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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민 Mar 17. 2020

[86,88의 공간들] 목동 철거민은 어디로 갔을까?

현장에서 느끼는 그들의 삶(2)_경기도 시흥시 세 개의 마을


서울의 관문 목동에서 경기도 시흥으로

안양천 둑 인근 서울시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았던 목동에서 조용히 잘 살다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으로 인해 쫓겨 나가야 했던 주민들. (관련 자세한 내용은 이전 글 참고 [그들은 왜, 사라져야만 했을까?] ) 3년간 철거민이 할 수 있는 조건들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며 끈질기게 투쟁했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그곳에 계속 살 수 없었고, 어디론가 이주해야 했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지역으로 흩어졌고 그중에서 일부는 경기도 시흥시에서 양평동, 시흥동, 당산동, 사당동 등 철거민들의 정착지로서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던 복음자리와 한독 마을 인근으로 이주했다.  <그들이 쫓겨나가야 했던 이유>는 사라지지 않았고 정부가 이주할 집과 지역을 정해주지는 않았기 때문에 (불법적으로 형성된 판자촌 세입자에게 집을 제공할 의무는 없었으므로) 결과적으로는 쫓겨났다.

목동 철거민 중 대부분은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고 입주권을 끝까지 거부하고 생활 터전을 요구하던 105세대는 복음자리와 한독 마을 인근으로 이주해서 제정구의 영원한 벗 정일우 신부가 독일에 가서 얻은 지원금과 10%의 이자를 내는 정부의 ‘융자금’으로 목화 연립을 건설했다. 목화연립이란 ‘목’동 출신들이 잘 ‘화’ 합해서 살라는 의미라고 한다. 당시 민중 건축가에 의해 지어졌다는 목화연립 세 개동은 35년 세월이 지난 지금에 봐도 매우 독특한 구조의 건물이다. ‘ㄷ’ 자 모형의 연립은 모든 세대가 외부 복도를 통해 다 연결되어 있고 야외극장으로도 활용 가능한 ‘중앙 광장’을 향해 문이 나 있다. 언뜻 보기에도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려 한 건축가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건물 자체도 무척 튼튼해 못이 안 들어갈 정도라고 한다. 현재도 65%가 초기 이주 세대와 2세대가 살고 있고 나머지는 그 후 새로 들어온 입주자들이다. 목화연립이 완공되고 주민들이 입주했는데 ‘데모꾼’들이란 이유로 취직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강한 단결력과 생명력을 가진 이주민들은 이 곳에 뿌리내리는 데 성공했다.

<내용 출처: http://www.kdemo.or.kr/blog/location/post/902 ,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35년이 지난 현재, 어떻게 되었을까?

지나간 세월 속에 존재하는 공간에 대한 가장 큰 이슈는 아마도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까?"일 거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옛말이 여전히 유효하고 10년도 채 안된 1~2년 사이에도 모습을 바꾸는 요즘 시대에 어쩌면 당연스레 떠올리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존재하고 있다면 사라지기 전에, 사라졌다면 존재했던 흔적이라도 담고 싶어 발길을 서둘렀다.

1) 이동수단: 지하철 1호선 - 서해선
2) 이동시간: 신길역 출발 - 소사역 환승 - 신천역 도착 / 52분
3) 복음자리 마을, 한독 마을, 목화연립 간 도보로 이동

복음자리 마을

1) 현재 : 시흥 신천 휴먼시아 (2010년 준공)
2) 지명으로만 남아 있음 : 복음 어린이 공원 / 복음자리 어린이 공원 /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  / 복음자리 입구 등

양평동 철거민들이 가장 먼저 터를 잡고 집을 지었던 복음자리 마을. 서울이 아닌 왜 경기도 시흥이었을까라는 의구심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현실적인 문제였었다. 당시 땅을 직접 매입했었는데, 싼 땅을 구하려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지하철역에서 복음자리 마을 터까지 가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현재 이 자리에는 2010년 준공된 아파트가 있고, 앞쪽에 조성된 공원 이름을 통해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복음 어린이공원과 복음자리 어린이공원. 주변을 둘러보면 고층건물 하나 없이 5~6층 높이의 단층 아파트 단지로만 이루어져 있어서 우뚝 솟아 오른 이곳이 유독 눈에 띈다.

<복음 주택 부지의 모습, 사진출처:  디지털 시흥 문화 대전>

복음자리 마을에서 몇 걸음을 옮기면 한독 마을과 목화연립이 있는데, 가는 길목에는 <작은 자리 종합사회복지관>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는 사회복지관으로서 운영이 되고 있지만, 과거에는 복음자리, 한독 마을, 목화연립 주민들이 모여 교류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지역공동체 구성을 위한 커뮤니티 공간인 <작은 자리 회관>이었다. 복음 신협, 복음 장학회 등의 주민조직 운영 공간, 환갑잔치, 결혼식, 경로잔치, 돌잔치 등 마을 주민들의 행사 장소, 한글교실, 풍물, 서예, 독서모임 등의 교육과 문화활동, 인근 공장 노동자들을 위한 야학, 노동상담과 노조 설립 지원 등 공동체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펼쳐내는 장소였다. 1989년 시흥시 승격과 도시화로 새로운 인구가 유입되면서 3개의 마을만이 아닌 좀 더 큰 범위에서의 공동체를 위한 역할이 필요해짐에 따라 작은 자리 회관은 1996년 사회복지관으로 기능을 전환한다.

<과거 작은 자리 회관 모습, 사진출처: 디지털 시흥 문화대전, https://youtu.be/sK-5 uGjQ7 J8>
<현재 작은 자리 사회복지관>

복지관 건물 한편에는 이주 후 정착하기까지 누구와 함께 했고,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사진과 함께 고 제정구 의원을 그리워하는 비석도 세워 두었다. 복음자리, 한독, 목화마을을 형성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정일우 신부님과 제정구 의원. 두 사람은 도시빈민(혹은 철거민)들과 지속 가능한 공동체 마을을 만들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이다.

제정구와 정일우는 '주민들을 위해서 무엇을 만들거나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고자 하였다. 판자촌 삶에서 그들의 두 가지 약속은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의존토록 하는 일은 절대 하지 말자." "주민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절대 하지 않고 그냥 산다." "그냥 이웃으로 함께 살면서 주민들이 스스로 움직일 때 끝까지 함께 하고 누구보다도 앞장서자!"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가난한 이웃이 바로 하느님'이라고 생각하였고 늘 그들 안에서 그들과 함께하고자 하였다. 주민은 단지 수혜자나 대상자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삶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당당한 주인이며 존엄성과 가능성을 지닌 능동적 주체이며 권리자이다.

작은 자리 종합사회복지관의 핵심 가치는 창립 주체의 사람 중심, 주민 중심의 정신과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작은 자리 복지관은 이러한 정신과 철학을 기초로 가난한 이웃을 섬기고 주민과 함께 동행(同行)하며, 주민 스스로의 힘으로 마을을 변화시키고 더불어 행복한 공동체를 누리는 '주민의 지역사회'를 이루기 위해 실천해오고 있다.

<내용 출처: 작은 자리 사회복지관 사이트 설립 배경과 연혁, http://www.jakunjari.or.kr/wpage/05/05_03.php>              

이 지역의 중심축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복지관을 지나 나지막한 언덕길을 오르면 아파트 단지가 같으면서도

드문 드문 공장들이 보이는 묘한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아파트가 있긴 하지만 대단지로 구성되어 있는 건 아니고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소규모 공장 몇 군데와 다세대 주택 빌라와 섞여 여기가 주거단지인지 공장지대인지 다소 헷갈리는 그 와중에 목화연립(주택)이 보인다.


목화연립

오르락내리락하는 언덕길 위 3개의 건물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목동 철거민 투쟁 당시 입주권을 끝까지 거부하고 생활터전을 요구했던 105세대의 목동 철거민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당시 정부의 융자금으로 건설된 목화연립. 'ㄷ' 형태로 구부러진 복도식 형태. 끝 모서리 부분이 둥글둥글한 형태가 인상적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저 긴 복도를 한번 걸어보고 싶었지만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 문이 설치되어 있어서 접근이 불가했다. 세월이 흐르며 목화연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바뀌었겠지만 그 시대의 기억과 시간을 품고 있는 공간은 그대로여서 이곳을 거쳐간 사람들이 다시 찾아왔을 때 추억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복음자리 마을이 있던 곳과는 달리 주변에 큰 공장은 아니지만 소규모 공장, 사무실이 섞여 있는 이 지역의 특성 때문에 주거지라는 느낌이 적고 , 그렇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이렇게 남아 있을 수 있는 거라 생각한다. <목화마을 기공식> 당시 사진만 봐도 어떤 곳이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목화연립 공사 당시 모습, 사진출처: 디지털 시흥 문화대전, https://youtu.be/sK-5 uGjQ7 J8>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화연립을 두고 재개발이나 재건축에 대한 이슈가 없었을까? 주변을 한번 쓱 둘러보니 목화연립 정도 규모의 소규모 아파트와 연립주택들이 넓게 분포되어 있었다. 만약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거라면 묶어서 재개발/재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분명 나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준공일을 살펴보니 목화연립의 사용 승인이 난 1986년 같은 해에 준공된 아파트들이었다. 1986년을 본격적으로 1990년대까지 동시다발적으로 주거지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영아파트 : 1986년 3월 준공
동경 6차 아파트: 1990년 8월 준공,
연희아파트 : 1986년 4월 준공
극동아파트 :  1986년 5월 준공
진주아파트: 1986년 5월 준공
광덕 아파트 1차 : 1989년 11월 준공

기사를 좀 찾아보니 2014년 9월 27일 자 시흥신문에 30년 이상 아파트, 연립 4곳에 대한 재개발, 재건축 추진 기사가 실렸는데 <은행동 목화연립>이 언급이 되어 있다. 6년이나 지났는데 아직 그대로인 것 보면 다행인가 싶다가도 한 순간에라도 언제, 어떤 방식으로 재건축이 될지는 모르는 상황에 놓여 있으니 앞날을 알 수 없다.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또 어디론가 가야 하는 건가?

재건축이 추진되는 곳은 ▲대야동 영남아파트 1·2단지(1,25가구) 3만 6,182㎡, ▲은행동 목화연립(568가구) 3만 974㎡, ▲거모동 일우 아파트·아주아파트(561가구) 1만 9,407㎡다... 시는 재정비 촉진지구 해제 지역 내 공동주택의 안전 등을 우려하여 지난 2012년 8월 도시주거환경정비 기본계획을 착수, 2013년 약 1년간 정비예정구역 주민들과 함께 정비 기본계획을 구상하였다... (중략) 시는 경기도 승인 신청을 토대로 지속적인 협의를 통해 금년 12월까지 도시주거환경정비 기본계획(변경)을 고시를 할 수 있도록 행정절차를 진행하고 내년도에는 후속 절차인 정비계획을 민·관과 전문가가 함께하여 정비 사업을 적극 지원할 예정이다.
< 내용 출처: 시흥신문, 30년 이상 아파트·연립 4곳 재개발·재건축, http://www.sh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15790 >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젠 <철거민>이 된다는 것이 더 이상 남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 집이 아닌 이상 모두가 세입자이고 20년, 30년 정도의 연수가 오래된 집에 살게 되면 언젠가 <철거>라는 이슈를 대면할 수 있고 상황이 잘 풀리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강제로라도 이주해야 할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집을 소유하여 집주인의 자격이 생기지 않는 이상  이런 상황 자체는 무한 되풀이되겠지만 그 과정에서 필요한 단계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해결되는가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것이다.

“지금이야 개발로 이주를 하게 되면 보상이라도 받지만, 당시에는 철거가 되면 그냥 쫓겨나야 했어요. 부당함보다 울분이 앞섰지요. 달리 방법이 없었어요. 그 돈으로 서울에 살 곳이 없었으니까. 시흥에도 어쩔 수 없이 왔지만 정착하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목화 사람들이라 하면 데모꾼이라고 취직도 안됐고 푸대접받고… ”
/
“우리는 데모꾼이 아니라 살기 위한 몸부림을 친 겁니다”.
/
목화마을을 전체로 본다면 안정된 것이 약 10년 정도 되었다. 이제는 먹고사는 문제는 다 해결됐다. 30년이라는 시간을 지나면서 돌아가신 분도 있고 다른 곳으로 이사하신 분도 있지만 여전히 60%의 정착률을 보이며 2대, 3대까지 살고 있다. 뉴타운에 휩쓸렸고 재건축 D등급판정까지 받은 목화마을이지만 역사성이 있는 건물이니 지속하기로 했다. 집단 이주되어 형성되었던 마을 중 시흥시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목화마을은,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은 채 새롭게 형성된 시흥의 뿌리가 되려 한다.

<내용 출처 : 시흥 옛이야기 | 은행동 목화마을 글 사진 허정임 시민리포터, https://m.blog.naver.com/beausiheung/220726904810 >

일부러 이곳을 찾은 이유도 거기에 있다. "무조건 철거하면 안 돼"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적어도 기본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의 기본 권리를 국가가 제공은 해주지 못할지언정 보호는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법적/제도적으로 기반은 마련해줘야 하지 않을까? 목화연립으로 이주해 온 목동의 주민들은 국가가 아닌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 일어설 수 있었다. 도시빈민들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어떤 존재인가?



한독 마을

현재: 은행마을 녹원아파트 (1997년 11월)


목화연립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한독 마을은 현재 복음자리 마을처럼 사라지고, 대신 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다. 서울시 시흥동, 당산동, 사당동 등지의 철거민들이 모여 살았던 곳. 주변이 온통 논·밭·과수원이던 동네였는데 아직도 그런 풍경이 남아 있다. 길 건너편에 공동묘지가 있고, 비닐하우스도 보인다.

당시에는 구멍가게마저 귀하여 복음자리 마을 주민들까지 한독 마을의 구멍가게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이주민들과의 생활을 함께하기 위해 정일우 신부와 수녀들이 건물에 입주해 정착을 도왔다. *당시 주민들은 민원을 해결하기 위하여 단합했는데, 수인 산업도로를 건너 다니며 소래 국민학교에 등·하교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신호등 설치를 원하는 탄원서를 제출했고, 설치되지 않자 시위를 통하여 첫 신호등 설치를 이루어냈다.*

*내용 출처: 디지털 시흥 문화대전

수인로/수인 산업도로: 치야 고개 삼거리(인천 남동) ↔ 영성 군교육청(경기 수원) / 파란색 표시
시흥시를 통과하는 수인로

녹원아파트를 둘러싸고 동쪽으로 넓게 농경지가 펼쳐져 있었으나, 최근 은계지구 택지개발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검바위 주변까지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철판으로 가려진 곳을 경계로 아파트 공사가 한참 진행 중이다. 이미 신축이 완료된 곳도 있고, 마무리 중인 곳도 있고, 이제 막 철거를 시작하고 있는 곳도 군데군데 보였다.

검바위 초등학교 뒤편으로 들어선 대규모 아파트 단지.

반면에 한독 마을은 사라졌지만 지형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도 있었다.

<1979년 한독 마을, 사진출처: 디지털 시흥 문화대전>
<한독 마을이 사라지고 아파트가 들어선 위치>

시흥시 은행동 자연마을이었던 찬우물 북쪽에 조성되었던 한독 마을과 도시빈민의 공동체로서 처음 발 내디뎠던 복음자리 마을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목화마을까지. 같은 처지에 놓였던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공동체를 형성하며 생활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 한번 되묻게 된다. 특히나 그 시작에는 정일우 신부님과 제정구 의원이 있었는데 이들이 가진 책임감과 마인드는 곱씹어 볼수록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복음자리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 의하면 처음 1~2년 동안에는 마을 사람들끼리 엄청나게 싸우고 난리도 아녔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 불협화음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포기하기보다는 이해하려 애쓰고 기다린 덕분에 올바른 방향의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었을 테다. 힘겹게 제 손으로 한 땀 한 땀 쌓아 올린 집은 또다시 철거되어 사라져 버렸지만 그들이 살아온 의미와 정신은 이곳에 남아 또 다른 가치와 의미를 쌓아 올리고 있다.


여전히 철거민은 존재한다.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멈추지 않고 반복되는 행위로 어디선가 철거민들의 힘겨운 소식들을 뉴스를 통해 접하곤 한다. 다소 험한 장면들을 지켜보면서 분명 예전보다 더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라는 걸 금방 깨닫게 된다.

왜 바뀌지 않는 것일까?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여전히 이 사회는 철거민을 외면하려 하는 걸까? 아님 또 어떤 이유 때문에 사라져야 하는 것일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 또다시 외면당하고 배제되며 현재를 살아가는 철거민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질문을 던져 본다.


참고자료

1. 디지털 시흥 문화 대전, http://siheung.grandculture.net (과거사진 모두 이곳에서 퍼왔습니다.)

2. 시대의 아픔, 공동체의 아름다움-복음자리, https://youtu.be/sK-5 uGjQ7 J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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