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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민 Oct 15. 2018

청맥서점은 사라졌지만, 청맥살롱은 살아 있다.

1980년 금서의 비밀창고였던 청맥의 재탄생



뒷 골목에서, 청맥살롱

이전부터 눈여겨 봐뒀던 간판의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큰길로 다시 돌아 나와야 했지만 골목이 자아내는 묘한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빠져 들었다. '에라이 모르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충분하다고 느낄 때까지 실컷 보고 가자' 는 마음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도 못한, 오늘의 목적지. 청맥살롱의 간판이 보이는게 아닌가? 해질녁 햇살을 가득 품은 채로. 그 순간에 나는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의 오프닝 대사가 떠올랐다.

하루가 저물고 모두가 귀가할 무렵,
내 하루가 시작된다.

왜 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분위기가 그랬다. 한껏 몸을 웅크리고 어둠 속에 잠들어 있던 존재에게 일어날 시간이라고 말하는 신호 같았다랄까? 덕분에 청맥살롱의 출입구는 한개가 아니라 건물의 앞, 뒤로 각각 하나씩 총 두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계단을 올라가다가 왠지 모르게 그냥 가기가 아쉬워 잠시 주변을 둘러 보았다. 해질녘 노을은 감탄을 자아 낼 만큼 아름다웠지만, 무심한 듯 잠들어 있던 도시의 뒷골목의 모습을 두드러지게 만들었고, 나는 그곳에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도시의 민낯은 해질녁 뒷골목에서 시작된다.
일본 드라마<심야식당>의 골목

놀랍게도 이 모습은 드라마 <심야식당>의 골목과 매우 닮아 있었다. 그래서 청맥살롱을 보자 마자 그 대사가 떠올랐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1986년, 금서의 비밀창고

2018년, 살롱의 탄생


청맥살롱은, 1986년에 개업한 청맥서점의 맥을 이어 받아 새로 오픈한 공간이다. 청맥서점은 주로 인문과학서적을 판매했으며, 최근까지도 운영이 되다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무엇보다도 청맥서점의 사장님이 소설가였던 덕분에 인문학 커뮤니티역할을 수행 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사회과학 서점이 없으면 그 학교를 무시하는 풍조가 있었는데 청맥서점이 그 위상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청맥살롱은사람들에게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청맥서점과 어떤 부분에서 맞닿아 있을까? 이러한 궁금증을 공간의 구성을 통해 읽어 보려 노력했다.


공간1. 책방

청맥서점은 주로 인문사회과학분야의 책을 팔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맞춰 아동도서, 참고서, 어학교재를 판매하기도 했다. 현재의 청맥살롱에서는 문학, 여행에세이, 인문학 도서를 주로 판매하고 있다.

강도구 씨는 “비밀창고에 금서를 쟁여두고 신원이 보장된 사람들에게만 팔곤 했다”고 회고했다. 한 번은 강도구 씨가 자리를 비운 사이 ‘청맥’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강도구 씨는 몇 날 며칠간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피해 다녀야했다. 단순히 책을 파는 공간이 아닌 대학생의 은밀한 도서와 비밀스러운 시대정신이 유통되는 공간이었다.                                            <출처 : 중대신문사(http://news.cauon.net)>

한쪽 벽면은 온통 빨갛다. 권위주의 독재정권기 시절 금서는 '불온서적'이라고 불렸는데, '이들은 이러이러한 책을 읽었으니 빨갱이'란 식으로 각종 공안 사건의 증거물로 매우 잘 악용되었다.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만, 색깔이 붉은데다가 일관성있게 배치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공간2. 카페

"혼자 가기 좋은 조용한 카페"
"북 카페"
"조용하고 매력적인 북카페"
"맛있는 커피와 맥주가 있는 동네책방"

'청맥살롱'으로 검색하면 나오는 주요 키워드는 '혼자, 조용한, 매력적인, 북카페, 동네책방, 맛있는 커피와 맥주'다. 나는 유독 '혼자, 조용한'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 오는데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공간의 전체적인 컨셉은 굉장히 컬러풀하고 활동적이다. 강한 원색 컬러에, 임팩트를 주는 소품, 째즈나 클래식이 아닌 음악, 알록달록한 조명. 여기에 맥주를 판매한다는 점에서 조용한 분위기를 유도한 건 아닌듯 싶었다.


공간의 이용자가 학생들이 많다 보니 주로 스터디를 하는 경우가 많았고 자연스럽게 조용할 수 밖에 없는 분위기가 연출 되었다. 학교 인근에 있는 유일한 책방이면서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이어서 였을까?

혼자 조용히 왔다가 가는 스터디룸 같은 분위기도 좋지만, 반면에 '살롱'이라는 취지에 맞게 좀 더 자유롭게 대화하고 나눌 수 있는 분위기도 형성되면 좋겠다 싶었다. 다소 엉뚱하면서도 어이없을 수 있지만 혹, 날씨와 크게 연관 관계가 있진 않을까라는 생각에 '쌀쌀한 가을 날씨여서 차분한 분위기인걸까?' '그렇다면, 유난히도 뜨거웠던 여름엔 어땠을까?' 라는 질문이 불현듯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갔다.


공간3. 야외 테라스

야외 테라스에서 볼 수 있는 뷰

개인적인 의견으로 청맥살롱의 가장 매력적인 장소는 야외테라스라고 생각하는데 이곳의 낮과 밤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탁 트인 뷰를 선사하는 건 아니지만 겹겹히 쌓인 건물들 사이에서 가려진 도시의 민낯을 적나라 하게 느낄 수 있다. 가령, 정리 되지 않은 채 얽혀 있는 전기줄이라던가, 건물의 앞 뒤가 다른 색깔이라던가.  

야외 테라스의 낮
야외 테라스의 밤

어둠이 내린 밤이 되면 조명에 불이 켜지고 환하게 빛이 난다. 무더운 여름, 잠 못이루는 밤에 가볍게 책도 읽고 맥주 한잔 하기 딱이다. 요즘처럼 바람이 부는 날엔 분위기 잡고 시간 보내기에도 딱 좋은. 여행을 가고 싶지만 주머니는 가볍고, 멀리 가기엔 부담스러운 학생들에게 좋은, 사막 속 오아시스 같은 공간이라고나 할까. 내부 공간이 스터디룸 같은 조용한 분위기였다면, 야외 테라스는 살롱에 걸 맞는 오고 가는 대화 속에 관계를 맺고 다양한 커뮤니티 활동이 이루어 질 수 있는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물론, 실내와 실외의 명확한 구분을 두는 건 아니다. 실내에서도 얼마든지 대화를 할 수 있고, 커뮤니티 활동을 할 수 있다. 단지, 제 3자의 입장에서 공간의 구분을 두고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의견을 내는 것일 뿐. 테라스에 잠시 앉아 있는 동안 시야에 들어온 두 친구, 지금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을까?


공간의 소멸에서

오는 상실감을 채워 줄,

새내기 때 수업에 필요한 서적을 적어놓은 수업계획표에 '청맥서점'이란 곳이 자그맣게 적혀 있었던 것도 기억납니다. 인세도 안 나올 것 같은 인터넷 서점만이 살아남는 시대에 인문사회과학 전문서점이라고 불리던 청맥서점은 작년에 제가 휴학을 해버린 사이 자취를 감쳤더라구요. 그 곳에서 책 한권 산 적도, 누군가를 기다려본 적도 없는데도 돌아온 흑석동에 그 공간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이 찜찜한 마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홍익문고가 사라진다는 기사를 읽으니 그 때와 비슷한 감정이 듭니다. 게다가 홍익문고의 폐점을 막기위해 4000여명의 사람들이 나섰다니, 찜찜함을 넘어 흑석동의 청맥서점에게 미안함까지 드네요. 학교가 있는 동네에 그런 서점 하나 있는 것도 썩 괜찮은 일인텐데라고 생각하며 버스를 타려고 명수대로 걸어가는 길, 겨울바람이 유난히 뺨을 때립니다. 앞으로 종종 틈날때마다 산소와 이산화탄소처럼 섞일 순 없지만 서로에게 필요할 것 같은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추운 겨울, 모두 감기 조심하세요!   
<내용출처: 흑석동의 모든 곳 페이스북 페이지>

'책 한권 사본 적 없는 공간이지만 사라졌다는 소식에 마음이 찜찜해지는' 경험은 생각보다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이는 비단 서점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범위 안에 존재하는 모든 공간들이 해당된다.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슈퍼나 세탁소, 미용실 등이 있다. 사람들에게 인식되는 비중이 크던 작던,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던 아니던 간에 오고 가는 길목에서 당연한 듯 존재했던 공간들이 사라지는 순간.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닌 게 된다. 과거 청맥서점은 사라졌지만, 그 정신을 이어 받아 운영되고 있는 청맥살롱이 그 헛헛함을 잘 채워주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 글을 마무리 하려고 한다.


주소

서울 동작구 서달로 161-1

이용 가능시간

매일 10:00 - 24:00

공간 대여료

1일 4시간/ 최소 5명 ~최대 40명 기준 297,000원

공간 예약

https://spacecloud.kr/host/audvna14



해당 콘텐츠는 도시 곳곳의 로컬 공간들을 발견하고 기록하는 <도시 작가> 프로젝트로 인디 워커스 x스페이스 클라우드와 함께 합니다.


#도시작가 #스페이스클라우드 #청맥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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