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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경별진 Nov 14. 2021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얼마 전 직원의 결혼식이 있어서 전주에 다녀왔다. 여행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만 다녀봤기에 가보지 않은 곳에 간다는 생각에 조금 설렜다. 이제는 정적인 삶이 익숙해서 어디를 간다고 생각하면 걱정이 먼저 될 때도 있다. 노는 것이 어색해서 새 학기에 친구들과 처음으로 인사하는 순간에 느끼는 그 어색함을 새로운 곳에 가면 아직도 느낀다. 혹시나 표가 없을까 봐 한 달 전부터 KTX를 예매하고 기다렸다. 아무 일 없이 하루하루 보낼 때는 한 달이라는 시간이 금방 지나가버리는데, 무언가를 기다릴 때에는 시간이 무척이나 느리게 가는 것 같다. 기다릴 때만큼은 시간을 건너뛰고 싶은 생각이 간절할 때가 있다. '손꼽아 기다린다.'라는 말이 이해가 간다. 가끔 두려운 일들을 지나야 할 때가 오면 그 시간들이 무감각하게, 무심하게 나를 모른 척 스쳐 지나가기를 바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순간을 마주해야 한다면 괜찮아질 때까지의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한다. 그런 시간의 흐름이 주는 괜찮음을 겪어본 사람들은 항상 이런 말을 한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시간이 지나면 해결된다는 말은 맞는 것 같다. 어떤 것들은 약으로도 안되고, 위로로도 안 될 때가 있다. 그럴 땐 마지막으로 시간이 주는 나아짐을 경험하게 된다. 몸이든, 마음이든 시간을 보내고 버티고 기다리면 약을 먹은 것처럼 점점 괜찮아진다.


아무튼 나는 처음으로 가보는 전주에 기대가 됐다. 꽤 먼 거리인데, KTX를 타고 1시간 반의 시간을 보냈더니 전주에 가있었다. 요즘은 시간을 보낸다는 문장과 행동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면 하루가 가고, 또 보내면 1년이 가고, 내가 어떤 곳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집이 아닌 다른 지역에 가 있을 수도 있고, 또는 책을 읽어서 어제 보다 더 나은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아침부터 부지런하게 다니면 하루에 여러 가지 많은 일을 할 수가 있다. 나는 주로 집에만 있기 때문에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느낀 것은 처음 걸어보는 거리에서 내 걸음이 무척이나 뻣뻣했기 때문이다.


결혼식에 다녀온지라 조금은 불편한 차림으로 한옥마을을 걸었다. 대부분이 한복을 빌려 입고 사진을 찍거나, 전동 자전거를 빌려 타고 거리와 문화를 즐기고 있었다. 모두가 익숙하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길에 털털하게 앉아 야무지게 길거리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니 매일 회사에 앉아 심각하게만 있었던 나를 생각나게 했다. '내가 너무 겁을 먹었었구나.' 어쩐지 다른 세상에 와있는 것 같았다. 어색하게 차려입은 옷에 기와집 아래에서 사진을 찍었더니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낯설어 사진 찍는 것을 멈췄다.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주는 그 묘한 감정을 직접적으로 느끼니 괜스레 마음이 쓸쓸해졌다. 내게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내가 어울리지 못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


몇 년 만에 신은 구두에 발이 아팠다. 바닥이 울퉁불퉁해서 더는 걷기가 힘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구경보다는 슬리퍼 파는 곳만 찾아다니다가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는 찰나에 기적적으로 슬리퍼 파는 곳을 발견했다. 나는 5천 원을 주고 내 발에게 편안함을 선물했다. 회사에서는 말도 잘하고 여기저기 벌어진 일들을 나서서 해결하기 바쁜데, 전동 자전거 빌리는 일에는 낯설어 말도 못 꺼내는 나다. 나는 정장 바지에 5천 원짜리 슬리퍼를 신고 벽화마을을 구경한 뒤, 집까지 신고 왔다. 재미있는 건 가게 직원에게 말 한마디 꺼내는 것에는 부끄러워하면서, 슬리퍼를 신고 집에 오는 것은 부끄럽지가 않다.


올해 초부터 경주여행을 가보겠다고 해 놓고는 여태 가지 못했다. 전주행 KTX를 타자 마자 들었던 생각이 '별거 아닌데, 왜 여태 못했을까.'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는 것이 잘 되지 않는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내겐 가장 어렵다.


막내 이모는 설암과 모야모야병을 앓고 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는 것이 힘들다. 혀가 자꾸 말라서 물도 계속 마셔줘야 한다. 엄마는 아픈 막내 동생을 걱정한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가족들은 아픈 곳이 많다. 나는 문득 엄마와 이모가 따로 만나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나서 언젠가 엄마에게 이모 집에 놀러 가자고 했다. 엄마와 이모는 너무 좋아했다. 우리는 그 말을 하고 한 달 뒤에 이모집에 가기로 했다. 이모는 우리가 약속한 날을 기다리며 매주 토요일 밤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언제 와.' '언니 몇 시에 와?' 이모는 우리 집에서 50분 정도 거리에 산다. 내가 쪽방에 살았던 그 시절, 그곳에서 이모는 우리의 옆동네에 살았었다. 이모는 아직도 그 동네에 산다.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 내가 사는 동네와도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인데, 할아버지 간호를 하느라 이모에게 가보지 못했던 것이 미안했다. 엄마는 몇 주동안 이모에게 줄 음식들을 하나씩 준비했고, 출발하기 전에 차에 가득 실었다. 우리는 이모집에 거의 25년 만에 갔다. 옛 생각이 나기도 했고, 이모와 엄마가 시간을 보내는 것을 바라보니 너무 좋았다. '우리 밥 먹고 어디 갈까.?' 우리는 이모랑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이모는 '우리 여기 근처에 예쁜 카페에 가볼까? 이모는 카페에 가본 적이 없어.' 속상했다. 나도 잘 나가지는 않지만, 그래도 엄마와 집 가까운 곳에 자주 나갔다 오고는 했다. 우리는 이모와 함께 강과 단풍이 잘 보이는 예쁜 카페를 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집 근처인데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네. 올해는 단풍구경 못하나 했는데, 이렇게 단풍을 보네.' 나는 요즘 가족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아프다. '이모, 다음에 내가 또 데려가 줄게.'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모에게 전화가 왔다. '언니, 우리 이제 언제 또 보나.' 언니와 내가 애틋한 관계이기에 엄마와 이모의 대화가 계속 마음에 남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까이 있어도 멀게만 느껴진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사실 나는 좋아하면 더 멀어지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좋아서 가까워지게 되면 헤어짐이 주는 그 두려움이 미리 떠올라 불안하다. 안정감 없는 미래가 미리 두려웠다. 자꾸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떠나는 것 같았다. 상처 받기 싫은 철없는 마음일지도, 상대를 미워하고 싶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느 날은 혼자서 열심히 멀어지고, 스스로 이제는 다 멀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혼자 멀어지는 건 익숙한데 가까워지는 건 지긋지긋하게 서툴다. 하지만 요즘은 조금씩 바뀌려고 하고 있는 것 같다. 먼 곳으로 가보는 일이 어렵게만 느껴졌는데, 사실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었고, 가게 직원에게도 용기 내서 말을 걸어볼 수 있고, 이모에게도 먼저 달려갈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이 서툼을 열심히 도와보기로 한다. 멀어지면 상처를 덜 받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보다 가까이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적어도 평생에 후회할 일들을 줄어들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받는 상처보다, 스스로 후회하며 사는 것이 더 괴로운 일 같다. 그리고 내가 가까워지고자 하면 그 무언가도 내게 가까이 다가오는 어떤 기적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생기는 것 같다.


가까이 있는데도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보이는 것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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