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은 가족으로만 가득 차 있어서 누군가를 만날 여유가 없었다. 내가 가정을 돌보지 않아도 될 조금의 여유가 있었을 학창 시절과 사회생활을 막 시작했던 스무 살 초반 이후로는 연애를 안 했다. 아니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빼곡했던 내 삶에 오는 잠깐의 여유 같은 감정들을 짧게 메모하기 시작했다. 출근길에 보이는 바쁘게 사는 사람들, 퇴근길에 보는 달, 5월이면 어김없이 피는 빌라 앞 덩쿨 장미, 오래된 미용실 앞 작은 화분들, 그리고 좋아하는 음악. 그러다가 다른 이들에게도 위로를 주고 싶은 생각에 SNS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출판 제의가 왔다. 나는 의류회사 8년 차 직장인이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기도 하고 언니가 국어국문학과를 나와서 책과는 친하긴 했지만 정식으로 글을 써본 적은 없었다. 출판을 결심하고 나서는 내 이야기들을 빨리 담고 싶은 생각에 회사일이 끝나면 새벽 내내 원고를 쓰고, 마트에 가서도 가족들이 장보는 것을 기다리며 글을 썼다. 주말에도 하루 종일 글만 썼다. 그리고 한 달 만에 원고를 완성했다. 글의 대부분이 아빠와의 치열한 신경전이 다였다. 나는 글을 쓰다가 지난날이 서러워 펑펑 울기도 하고, 아빠의 파라솔 에피소드를 쓸 때면 그때가 생각나서 웃음 짓기도 했다. 치열하고 아프고 격렬했던 내 삶을 빼곡히 다 쓰고 출판된 지 3주 후에 아빠가 갑자기 떠났다. 만약 아빠가 떠난 후에 글을 썼다면 생생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들이 모두 슬프게만 쓰였을 것 같다. 그렇게 아빠와의 생동감 있었던 이야기들이 내 책에 기록되었고, 나는 아빠를 글로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늙어서도 잊어버리지 않을 우리의 이야기가 남은 것이다.
그렇게 첫 책이 나온 후에는 알랭 드 보통 같은 남녀 간의 사랑 글을 써보고 싶었다. 그녀가 장보고 난 후에 봉투에 물건을 담는 모습과 그것을 바라보는 그의 감정까지 세세하게 남겨진. 아니면 보통의 존재 같은 글, 아니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같은 글. 하지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을 학창 시절의 풋풋한, 그리고 스무 살 초반 연애초보였던 그 시절의 기억들이 잘 나지 않는다. 폭풍을 지나온 88년생의 나는 내가 좋아하는 책들처럼 평범하고도 소소한, 그러나 따뜻한. 그런 사랑 글을 남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