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1호 민간주도형 도시재생
TIMES SQUARE(타임스퀘어)
어딘가에서 빌려온 듯 익숙한 이름을 달고 거대하게 솟은 건물 아래 온통 붉게 물든 채 고요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곳이 있다. 긴 말을 하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예사로운 곳이 아님을 알 수 있지만 알아도 모른 척,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영등포 집창촌은 1950년대 육군 보급부대가 영등포역 앞에 들어오면서 형성되었다고 전해진다. 1999년 7월 1일 발효된 청소년 보호법에 의해 '레드존(청소년 통행금지구역)'으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2004년 9월 성매매 특별법이 시행되고 서울 시내에 재개발 바람이 불면서 대부분의 집창촌은 단계적으로 폐쇄되거나 철거되었지만, 영등포 집창촌의 경우 아직 남아 있다.
나는 인근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집창촌의 존재를 우연히 알게 되었고 왠지 모르겠지만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복잡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전혀 다른 성격을 띤 매개체(공간)가 같은 범주 안에서 공존을 하고 있지만, 서로 조화를 이루는 공생의 관계라기보다는 흑과 백처럼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별개로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생각보다 많은 차량들이 이 길을 달리고 있어서 그 행렬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200m가 넘는 길을 천천히 걷는 동안 양옆으로 펼쳐지는 유리문에 눈길이 갔다. 모두 커튼에 가려져 있었는데, '이 커튼을 넘기면 과연 어떤 모습이 펼쳐 질까?' 하는 괜한 호기심에 마음이 뒤숭숭했다. 그러던 중에 도로 한가운데 서서 차량 정리를 하고 있는 분을 발견했다. 왜 여기 계시는 건지 궁금해서 앞쪽으로 좀 더 걸어가 상황을 살펴보니 다름 아닌 백화점 주차장이 있었던 것! 결국 집창촌이 존재하는 이 거리는 주차장을 향해 달려가는 차량들이 이용하는 길이었던 것.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상치 못한 장면을 마주하고 나서 알아도 모른 척,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신세계 백화점 - 코드야드 메리어트 호텔 - 영등포 타임스퀘어라는 거대한 인프라는 교통의 요지 영등포라는 지역적 특성에 힘입어 쇼핑, 숙박, 식사, 영화 감상 등 라이프 스타일의 모든 것을 한 장소에서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인근 주민을 포함하여 서울에 거주하는 많은 이들이 찾는 랜드 마크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은 개발이 지연되는 것에 대비한 기획 제안형 사업으로 조성된 공간들이고, 소비 상권으로서 영향력을 미칠 뿐이다. 도심 재생 산업의 한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인근 지역의 특성이나 산업과는 직접적인 연계성이 없다.
이는 타임스퀘어가 자리하고 있는 곳을 제외한 주변을 조금만 둘러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인근에는 앞서 언급했던 집창촌뿐만 아니라 1970년대 본격적으로 형성된 영등포 대표 재래시장, 영일시장이 자리하고 있다. 해마다 5~6월이 되면 전국의 마늘이 집중적으로 이곳에서 거래돼 '마늘시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영일시장의 대부분은 일반 점포의 형태를 갖추고 채소, 과일을 판매하지만 무허가로 도로변에 상자를 쌓아놓고 채소를 파는 상인들도 있다. 때문에 반대편에 위치한 타임스퀘어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대비된다. 이는 마치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하여 경계를 만들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 번은 이 주변을 지나가는데 마주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저절로 이런 의문이 들더라.
분명 주변에 아파트가 많은데도 사람들이 보이질 않지?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 갔지?
다행스럽게도 타임스퀘어의 거대한 문을 통과하여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의문은 풀린다. 온통 새하얗게 물든 건물 내부는 천장이 유독 높고 트여 있다. 복도는 마치 매끈한 호리병처럼 곡선으로 뻗어 나갔고, 그 사이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도 찾던 사람들이 여기 다 모여 있다.
그렇게 날 것 그대로의 공간과 이상적으로 형성된 공간 사이에서 자리 잡고 있는 또 다른 공간이 있었으니, 바로 1936년 문을 연 이후로 80년째 같은 자리에서 온전히 제 모습을 하고 있는 밀가루 공장, 대선제분이다. 이곳이 오늘 진. 짜. 말하고 싶었던 공간이다. 멀리서 딱 봐도, 길게 솟은 여러 개의 원통 기둥들이 눈에 들어온다. 기둥의 명칭은 사일로. 대선제분 공장의 핵심시설로 곡물 저장 창고로 이용되던 것이다.
2013년 공장이 아산으로 이전하면서 5년 동안 멈춰 있었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패션쇼(2016년)가 이곳에서 진행되었다. 나는 이러한 사실에 굉장히 흥미를 느꼈고,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공장을 방문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특별한 행사 일정이 없는 날에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공공시설이 아닌 이상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 공간이었다. 베일에 싸인 채로 시간이 흘렀고, 언젠가 문이 열리길 바라면서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유심히 지켜보곤 했다.
1년 뒤, 문래동에서 진행되는 동네 투어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투어 장소 중 한 곳이 바로 대선제분이고, 공장을 잠깐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영등포 역세권 및 경인로변 일대(786,000㎡)가 2017년 서울시 경제기반형 도시재생 활성화 지역으로 선정되면서 서울시에서 본격적으로 도시재생 사업을 착수, 대선제분이 '서울시 1호 민간주도형' 도시재생 사례로 첫 신호탄을 울렸기 때문이다. 기존 건물을 최대한 유지. 활용하면서 리모델링. 증축된다. 1단계로 전체 23개의 건물 중 14개 건물이 카페, 레스토랑, 상점, 역사박물관, 기획전시장, 창업지원 공간, 공유 오피스 등으로 이용된다.
정미공장 - 기획전시장
창고 - 창업지원 공간, 공유 오피스
사무동 - 제분산업을 중심으로 한 서울 근 현대산업 역사를 기록하는 전시관
대형 창고 - 레스토랑과 갤러리, 카페
최근 들어 새로운 공간이 완성된 이후의 모습을 공개하는 것이 아닌 날 것 그대로의 상태에서 공간을 둘러보고 그 공간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관찰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는 추세인데, 대선제분 또한 그 경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선제분을 이루고 있는 모든 공간을 둘러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보이는 좌측으로 보이는 대형 창고 정도였다. 대중에게 공식적으로 개방되기 전 상태에서 공간을 둘러보는 행위 자체는 모델하우스라는 실물 크기의 모형을 통해 완성된 공간을 미리 보고 느껴보는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아무것도 차 있지 않은 허공에 빛을 받아 밝게 빛나는 모습이 마치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공간의 기운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사실상 오래된 창고를 리모델링하여 전혀 다른 성격의 공간으로 사용하는 사례는 대선제분 외에도 많지만 유독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공장이 위치한 영등포구의 지역적 특색을 가장 잘 반영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했던 타임스퀘어가 위치한 곳에는 1919년 설립된 경성방직 섬유공장이, 타임스퀘어 맞은편 문래동 자이 아파트 자리에는 방림방직 공장이 있었다. 또 현재 영일시장 청과물 상가가 일렬로 늘어선 공장의 담벼락을 따라서는 개천이 흘렀고, 영등포역에서 출발하는 산업철도가 본선은 영등포 공작창(차량기지)으로 향하고, 2개의 지선은 경성방직 창고와 제분공장으로 갈라서는 세 갈래 분기점이 여기에 있었다. 영등포구를 대표할 만한 가장 핵심적인 위치에서 시대를 같이 했던 공장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변화를 맞이 하면서 과거의 흔적들이 지워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예전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은 어쩌면 대선제분의 숙명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최근엔 온 나라가 들썩일 만큼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도시재생 사업에서 '서울시 1호 민간주도형 도시재생 사례'로 첫 삽을 떴다.
일반적으로 서울시에서 진행되는 대표 도시재생 사업들은 시가 주도한다. 하지만 대선제분의 경우, 대선제분 창업자의 손자인 박상정 대표가 운영하는 회사 ‘아르고스’가 사업비 전액을 부담해 재생 계획 수립·리모델링·준공 후 운영 등 사업 전반을 주도, 1,2단계로 나뉘어 진행될 예정이다. 건물의 리모델링뿐만 아니라 광장을 활용하여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문화행사와 문래동 예술인 기술 장인들이 참여하는 플리마켓, 공연도 진행된다. 이에 서울시는 공공성 확보를 위한 최소한의 도시재생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지하철 1호선 영등포역·2호선 문래역 주변의 보행·가로환경을 정비해 시민들이 대선제분 공장을 쉽게 방문할 수 있도록 도울 예정이라고 한다. 가장 오래된 공장에서 가장 트렌디한 공간으로 변신할, 대선제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품은 공간을 좀 더 가치 있게 바라 보고 이용할 수 있도록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좋은 결과를 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해당 글은 시각 예술 데이터 기반_참여/공유 플랫폼인 『아트렉처』의 기고 제안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 아트렉처 알고가기: https://artlectur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