남자 꼰대 상사 이야기     

마케팅 부서의 햇병아리 시절. 굉장히 엄격하고 딱딱한 부장님이 있었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이미 꼬장꼬장한 꼰대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특히 신입들에게는 그 꼬장꼬장함이 더 빛을 발했는데 인사도 제대로 받아주지 않았을뿐더러 무언가 일적으로 질문을 할 때에도 단답형으로 대답할 뿐 일할 때 눈길도 한번 주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부장님을 보며 처음에는 그저 신입의 군기를 잡는 거겠지, 조금 버티고 익숙해지면 나아지겠지, 시간이 조금 지나면 내게도 마음을 열어주시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이런 기대와는 달리 부장님은 요지부동이었다. 


매일 이렇게 일하면서 긴장을 하고 눈치를 보다 보니 점점 주눅이 들고 부장님 앞에만 서면 심장박동수가 빨라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런 시간이 지나고 지나 몇 달이 흘렀을 무렵. 그날도 출근을 해서 인사를 하는데 부장님이 인사를 받아주질 않았다. 나는 이렇게 사람대접도 못 받고 더 이상 일을 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따라 무슨 용기가 그렇게나 났는지 나는 부장님에게 뚜벅뚜벅 걸어가 이렇게 말했다.


“부장님, 저 오늘 소주 한 잔 사주세요!”


내 말에 부장님은 적잖이 당황하시는 눈치였다. 평소에 부장님과 대단히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몇 달 동안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본 적조차 없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무작정 말부터 뱉고 나니 ‘잘리면 어쩌지.’, ‘욕이나 된통 얻어먹으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눈이 절로 질끈 감아졌고 손이 덜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그러나 부장님은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며,     

“그래 가자. 내 소주 한 잔 사지.” 


하면서 허허, 너털웃음까지 보였다. 처음이었다. 부장님이 그렇게 소리 내서 웃는 모습을 본 것은. 그로부터 퇴근시간까지, 나는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도 모를 만큼 간을 졸이며 종일 시계만 쳐다보았다. 


그리고 퇴근 후. 마침내 나는 부장님과 어느 허름한 포장마차에 마주 앉아 있었다. 고기를 구우며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보이는 부장님의 얼굴은 뭔지 모를 평온함까지 느껴져 꼭 다른 사람 같았다. 회사에서 매일 내가 마주하던 그 ‘오만상’의 꼬장꼬장 꼰대의 모습이 없었다. 


홧김에 소주 한 잔 사달라고 하긴 했지만 막상 마주하고 보니 무엇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머릿속이 캄캄하고 꺼멓기만 했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아챈 것이었는지 부장님은 고기를 뒤집고서는 나를 힐끔 한 번 쳐다보았다. 

순간 부장님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금 손이 달달달 떨려왔다. 그리고 차마 맨 정신으로는 이 분위기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연거푸 소주 몇 잔을 입을 털어 넣고는 이렇게 된 바에야 에라 모르겠다, 하고 질러버렸다.      

“부장님! 왜 제 인사도 안 받아주시나요!”     


하며 울음 가득 섞인 소리를 내놓았다. 그런 나를 보며 부장님은 무겁게 소주잔을 들어 소주 한 잔을 쭉 들이켜더니 이런 말을 해주었다.      


“그건 너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나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네가 나랑 붙어 지내게 되면 분명 너와 나의 관계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테니까.”     


신입인 나를 위해서라고 했다. 내가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부장님과의 어떤 관계로 인해 그 실력을 인정받기가 어렵다는 뜻이었다. 내가 부장님의 백으로 기회를 얻었다는 오해를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부장님 자신은 다른 직원들과 나를 편애하고 공정하지 못한 상사로 낙인찍힐 수 있다고도 말했다. 그래서 자신은 늘 직원들과 어느 적정선을 유지하는 거라고 했다. 그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덤덤하게 자신의 소신을 전하며 차분히 고기를 굽는 부장님의 모습을 보니 윗사람이 된다는 건 외로움도 같이 짊어져야만 하는 어떤 짙은 무게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날의 나는 혈기만 왕성한 스스로를 돌아보며 10년 후 누군가의 윗사람으로서 설 나를 그려보게 되었다.

    

선을 넘는다는 것, 이것은 38선 금을 밟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다. 때문에 모든 관계에는 선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선을 지킬 때 오히려 관계는 아름답고 건강해진다. 


이따금씩 서운하고 섭섭해지는 관계가 있다면, 친해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고 망설이고만 있는 관계가 있다면, 조금 더 다가가고 싶은데 상대가 밀어내는 것만 같아서, 혹은 섣부른 용기로 치부돼버릴 것만 같아서 두렵다면, 애써 힘써 어떻게든 무언가를 하기 위해, 또는 무엇을 해야만 할 것 같은 마음에 등 떠밀려 오버하지 말고 그 나름대로의 선을 지키자. 


이것이 결국은 나를 지키고 상대를 지키고 우리를 지켜 관계의 균형을 이루고 같이 살아가는 힘이 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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