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문이 열렸다. 창밖 너머로 고개 능선을 따라 차곡차곡 자리 잡은 건물들이 보였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파트가 많은 서울에서 보기 힘든 풍경이기 때문이다. 횡단보도를 건너 고개로 향했다. 골목 초입에 위치한 건물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복덕방’ 글씨를 알아차리고선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찍었다. 그때, 어디선가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이 무작위로 버리고 간 쓰레기가 가득했다. 그런데도 계절은 찾아왔다. 노랗게 피어난 꽃과 한껏 풍성해진 나무들이 동네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그 너머로 보이는 오래된 건물들은 서로를 기댄 채로 병풍처럼 서 있었다.
‘어찌하여 이런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일까?’
건물을 볼 때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인지 늘 헷갈렸다. 무성하게 자란 풀, 녹슨 간판, 굳게 잠긴 대문을 보고서는 ‘여긴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라며 확신했다. 안도감에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애석하게도 그럴 때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사람이 툭 튀어나왔다. 괜한 긴장감에 어찌할 바를 몰라 등에 땀이 났다. 지나가는 척 재빠르게 걸었다. 장소를 옮겼는데, 묘하게도 상황이 반복되었다. 도대체 여기는 어떤 동네일까? 사람이 사는 곳인가? 살지 않는 곳인가? 마치 누군가 만들어 놓은 함정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연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계속 걸었다. 언덕 경사는 점점 심해졌고, 발걸음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평소 땀을 흘리지 않는 편이지만 이곳에서만큼은 땀이 절로 났다. 숨도 고를 겸 잠깐 서 있는 동안 갑자기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렸다. 주변엔 아무도 없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그때 공중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드니 옥상에서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 여기는 가파른 언덕이지만 끝까지 가면 도시 서울의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오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고, 힘든 만큼 밀려오는 감동도 크다.
“보광동 사람들은 다 자기만의 옥상이 있거든요.
그래서 노을 질 때 올라가면 각자의 옥상에서
사람들이 같이 노을을 보고 있어요.”
<프로젝트 여기에서 저기로, 기획자의 말>
보광동은 현재 한남 3구역에 속해 있고 곧 재개발이 진행될 예정이다. 보광동과 한남동을 포함한 구역이다. 그런데 보광·한남 3구역이 아니라 한남3구역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남동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기에 그런 것일까? 한남3구역과 관련된 글을 찾아보았는데 지도에 보광동이 표기되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었다.
보광동, 널리 빛나는 곳. 이라는 되게 예쁜 이름을 가진 동네인데,
그 이름으로 불리기보다는 한남3구역으로 불리면서 뭔가 돈에 대한
얘기들만 더 많이 나오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느새 다
지워지고, 이제 여기가 평당 얼마가 됐대. 그리고 여기는 사라진대.
그런 말들만 계속해서 들려오는 것. 그걸 사실 꼬집고 싶었어요.
한남 제3구역이라고 말하지만 보광동을 담아내고 싶었던
그런 지점을 제목에 담았습니다.
<프로젝트 여기에서 저기로, 기획자의 말>
한남3구역은 지난 20년 동안 끊임없이 재개발 이슈가 있었고, 그럴 때마다 세상의 주목을 받아 왔다.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의 욕망과 보이지 않는 현실적 이면이 공존한다. 재개발이 진행될 때까지 적절한 시기를 봐 가며 세입자를 받아 임대이익을 얻는 사람도 있고, 실거주가 아닌 소유만 하는 사람들도 있다. 리모델링과 보수에는 비용이 발생하고,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이유로 알면서도 모른 척 내버려 두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그곳에 산다.
“정비업계에 따르면 최근 내린 비로 전날 이태원 우사단로 10라길 일대의 축대가 무너졌다. 이 사고로 인근에 거주하던 세입자 4가구가 긴급 대피했다. 이 구역은 한남3재정비촉진구역(한남3구역)에 속하는 곳으로 당초 지난달 용산구청으로부터 관리처분을 받아 연내 이주가 이뤄질 예정이었으나 상가 조합원들이 소송을 걸면서 사업이 지연되고 있다. 지반 유출로 추가 붕괴 위험이 높아지자 용산구청은 축대를 임시 보강하고 도로 통행을 금지한 상태다. 한남3구역 일대는 40여 년 된 노후 건물이 밀집해 겨울철 동파와 붕괴 사고가 빈번한 곳이다.”
<2023년 4월 6일자, 서울경제>
세입자들은 기본적으로 보장 받아야 할 최소한의 주거권을 주장하는 대신 저렴한 임대료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불편함과 위험을 애써 감수한다. 무너진 축대, 균열로 깨진 길, 버려진 쓰레기, 방치된 공가를 보면서 과거 공동묘지였었던 모습이 상상되었다. 과거는 과거일 뿐 현재에 집중하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단지 과거로써 멈춰 있거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속선상에 놓여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들이 동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의 가능성을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닌지 염려되었다. 무관심하고 어수선한 분위기는 곧장 무질서로 이어진다. 걷는 내내 전봇대와 길모퉁이 마다 ‘쓰레기 투기 경고문’이 부착된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경고문을 무시한 채 쓰레기는 여기 저기 쌓여 있었다. 그런데도 이 모든 것들이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 여기며 재개발 이익을 바라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몰려든다. 동시에 누군가는 동네를 살피며 동네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자신의 삶과 빗대어 본다. 주어진 상황에서 사라지려는 순간을 애써 붙잡고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
“보광동 처음 이사 오는 날, 진짜 많이 울었거든요.
왜냐하면 연극하는 나의 미래도 없고, 차가 접근할 수 없는 동네에
사는 게 인생의 처음이었어요. 짐을 친구들이 다 옮겨주는데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을 보는 게 고맙고 미안하고 그리고 제 처지가 되게 비참하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래서 그 때는 이 노래를 방에서 참 많이 불렀던 것 같습니다.
오늘 밤 바라본 저 달이 너무 처량해. 너도 나처럼 외로운 텅 빈 가슴 안고 사는 구나 ♩♪♬ 텅 빈 방 안에 누워. 이 생각 저런 생각에 기나긴 한숨 담배연기 또 하루가 지나고 하나 되는 게 없고 사랑도 떠나가 버리고 술잔에 비친 저 하늘에 달과 한잔 주거니 받거니 이 밤이 가는구나. 오늘 밤 바라본 저 달이 너무 처량해. 너도 나처럼 외로운 텅 빈 가슴 안고 사는 구나. ♩♪♬ “
<프로젝트 여기에서 저기로, 기획자의 말>
누군가 생태 순환에 따라 도시도 변화하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변화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의심은 커져만 갔다. 재개발 과정에서 주체가 되어본 적이 없는데,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정말로, 자연스러운 것일까? 변화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주어진 환경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혹은 사람답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 해당 글은 용산역사박물관 소식지 요힘에 기고한 글입니다. 소식지와 관련하여 자세한 사항이나 PDF 파일을 다운로드 받으시려면 링크를 클릭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