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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민 Sep 01. 2018

여기가 한옥단지를 개발했던 곳이라고요?

<건축 왕, 경성을 만들다> 돈암동 편


책과 함께 본격적인 답사를 하게 된 이유에는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과거의 시대적 상황들을 텍스트로만 이해한다는 것에 한계를 느끼게 되면서 부터였다.


어린 시절엔 대부분 교과서에 나와 있던 내용이 역사의 전부라고만 생각했던 것이 어리석게만 느껴질 정도로 순수했다. 아니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과거의 수많은 사건들을 단 한 줄의 문장으로 정리해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하는 행위는 그 어떤 것 보다 직접적이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접하는 정보나 자료들, 수천, 수만 권의 책들이 존재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정보들이다. 답사를 다니면서도 매번 달라지는 도시의 면면들에 놀라는데 방대한 자료들은 오죽할까.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를

읽고 다녀온 돈암동

도서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는 내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역사 속에서만 존재하던 어느 특정 인물을 세밀하게 파헤치며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과 당시 개발업자였던 건축왕 정세권이라는 인물, 그와 연관된 사람들, 그가 남긴 업적과 의미들. 저자의 주관적인 의견과 생각들이 담긴 책이기도 하지만 그가 연구한 정세권이라는 인물에 대한 결과물이기도 한. 책에 기술된 수많은 내용들 중에서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과거에 존재했던 장소'에 중점을 두고 답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앞전에 발행했던 '창신동에 대한 오해와 진실'에 관한 내용도 이 책을 기반으로 답사를 다녀왔고 그 과정에서 몰랐던 내용들을 발견하면서 인터넷에서 얻어지는 정보와 현장에서 찾은 진실의 간격을 좁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번엔 돈암동이다. 본격적인 현장답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간단히 책의 내용을 요약, 정리해보았다.

주택개발사업에 조선인
건축가들이 등장한 이유

일제강점기 후반, 북촌마저 경제적으로 유리한 일본인들에게 내어주게 되는 상황들이 지속되자 조선인 개발업자들이 등장했다. 이 당시 개발업자라고 함은 현시점에서 이야기하는 투자적인 성격의 부동산 개발이 아닌 부족한 주거지 문제를 해결하고 조선인들의 경제적인 입지를 넓혀 나가는 데 일조를 하며 독립운동가로서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부동산 개발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집이나 건물을 짓는 공사를 짓는 것이 가능해야 했지만 그 당시 조선인들이 단독으로 혹은 자체적으로 공사를 하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1878년 일본의 제일은행 부산지점이 신축공사를 하면서 일본계 건설회사가 조선에 진출하고, 1912년에 부산에 일본계 토목건축업 회사가 공식적으로 설립된다.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조선에 사업을 영위하는 일본 건설 업체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1930년대에는 1500여 개로 확대된다. 국가적으로 이루어지는 관급공사의 경우 일본계 건설회사가 거의 독점하고 기존에 입찰 운영방식에서 지명 경쟁입찰방식 또는 건설업 자격요건을 강화하는 등 사실상 조선의 건설업계가 관급공사에 진출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피해졌다고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실상 조선에는 건설업 자격요건을 위한 학교가 없어서 자격증 보유자를 확보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민간주택을 건설하고 개발하는 시장에 눈을 돌리게 된다. 그 당시 주택의 유형에는 일본식 주택, 서양식 주택(문화주택), 조선인 주택이 있었다. 이중에서도 한옥은 건축비와 건설기술자들의 노임이 비교적 저렴해 한옥 건설 및 개발이 활동 가능한 영역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들이 개발한 지역에 가 보자!

서류상 확인이 가능한 근대적 개발업자들로는 익선동 한옥지구를 개발한 건양사의 정세권, 공영사 김동수, 마공무소 마종유, 오공무소 오영섭, 조선공영주식회사의 이민구, 김종량, 정희찬, 진한득 ,장지환 신주택사, 박흥식 경인기업 주식회사, 이승병, 조흥호 등이다. 이 중에서도 김종량이 개발했다고 하는 돈암동을 다녀왔다.

김종량
도쿄 고등 공업학교 건축과 졸업, 총독부 근무, 1930년대 중반 경성재목점 설립
중학동, 삼청동 35번지 일대, 돈암동, 계동 128번지 개발

돈암동을 지도에 표기해보니 꽤나 넓어 A, B구역으로 나누고, 차례로 답사를 진행했다. 먼저 A구역을 전반적으로 크게 돌았다. 길음역 1번 출구에서 출발하여 돈암 범양, 현대, 삼성 아파트, 돈암 풍림아파트를 거쳐 성신여자고등학교까지. 이 구역이 전체적으로 길고 곧게 뻗은 평평한 길이 아니라 오르막길이 많은 고갯길이어서 현장답사를 진행하는데 애를 먹었다. 예전에 이곳은 돈암동 고개· 돈 암현이라고도 불렸고 돈암동에서 길음동으로 넘어가는 미아로에 있다. 이 고개를 넘어가기 전 왼쪽에 돈암삼성아파트가 있고, 그 주변은 온통 아파트촌이라 불려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의 수많은 아파트들로 둘러 쌓여 있었다.

출발지점과 가까운 고가차도에 닿을 때까지 내가 본 것은 하늘 높이 솟은 아파트와 공사 중인 현장이 전부였다.

이렇게까지 아파트가 촘촘히 들어서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많았다. 하나의 길이 끝나고 옆으로 돌아서면 또 다른 길이 나오고 가파른 고갯길이 이어진다. 인근에 있는 고층 아파트와는 달리 4층 정도 돼 보이는 오래된 저층 아파트도 보였다. 높이만 낮았지 꽤나 큰 단지를 이루고 있었는데 서로 다른 시대에 지어진 아파트들이 공존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흥미로웠다.

낮은 저층 대단지 현대 아파트

서로 다른 건설회사와 브랜드를 가진 아파트들이지만 하나의 거대한 아파트 공화국을 이루고 있는 이 곳. 잠시 내가 여기에 왜 왔는지에 대한 목적을 상실하고 정처 없이 떠다니며 길을 잃을 뻔 했다. 도대체, 김종량이 개발했다던 한옥 집단지구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 어디서도 전통 가옥 한옥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간혹 한옥처럼 생긴 집도 보였지만 그것은 한옥이 아닌 그저 낡은 집일 뿐이었다. 한옥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이렇게나 많은 아파트들이 생긴 것일까?

거대한 아파트 단지 사이로 보이던 몇몇의 낡은 집들과 주택들

돈암동 A구역 아파트 단지 형성시기

상황이 이쯤 되니 돈암동 A구역에 포함되는 아파트들이 생기기 시작한 시기가 궁금해졌다. 네이버 부동산 정보에 업로드된 입주시기를 기준으로 정리해보았다. 정확히 말해서 입주시기가 곧 준공 년월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고 비교해보기로 했다.


돈암 범양아파트

입주시기: 1997년 11월

단지정보: 총 5동, 499세대, 20층

돈암 현대아파트

입주시기: 1991년 6월

단지정보: 총 6동, 619세대, 15층

돈암삼성아파트

입주시기: 1999년 4월

단지정보: 총 7동, 1287세대, 26층

돈암 풍림아파트

입주시기: 1999년 12월

단지정보: 총 5동, 460세대, 18층

돈암 현대아파트

입주시기: 1981년 4월

단지정보: 총 17동, 203세대, 3층


1960년대 시작된 미아리 지역개발은 이 지역 경관에 새로운 변화의 상징이었다. 길음교와 미아로 확장공사, 정릉천 복개구조물 공사로 인하여 정릉천과 월곡천은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로 뒤덮게 되었다. 이 공간의 한쪽에 속칭 '미아리 텍사스촌'도 자리를 잡게 됐다. 1990년대 재개발로 들어선 아파트는 길음동, 미아동, 하월곡동 일대를 주거지로 만들어 놓았으며, 조망권이 높아질수록 속칭 '미아리 텍사스촌'의 재개발 문제와 더불어 환경공해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로컬리티 인문학, 동소문 밖의 사람들>

범양, 현대, 삼성, 풍림까지. 층수와 세대수는 달랐지만 대부분 90년대에 입주가 진행되었으며, 현장 답사한 A지역은 미아동, 정릉, 길음동과 경계를 넘나드는 구역이었다. 성북 20 버스를 타고 돈암동을 출발해 달리다 보면 얼마 가지 않아서 정릉이 나오고 또 금세 돈암2동으로 들어선다. <로컬리티 인문학, 동소문 밖의 사람들>에 의하면 1990년대 재개발로 아파트가 들어섰다고 했으니 이 부근 지역은 대부분 그때 동시다발적으로 아파트가 지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한옥 집단지구를 보러 왔지만 눈 앞에 보이는 건 아파트였고, 험한 고갯길을 걸어 도착한 곳은 저 멀리 산꼭대기가 바라다 보이는 좋은 조망권을 가진 어느 아파트 앞이었다. 건너편에는 분명 높은 산이 있었지만 고층아파트 때문에 가려졌다. 그 어느 누가 이곳이 과거 한옥단지개발을 했던 곳이라 상상을 할 수 있을지, 이미 묻혀 버린 시간 속 변해 버린 금수강산을 그저 바라보는 일 밖에 할 수 없음을 한탄할 뿐이었다.


답사를 시작했던 길음역에서 아파트 단지가 늘어선 가파른 언덕길을 따라 도보로 12분여를 가면 미아리 고개가 나온다. 이 고개를 넘어가면 어떤 풍경이 펼쳐 질지 기대하기도 전에 두려워 발길을 돌렸다. 봉천고개에서 봤던 것처럼 저 멀리 높게 솟은 아파트들이 마치 병풍처럼 펼쳐 눈 앞을 가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되뇌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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