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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민 Feb 28. 2020

[86,88의 공간들] 철거 이주민의 삶

현장에서 느끼는 그들의 삶(1) 경기도 포천 천보마을

86 아시안 게임 88 서울 올림픽이 남기고 간 흔적을 따라 답사하기

1980년대 대한민국은 대내외적으로 경제성장의 부흥기였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다 살고 있는 건 아니었다.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을 서울에서 개최하기 위해 여러모로 애를 쓴 것을 많은 이들이 알고 있고 박수받아 마땅한 일인 반면에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이면도 존재했다. 현재 그 흔적들은 사라 지지 않고 곳곳에 살아 남아 우리에게 다시금 과거를 되돌아보라고 끊임없이 말을 건네고 있었다. 몰라서 알 수 없었던 과거의 가려진 시간들. 나는 더 이상 모른 척하지 않고 부여 잡기로 했다. 지나간 시간 속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고 그 결과, 현재는 어떻게 되었는지 현장을 찾아가 직접 확인하고 기록을 남기는 것, 내 몫을 다 하기로 했다.


서울 상계동의 흔적, 경기도 포천시 동교동

여길 어떻게 가지?

위치를 지도에서 발견했을 때 참으로 난감했다. 그동안 답사를 다니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어려운 경우 차를 빌려서 이동했었다. 이때 운전을 한 사람은 내가 아닌 타인이었고, 혼자이기보단 단체로 움직였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쉬웠다. 이번 답사는 혼자 가는 데다가 위치도 애매해서 고민을 좀 했었는데 이런 사례가 흔치 않으니 어떻게든 갔다 오기로 결정했다.


 

1호선 신길역 출발 - 덕정역 하차 - 마을버스 환승 후 하차.

지하철 대기와 환승시간 포함해서 넉넉히 2시간. 바로 가는 기차도 없고 고속(+시외) 버스도 없다. 가는데만 2시간 걸리니 왕복이면 4시간. 그래도 다행인 건 평소에 낯선 지역에 가서 답사를 여러 번 해본 터라 초행길에 대한 부담감이나 긴장감은 적었다.


버스 타고 산을 너머

신길역을 출발한 지하철은 끝도 없이 달렸다.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로 향하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승차했다. 종점역에 가까워질수록 이용객이 줄어들 거라는 생각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지루할 것만 같은 시간이 쏜살 같이 지나갔고, 어느새 하차할 역에 도착했다. 나가는 출구 바로 앞쪽에 버스정류장이 있어서 버스로 환승했다. 약 25분을 더 가야 한다. 역에서 멀어지고 점점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이동했다. 급기야 산을 넘었다. 굽은 길을 오르는 동안 창 밖을 바라보았는데 스쳐 지나온 풍경이 펼쳐졌다. 내리막길 초입에는 대규모 공동묘지가 보였다. 명절 때 벌초하러 가면서 산자락에서 보던 묘지들과는 좀 달랐다.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공동으로 관리되고 있는 묘원이었다. 근데, 한 군데도 아니고 두, 세 군데다. 묘원에 정신 팔고 있다가 어느새 목적지 부근이라 버스에서 내렸는데 당최 어떤 곳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런 곳에 마을이 있다고?

저어기 끝에, 천보마을

지도로 확인했을 때 범상치 않은 곳이라는 것을 짐작하긴 했었지만 날씨 영향 탓인지 더 으스스한 기분이었다. 위치를 한번 더 확인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있었지만 당장에 말을 걸기가 두려웠다. 다행히도 천보마을을 알리는 표지판과 커다란 비석을 발견했다. 하지만 마을이 바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안심할 수 없었다. 마치 미궁 속으로 빠지듯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지만 보이는 건 공장들 뿐이었다. 마치 무슨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정적이 내내 감돌았다. 순간 '다시 돌아갈까' 하는 마음이 퍼뜩 들었지만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또다시 마을이 있음을 알려주는 알림판이 나타났다. 근데, 화살표 표시가 양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
어디로 가라는 건지...

잠시 고민하다가 왼쪽 한번, 오른쪽 한번 고개를 돌려보니 감이 잡혔다. 오른쪽으로 곧장 내디뎠다. 그 길의 끝에 오늘의 목적지인 "천보마을"이 있었다. 근데 자세히 보니깐 바로 옆에 군부대가 있고, 앞쪽엔 묘원 입구다. 이러니 못 찾지. 밖에서 보면 소규모 공장 밀집지역으로만 보인다. 이유인즉슨 천보마을의 집들은 일반 주택이 아니라 닭을 키우던 양계장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왜 이곳에서 살게 되었을까?

천보마을의 원래 이름은 상계마을이다. 상계. 퍼뜩 떠오르는 동네가 있지 않은가? 맞다 서울 상계동.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 개최 때문에 재개발 사업이 추진되면서 서울의 약 200여 곳에서 재개발이 이루어지는데 그중 한 곳이 상계동이던 것이다. 이로 인해 상계동 주민들은 경기도 포천시 동교동으로 강제 이주되다시피 했고, 정부는 당시 돼지와 닭을 키우던 곳을 개조하여 가구당 4.7평씩 주거 공간을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동교동 4통을 상계마을로 명명하였고, 이후 주민들의 요청으로 천보마을로 바뀌었다. 실제로 와서 보니 길게 생긴 건물 하나에 여러 개의 출입문이 다닥다닥 나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누가 살고 있는지 이름이 적힌 문패와 우편함이 달려 있었다. 건물의 자재가 슬레이트 지붕인 데다가 초기에 들어와 살고 있었던 주민들의 일부가 빠져나가서 사람이 살지 않는 곳도 있었다.

13일 칼바람이 몰아치던 날 포천시 동교동 상계마을에 살고 있는 심은선( 68) 할머니를 만났다. 지난 1986년 서울 동북부 지역 재개발로 인해 이곳으로 강제 이주된 상계마을 주민들 중 한 명인 심 할머니는 바람을 막기 위해 테이프와 신문지 등을 덕지덕지 붙인 방문을 열며 기자를 반겼다. 방으로 들어가기엔 너무 비좁아, 결국 밖에서 취재키로 했는데 추운 날씨도 잊은 채 할머니는 1986년 당시를 회상했다. 할머니는 “공동주택을 마련해주겠다던 정부의 약속을 희망처럼 믿고 떠났다”면서 “착하고, 순한 동교동 상계마을 주민만 22년이 지나도록 집 한 칸 없이 이렇게 살고 있다”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1986년 당시 서울 동북부 지역이 재개발되면서 상계동 일대 세입자 1천500세대 중 165세대 500여 명이 정부에 의해 포천시 동교동 685―1로 강제 이주되다시피 했다. 정부는 당시 돈사와 계사였던 이곳을 개축해 가구당 15.5㎡ (4.7평)씩 주거공간을 마련해줬다. 그리고 1년 후인 1987년, 서울시와 포천시가 한 가구당 총 130만 원을 보조한 것이 전부다. 나머지 1천300여 세대는 강제 이주에 저항하면서 결국 부천지역 아파트 및 남양주 금곡 아파트를 주거지로 지원받았다고.

<내용 출처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http://www.joongboo.com)


그래도 길이 반듯반듯하게 닦이고 마을 바로 옆으로 흐르는 하천 주변 환경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는 벽화 작업도 이루어졌고, 경제적 자립을 위한 작업장 겸 센터도 생겼다. 이는 2012년 '희망마을 만들기 공모전'과 2015년 '취약지역 생활여건 개조 프로젝트' 대상지로 천보마을이 선정되면서 나타난 변화들이다. 정부에서 진행되는 사업의 대부분은 결과론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방향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단발적이고 주민을 위한 다기보다는 해당 구나 시의 목적성에 더 부합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마을을 둘러보는 내내 주변 환경을 개선하는 것도 좋지만 예산을 좀 더 들여서 주민들이 거주하는 '집' 자체를 리모델링해준다거나 수리를 한다거나 하는 방향으로 지원이 되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벽화를 그리는 대신에 추위를 막고, 통풍이 잘 되도록 자재를 변경해주거나 주민이 나가서 비어 있는 공간들은 공동 창고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거나 아니면 뭐라도 할 수 있는 유휴공간으로 만들거나. (일부 몇몇 집은 지붕을 다른 자재로 변경한 듯 보였다.) 마을의 중앙에는 센터와 노인정이 있었는데, 센터의 경우 마을 도서관, 목욕장, 사무실, 공동작업장을 갖춘 신축건물이다. 내가 방문한 날은 유난스레 마을이 조용했고, 센터의 문은 잠겨 있고, 날씨가 추웠던 탓인지 사람의 인기척은 있으나 만날 순 없었다. 가까이 왔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던 그런 날이었다. 조금은 아쉬웠지만 중요한 건 '과거에 이들이 왜 이곳에 왔고, 현재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떠한 변화를 겪고 있는지'를 알아보고 그 현장에 와서 직접 느껴보는 것이기에 후회는 없었다.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 이곳이 버스 종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타고 왔던 버스는 노선에 없었던 것.


정부사업 그 이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천보마을 소식은 2015년이 마지막이다. 2019년에 <노인일자리 공동작업장 개소식> 관련해서 잠깐 기사가 나긴 했지만 천보마을의 현재에 대한 소식은 아니었다. 2012년 희망마을 만들기 사업을 할 때만 해도 분명 '이 사업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고 이후에 좀 더 본격적으로 사업이 진행될 것'이라고 했던 인터뷰가 기억에  남았는데 2015년 이후부터 2020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떤 변화들이 있었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주민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사업들을 바라보고 있었을지 등에 대한 다양한 시선과 의견, 소식이 들려오지 않아서 아쉬웠다. 2015년 인터뷰 자료에 의하면, 이주할 당시에는 160여 가구였지만 열악한 환경과 불편한 교통 조건 때문에 많은 주민들이 떠나고 80여 가구 정도만 남았다고 했다. 그들은 대부분 어르신들이다. 과연, 이들에게 정부 사업이 어떤 측면에서 도움이 되었을까?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감언이설로 그들을 속였을지 아니면 진실로 대했을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혹여나 여기도 정부 사업이 늘 그랬듯이 단기적으로 이루어지고 마치 많은 것들이 변화한 것처럼 - 잠깐 관심받다가 지나가버린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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