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해보면 알게 될 거야
그림을 그리고 싶을 때가 있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을 때, 입고 싶은 옷을 입을 수 없을 때,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없을 때. 그림으로는 내 모든 것들을 그려낼 수 있었다. 바쁜 일과를 보내고 집으로 가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거나, 내 눈에 보기 좋은 것들을 발견할 때면 나는 그림이 그리고 싶어 졌다.
서른넷인 나는 여전히 하고 싶은 것들이 많다. 그건 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들으며 소나타의 그 음들을 내 손으로 쳐보겠다고 피아노 학원을 등록한 적이 있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피아노를 배우기에 늦은 나이였다. 내 배움은 언제나 한 박자씩 느렸다.
우리 학교에서는 형편이 좋은 친구들은 플룻을 배웠다. 그 플룻 가방을 보면 얼마나 부러웠는지. 없는 형편에 아빠에게 한 달만이라도 다니게 해달라고 해서 학원을 등록했다. 동네 피아노 학원은 모두 유, 초등반만 있었지만 내가 등록한 학원은 음악학원이고, 플룻을 배우는 친구들이 거기에 다녔다. 동네에서 나를 받아줄 학원은 그곳뿐이었다. 역시 기본이라고는 없어서 한 달 동안 동요만 치고 있었다. 한 달이 지나고 다음 달에 낼 학원비가 없었는데 나는 무슨 오기였는지 '내일 드릴게요.' 하고는 학원을 이틀 정도 더 나갔을 때였다. 제일 먼저 도착해서 선생님 옆에 앉아있었는데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두 명이 들이닥쳤다. 선생님은 똑똑똑 하는 순간 화장실에 숨으셨고 나 혼자 그 두 남자를 상대해야 했다.
“어른 안 계시니?” 나는 말했다. “안 계시는데요?” 두 남자는 말없이 돌아갔다. 선생님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고, 나도 선생님이 왜 숨으셨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사실 그 남자들을 보는 순간 알아챘다. 다음날 학교가 끝나자마자 학원으로 달려갔지만 그 날 학원 문은 닫혀있었다. 나는 그 뒤로 세 번 정도 학원을 가보았지만 더 이상 그곳에서 악기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우리 가족은 이사를 12번 정도 다녔는데, 초등학교 때 CA로 태권도반을 다닐 때였다. 아빠는 내가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네가 뭘 한다고 그래? 하다가 말 거면 시작도 하지 마.”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태권도반에서 처음 노란 띠를 따서 도복을 받게 되었는데 나는 도복을 받은 다음 주에 급하게 이사를 해야 했고, 그 하얗고 멋진 도복을 입어보지도 못하고 버려야만 했다. 그런 기억과 아빠의 말들 때문인지 나는 항상 ‘나는 왜 맨날 하다가 말지, 내가 정말 끈기가 없나.’라고 생각했고 그게 나 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내가 가진 기질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불가피한 상황 속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무언가를 계속 포기당해야만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장하면서 알게 된 나는 뭐든 시작하면 될 때까지 시도해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좋아하면 오래오래 좋아한다. 어쩌면 아빠의 하다가 말 거면 시작도 하지 말라는 말이 내 삶에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중간에 멈출지라도 무엇이든 시작해보면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 내가 어떤 기질을 가지고 있는지.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