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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민 Mar 05. 2020

그는 왜, 도시빈민들과 함께 했을까?

상계동과 목동 철거민의 곁에, 내 친구 정일우 신부님

영화, 내 친구 정일우

유튜브를 뒤적거리다 우연히 다큐멘터리 영화 <내 친구 정일우>를 보게 되었다. 예전에 영화 포스터를 본 적은 있는데 구체적 내용을 보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앞서 포스팅했던 상계동 철거민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김동원 감독님의 작품이었다.


주인공인 정일우는 한국인이 아니라 미국인이다. (영화 포스터에 그의 모습이 담겨 있다.) 예수님의 믿음을 전파하는 신부님이다. 종교를 믿지 않는 나는 솔직히 종교와 관련된 단체나 사람들이 도시 빈민을 위한다며 활동하는 것을 별로 달갑게 여기진 않는다. 편견 일수도 있지만 여태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의 좋은 경험을 가 져 본 적이 없고, 순수한 <믿음> 하나로만 종교 활동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어떤 종교를 믿던, 어떤 종교를 가지던, 그건 개인의 선택이고 스스로의 몫인데 강요를 한다거나 십일조나 헌금이라는 이름으로 돈을 내라고 하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믿음은 마음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왜 돈으로 연결되는 것일까? 인물의 삶을 이야기하는 다큐멘터리 영화이지만 그 바탕에는 종교가 있었기 때문에 <내 친구 정일우>도 반신반의하며 보았다.


그는 왜, 한국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했을까?


영화 속에 등장한 정일우 신부는 신기한 인물이었다.

서강대학교는 1960년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와 예수회 미국 위스콘신 관구의 도움으로 설립된 학교다. 그래서 초창기 때는 외국인 가톨릭 신부들이 와서 영문학/철학 등이 과목을 직접 강의했었는데, 정일우 신부도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당시 한국은 군부시절이라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를 하던 때였다. 많은 학생들이 시위에 나갔다가 붙잡혀 가는 것을 보았고, 그는 모른 척하지 않았다. 외국인으로서는 드문 1인 시위를 하며 학생들이 풀려 날 수 있도록 한몫 보태었다. 경찰에게 붙들려가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는 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그는 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대신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시작이 청계천 판자촌이었다. 처음엔 판자촌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고 싶어 들어갔다가 그러한 자신의 행동이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삶으로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단한 무언가를 하려고도, 해야만 하는 의무 같은 것도 없었다. 스스로 '선교자로서 갖춰야 할 덕목이나 의무'의 틀 안에 갇히지 않았다. 그저 남들과 똑같이 사람들과 어울리고 웃고 떠들며 놀았다.


1970년대는 도시개발의 소용돌이 같은 시대로 서울의 수많은 판자촌 사람들이 어딘가로 쫓겨나야 했다. 이때 청계촌 판자촌 사람들은 양평동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정일우 신부도 함께 였다. 양평동에서의 삶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청계천에 이어 양평동에서도 철거를 당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서울을 벗어나 그 당시 허허벌판이었던 경기도 시흥시로 이주했다. 여전히 정일우 신부도 함께.


그는 왜 한국에서 도시빈민들과 함께 사는 삶을 선택했을까? 곁에서 지켜본 지인의 증언에 의하면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겼다고 했다. 정일우 신부는 사람들과 친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들은 끊임없이 의심했다.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 한국 사람들과 지내면서도 떠나지 않은 이유는 선교를 말이 아닌 행동으로서 실천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진짜 선교라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는 그와 함께 생활했던 사람들의 증언으로 알 수 있다. 담배와 술을 좋아하고 장난기도 많으며 단 한 번도 화를 낸 적도 없다고 한다.


고민이 있어 면담을 하러 찾아갔지만 이야기는 1도 못 꺼내고 갑자기 국밥 한 그릇과 소주 한 병을 먹었다고 했다. 그러고선 한참을 달려 공기 좋은, 어느 큰 나무 아래 차를 세우고선 그제야 말을 하라며 넌지시 던지셨고, 한참을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 다시 돌아가려고 차의 시동을 키니 밝은 불빛에 비친 신부님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한 사람의 말에 집중해서 진심으로 듣고 있었던 것.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너무나 자유로운 모습에 다들 처음엔 당황하기도 하고 의심스럽게 생각했지만 거리낌 없이 받아줘서 편안하고 좋았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일우 신부와 쌓은 추억을 회상하면서 에피소드를 이야기해주는데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는 아주 힘든 시기였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어요.

다시는 그런 순간이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앞으로는 그때처럼 살지 못할 것 같아요.


직접 흙을 모아 돌을 쌓아 만든 

복음자리 주택

쫓기는 삶 속에서도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삶을 지향했던 정일우 신부님은 사람들과 함께 아무것도 없는 빈 땅, 허허벌판에 집을 짓게 된다. 청계천 판자촌 때부터 인연을 맺게 된 빈민운동을 하던 제정구 의원과 함께 독일의 구호 단체인 미레 제올 재단에서 도음을 받아 토지 3,000여 평[약 1만㎡]을 사들였다. 그리고 평당 8만 원의 건축비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9평[약 30㎡], 12평[약 40㎡], 15평[약 50㎡]의 집을 지어 10월에 202세대가 입주하였다. 당시에는 단층 주택 여섯 동과 2층짜리 연립 세 동의 혼합된 형태와 600여 평[약 2,000㎡]의 넓은 공터가 있었다. 1*('한국학 중앙연구원 - 향토문화 전자대전'에 나와 있는 설명을 인용하였습니다.)

<완공된 보금자리 주택, 사진출처: 내친구 정일우, https://www.youtube.com/watch?v=3KBo63cipnM&t=3435s>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하느라 힘들었지만 자신들이 손수 지은 집이었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싶다. 게다가 도움받은 빚들을 4년 이내 모두 갚았다고 한다. 온전히 그들 힘으로 말이다.


한독 주택

1979년에는 서울 시흥동, 난곡동, 사당동 등지에서 철거가 이루어지자 또 다른 철거민들이 들어와서 인근에 164세대의 한독 주택을 지었다. 복음자리에 이어 독일 구호 단체인 미제레올재단의 후원을 받았고, 이를 기리고자 한국의 ‘한’ 자와 구호 단체 소속 국가인 독일의 ‘독’ 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 마을회관을 먼저 짓고, 8평[약 26.85㎡], 9평[약 30㎡]의 집에 방 1~2칸, 거실, 주방이 있는 이층 집 6동 164가구가 1979년 2월에 입주하였다. 2*('한국학 중앙연구원 - 향토문화 전자대전'에 나와 있는 설명을 인용하였습니다.)

<사진출처: 디지털시흥문화대전,  http://siheung.grandculture.net/siheung/toc/GC06900212>


목화연립

1980년대 중반에는 서울시 목동 철거가 이루어지면서 이주민 36세대를 서울시 강서구청과 시흥시가 신천동 한독 마을 공터에 합동으로 임시 천막을 지어 거주하게 하였다. 이후 이들이 입주할 건물 3개 동 105세대가 지어졌고, 1986년 9월에 철거민들이 입주하여 조성한 마을이 목화마을이다. 처음으로 정부에서 보상금을 받아 입주한 사례로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입주 예정자들과 복음자리 마을, 한독 마을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상량식을 대신하는 미사를 올리기도 하였다. 건축 당시에 지하에 세를 살았던 입주민[1966년생, 여]의 구술에 의하면, 22살[1987년]에 월세로 반지하에 들어갔는데 보증금 50만 원에 월세가 5만 원이 안 되었다고 한다. 화장실은 공중 화장실을 사용했으며 방 한 칸, 주방 겸 거실, 연탄 보일러실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월세 계약은 목화마을 주민자치위원회와 했다고 한다. 3*('한국학 중앙연구원 - 향토문화 전자대전'에 나와 있는 설명을 인용하였습니다.)

<목화연립, 사진출처: 유투브에 공개된 내친구 정일우 영상 캡쳐>

이렇게 앞서 보았듯이 복음자리, 한독 주택, 목화연립. 모두 철거민 이주로 형성된 공동체이다. 그 중심에는 늘 정일우 신부와 제정구 의원이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도 함께 했다.) 이들의 인연, 서울에서 경기도로의 이주, 공동체를 이룬 집단 마을이라는 점에서 과거의 여러 시도들이 대단하다 여겨졌고 이 공간의 현재가 궁금해졌다. 그중에서도 철거민 투쟁으로 주목받았던 목동 철거민들의 보금자리가 가장 궁금했다.


비행기가 지나는 서울의 관문, 목동

본격적으로 현장 답사 이야기를 하기 이전에 <목동 철거민>들에 대해 언급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서울의 도심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그랬듯이 과거의 목동은 현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김포가도와 경인고속도로 중간에 위치한 목동은 안양천변을 옆에 끼고 길게 뚝방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1964년부터 여의도, 영등포, 회현 등 서울 시내의 무허가 주택 지역에서 살다가 집이 철거되면서 거의 버려지다시피 이곳으로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수도시설이 없어서 펌프로 흙탕물을 끌어올려 밥을 지어먹었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등불과 석유 불을 사용했다. 가구당 8평씩 분할하여 서울시가 제공한 땅이었고, 주민들 스스로 개간하여 집을 지었다. 각종 공과금과 더불어 취득세 재산세 등의 세금을 꼬박꼬박 내며 살아온 이들에게 날벼락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1983년 4월 12일 발표한 목동과 신정동 신시가지 조성 계획을 발표했다.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서울의 관문, 김포공항의 길목에 있던 판자촌을 철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1970년대 목동, 사진출처: 나무위키>
<목동 판자촌>

처음엔 철거 후 서민주택을 대량으로 싼 값에 공급하겠다고 하였으나 20~58평형 아파트를 짓겠다며 변경을 하고 가옥당 이주비 50만 원과 아파트 입주권을 줄 테니 나가라고 하였다. 그 당시 아파트 분양 가격에 비해 턱 없이 부족했던 이주비에, 이곳에 정착한 지 10여 년 만에 다시 쫓겨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애초 목동 개발계획은 서민주택을 저렴한 가격으로 대량 공급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싼 땅에 고급 아파트를 지어 정부가 돈을 벌어 올림픽 재원으로 쓰겠다는 정부 주도의 부동산 투기사업으로 변질되면서 3년에 걸친 목동 주민들의 철거 반대 투쟁이 시작되었다.

1985년 3월 22일자, 경향신문

목동 주민들은 1984년 8월 27일 양화교 점거농성에서부터 1985년 3월 20일의 목동사거리 싸움까지 7개월 동안 무려 100여 회 이상의 가두시위와 점거농성을 벌였다. 500~700명 단위로 신민당과 KBS 방송국, 영등포로터리 등에서 기습 가두시위를 벌였으며,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정당 후보 낙선투쟁까지 전개하였다. 경인고속도로를 4번이나 차단하였으며, 15회에 걸쳐 서울시청 진격 투쟁을 벌였다.


이 와중에도 투기꾼들은 몰려와 입주권 가격을 폭등하게 만들었다. 또한 가옥주들에게는 무허가 주택을 재산권을 인정해줬다만, 세입자 문제가 남아 있었다. 때문에 시위는 계속되었다. 1985년 1월에는 시청 앞 농성으로 9명이 중상을 입고 항의 주민 수백 명이 연행당했다. 3월 20일에는 서울 신정동·목동 철거민과 대학생 6백여 명이 선대책 후 철거를 요구하며 야간시위를 전개하였다. 4.* (오픈 아카이브 목동 철거민 투쟁 편 내용을 인용하였습니다.)


결국 그해 3월 18일, 목동에 건립되는 임대 아파트 입주권과 가구당 30만 원의 이주보조금 지급, 가족1인당 5만원씩 추가 지급 등의  세입자 이주대책이 발표됐다. 5* (중앙일보, [서울 만들기] 45. 목동 주민의 저항 내용을 인용하였습니다.)

목동은 그렇게 더 이상 판자촌이 아닌 아파트촌으로 변해갔다. 누가 이곳을 더 이상 판자촌이었다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때의 흔적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저지대여서 비가 많이 오면 자주 물에 잠겼던 목동. 이는 양평동에서 오목교를 건너자 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빗물 펌프장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비가 많이 오면 저지대로 물이 역류하지 않도록 배수펌프를 사용하여 하천으로 방류 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 목동과 가까운 신정, 신월동 일대가 목동과는 별개의 지역으로 보이지만 목동신시가지 개발이 되기 이전의 목동 구시가지였다. 때문에 그 시기에 형성된 주거지로 보이는 구역이 아직 남아 있다. (하지만 이곳도 조만간 곧 재개발로 사라질듯 보인다.)


이 글의 시작은 다큐멘터리 영화 <내친구, 정일우>이지만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져 있다. 대부분 강제로 쫓겨 나는 도시빈민들의 이주, 삶. 특히 목동의 경우는 도시개발 측면도 있지만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 개최의 이면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김포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관문에 위치해 있다는 이유로 철거 대상이 된 목동의 뚝방촌과 철거 반대 투쟁 그리고 경기도 시흥으로 이주 후 목화연립에 살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앞서 소개 했던 복음자리주택, 한독주택, 목화연립까지 모두 같은 모습일까? 아니면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맞긴 채 변화를 맞았을까?


참고자료

1*, 2*, 3*: 내용출처:  한국학 중앙연구원 - 향토문화 전자대전

2. 사진출처 : 내 친구 정일우, https://www.youtube.com/watch?v=3KBo63cipnM&t=3435s

3. 사진출처 : 나무위키

4. 사진출처 : https://m.blog.naver.com/cjsworlarltn/192723633

5. 4* 내용출처: 오픈아카이브 목동철거민투쟁 편,  https://archives.kdemo.or.kr/collections/view/10000060

6. 5* 내용출처: 중앙일보, [서울 만들기] 45. 목동 주민의 저항, https://news.joins.com/article/253502

7. 사진출처: 1985년 3월 22일자,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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