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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민 Feb 25. 2020

그들은 왜, 사라져야만 했을까?

올림픽은 모두의 축제가 아니다. 


평창 평창 평창

평창올림픽 개최식 날 당일 나는 평창에 있었다. 업무차 간 것이지만 즐긴 셈이 되었다. TV에서만 접했던 올림픽 현장에서 내가 목격한 풍경은 어느 유명한 가수의 콘서트 현장과도 같았다. 사람들은 흥분에 차 있었다. 주최 측에서 나눠주는 우비와 담요, 모자, 팔찌를 착용하고 사진을 찍고, 간식을 먹고, 각종 이벤트를 즐겼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BACK TO THE 1988

응답하라 1988 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1988년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다. 그러니 에피소드로 1988년에 개최된 서울 올림픽이 등장한다. 내용인즉슨, 고등학생인 여자 주인공이 [피켓걸]로 선발되었지만, 해당 국가의 불참 선언으로 개회식에 설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놀랍게도 이 사연은 실화였다.

<기사출처: '동아일보' 1988년 9월 12일 자', http://ohfun.net/?ac=article_view&entry_id=8702 >

 '마다가스카르'의 88 올림픽 불참은 1972년에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같은 해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당시 마다가스카르 외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하면서 우리나라와 단교한 영향이 컸다. 결국 사회주의 정권 아래의 마다가스카르는 서울에서 열린 1988년 하계 올림픽에 불참했다. 더불어 마다가스카르 이외에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쿠바, 알바니아, 세이셸, 에티오피아, 니카라과 등 7개국이 불참했다.

[내용 출처: http://www.reviewstar.net/Article/ArticleView.php?WEB_GSNO=10306491]  본의 아니게 이슈가 되긴 했지만, 다 같이 '손에 손잡고 - '를 부르며 서울 올림픽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누구를 위한 올림픽인가?

평창 가는 첫 길목, 부끄러운 민낯

올림픽 개막식을 한 달 앞둔 어느 날이었다. 한 언론사에서 헤드라인 제목으로 뽑아 실은 문장을 보자마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용인즉슨 평창으로 향하는 KTX 고속열차가 지나가는 길목에는 노후 주택과 쓰레기 더미가 있으니 단기 대책으로 임시 펜스라도 설치해야 하는 건 아니냐는 주장이었다. 환경 개선 측면에서 이런 의견을 낼 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사진을 찍어서 드러내고, 올림픽 개최 측 국민이 스스로 '부끄럽다'라고 말하는 건 자신의 얼굴에 침 뱉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의문이 든다. 올림픽과 같은 전 세계적인 축제의 장에서는 어느 국가든 냉정한 평가가 존재하고 그에 따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걸인 정하나 그것보다 더 우선시되어야 할 지점은 뒤로 하고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숨기는 것에 급급하면서 국가의 이미지 제고에만 신경 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는 의문이 든다.

"서울은 엄청난 빈부격차를 지닌 도시로 보일 수밖에 없다. 국격을 높여야 할 올림픽 개최가 철저하지 못한 준비로 자칫 국가 이미지만 떨어 뜨릴 수 있는 상황이 된 셈이다.    2018년 1월 7일 자, 매일경제 "

서울은 엄청난 빈부격차를 지닌 도시가 맞다. 왜 사실을 부정하려 하는가? 또한 전 세계의 모든 대도시에도 빈부차가 존재한다. 국가 이미지가 떨어지는 게 아니라 공통적인 현상이다. 평창 올림픽을 앞두고 마주한 낯부끄러운 기사. 무려 30년 전인,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을까? 지금보다 더 열악한 상황이었던 그때 국가 이미지 명목으로 희생된 사례들은 없을까?


그들은 왜 사라져야 했을까?

불안했던 한국의 정치, 사회 상황에서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진행된 서울 88 올림픽이었던 만큼 양날의 검처럼 많은 이들의 노력과 보이지 않는 이면이 존재했다. 한국을 방문하는 사람들과 현장 중계를 통해 비치는 서울의 풍경이 곧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이미지였으므로 정부는 반강제적으로 많은 것들을 바꾸기 시작한다.


1) 성화봉송이 지나가는 자리, 상계동

1980년대 상계동 일대는 빈민촌이었다. 86년 아시안 게임을 비롯하여 88 올림픽 개최까지 확정된 이후 정부는 빈민촌을 대상으로 도시미관 사업을 진행했다. 더군다나 상계동은 성화가 지나가는 자리고, 외국인에게 우리나라를 멋지게 보여야 하니 철거민들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었다. 1분도 채 안 되는 성화봉송을 위해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한순간에 삶의 터전을 잃어야만 했다.

. “포클레인이 무작정 밀고 들어왔어. 옥상에 있는 된장, 고추장 항아리까지 있는 대로 다 부셔버렸지. 심지어 애들이 방 안에서 자고 있었는데 집을 무너뜨리더라고”  
- 서울대저널, <상계동 올림픽, 폐막은 없다> -

상계동에서 쫓겨난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경기도 포천으로, 명동성당 앞으로 그리고 어딘가로. 명동에 남은 이들은 그렇다고 해서 성당 앞에서 계속 살 수 없었기에 이후 부천시의 허가를 받고 고강동 고속도로변 부지를 매입하여 가건물을 지었다. 그러나 며칠 뒤 갑자기 입장을 바꾼 부천시는 가건물을 철거했고, 어쩔 수 없이 주민들은 움막을 지으며 삶을 이어갔다. 심지어 땅굴을 파서 비닐로 외풍을 막은 후 이불을 덮고 잠을 잤다. 그러자 부천시에서는 상계동 주민들의 모습이 외부에 보이지 않도록 대로변에 높은 담을 쳤다. 상계동에서 쫓겨난 그들이 부천에서 조차 존재를 부정당한 것이다.

 

2) 비행기가 지나는 자리, 목동

과거의 목동은 1962년 말까지 김포군 소속이었다가 1963년 1월 1일 서울에 편입되지만 20년 동안 서울시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었다. 목동 인근을 흐르던 안양천 둑은 온통 갈대밭이었고, 진흙 투성이었다. 사람이 살기에 적당하지 않은 이곳에 1964년부터 여의도, 영등포, 회현 등 서울 시내에서 살다가 집이 철거되면서 이주한 사람들이 살았다. 서울시장은 이곳에서 영원히 살아도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김포공항과 가까웠기 때문에 비행기가 하늘에 자주 보였고, 서울로 진입하는 비행기가 착륙하기 전에 마주하는 동네가 바로 목동이었다. 1983년 서울시는 목동과 신정동 지역에 신시가지 조성 계획을 발표했고, '영원히 살아도 좋다'는 말을 '당신들이 사는 집은 무허가 건물이고, 지금까지 살게 해 준 것만으로 감사해라. 가옥당 이주비 50만 원과 아파트 입주권을 주되, 이주비는 철거 확인 후 지급하겠다'로 말을 바꾸었다. 열악한 환경과 경제적 어려움에도  20년 동안 성실히 각종 세금을 납부했지만 돌아오는 건 '이곳에서 나가라'는 말뿐이었다. 

“우리들은 그 자리에 서민형 임대 아파트를 지어달라고 했어요. 우리는 이대로 떠날 수 없었어요. 거기가 우리의 생존 터전이었거든요. 전부 다 ‘판잣집’ 식으로 뚝방촌인 거지. 우리가 보증금 20만 원에 3만 원 내고 살았어요. 가옥주들은 그 작은 집을 몇 개로 쪼개서 세를 놓고 세입자들은 작은 방에 식구가 여섯, 일곱 명씩 살았어요. 찢어지게 가난했던 거지. 대부분 막노동, 공장 일을 했고 종이를 줍거나 비닐하우스에서 일해주거나 하면서 근근이 살았거든요.”  

-내용 출처: 민주화 운동 기념 사업회, https://www.kdemo.or.kr/blog/location/post/12 -

목동의 철거대상 건물은 총 2,359동, 허가건물 580동과 무허가 1,779동. 세입자 2,846가구와 가옥주 2,359가구를 합한 5,205가구. 철거를 강요받은 세입자만 1만여 명에 달했다. 가옥주들에게는 연고권을 인정하여 부분적으로 대책이 마련되었으나 세입자들에게는 혜택이 주어지지 않아 1984년 8월 27일에는 양화대교 점거 농성을 시작으로 백여 회가 넘는 크고 작은 투쟁으로 이어졌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올림픽이 아녔어도 언젠간 개발이 되었을 목동이었을 것 같긴 한데 만약에 이런 사건이 없었더라면, 과연 목동은 어떻게 되었을까? 현재의 모습과 비슷하게 변화했을까? 

<1983년 목동, 사진출처: 오픈 아카이브, https://archives.kdemo.or.kr/isad/view/00715881>

상계동과 목동의 사례는 88 서울 올림픽의 이면을 드러내는 상징성 있는 사건이다. 성화봉송이 지나간다는 이유로, 비행기가 지나가는 길목에 있다는 이유로 존재를 부정당해야만 했던 그들. 과연 이들은 현재 어디로 갔을까? 잊지 못할 기억을 가지고 잘 살아가고 있을까? 이들이 겪었던 일들을 그저 텍스트로만 접하고 직접적인 상황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더더욱 궁금한데, 직접 당사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지 못하더라도 그 현장의 모습을 담고 싶었다.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된 그곳에서 그들이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상상하며  흔적을 따라 <2편, 현장에서> 에서 그들을 만나본다. (계속) 



참고자료 


1. 메인사진출처: KBS스포츠[88/18]서울올림픽 30주년 특집 다큐 캡쳐 

    링크주소:https://www.youtube.com/watch?v=cS-MZlwLqYQ&t=1979s

2. 오픈아카이브, 1983년 목동 

3. 민주화 운동 기념 사업회, 군부독재의 반민중적 도시개발을 온몸으로 규탄하다/84년 목동 철거민 투쟁

4. 동아일보' 1988년 9월 12일 자, 응팔 '덕선'의 마다가스카르 피켓걸 사연은 실화였다. 

5. 서울대저널, 상계동 올림픽, 폐막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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