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냐 퇴근이냐
갑갑한 한국이 싫고,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삶이 싫고, 불합리한 조직에 순응해 가는 본인들의 모습이 싫어, 안정적인 직장을 퇴사하고 1년 가까이 세계 여행을 다녀온 부부를 만난 이야기.
사실 초반에 부부의 직업이 전문직(자세한 직업은 언급 안하겠다)이라는 얘기를 듣고 약간 공감대가 떨어졌었다. 전문직이니 여행에서 돌아온 후의 ‘무직’ 기간에 대한 걱정을 남들보다는 덜 했을 거고, 그래서 훌쩍 떠나는 게 더 쉬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사실 퇴사하고 세계여행을 떠나는 것에 대한 가장 큰 걱정은 여행을 떠나는 것 자체보다는 여행을 다녀온 후 다시 한국에 ‘무직’으로 속할 내 모습이 아주 걱정되고, 불확실하고, 남들의 시선도 신경 쓰이는 데다가, 갔다와서 죽도 밥도 안되면 어떡하지 등등의 걱정 때문이다. 부부의 직업을 듣고 나니 나 같은 평범한 직장인(그들도 어차피 직장인이지만)들이 세계여행을 망설이는 이유와는 조금 맥락이 다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이야기를 다 듣고나서 든 생각은, 어차피 월급 받는 회사원들은 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고민을 하며, 누구는 더 쉽고 누구는 더 어려운 퇴사가 어딨겠냐는 거다.
정해진 틀을 싫어하고, 주변 사람의 시선보다는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이 더 중요하고, 하고 싶은 일은 반드시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남편.
반면, 대부분 정해진 틀에 맞춰 살아왔고, 사회적 지위가 아주 중요하며, 안정적인 수입으로 삶을 누리며 사는 것이 중요한 아내. 이렇게 다른 둘이 함께 세계여행을 떠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이 싫어서’ 였다. 새벽 2~3시 퇴근은 기본에, 주말도 없고, 불합리하다 느껴지는 조직의 모습에 딱히 옳은 말은 못하고 스스로 순응해 가는 모습을 느낄 때마다 ‘질식해 가고 있다’ 생각이 들었다 했다. 도피를 위한 세계여행을 결심하게 된 이유다.
충분히 안정적인 직장과 사회적 지위를 갖고도 한국이 싫어 도망을 결심했다는 부부의 말이 많이 씁쓸하면서도, 어떻게 보면 그만큼 가지고 누리고 있던 게 많았던 사람들이라 오히려 그 용기가 대단하다 생각했다.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나라는 존재를 아무도 모르는 이방인들 사이에 있다는 것 자체가 설렘이다. 내 신분을 속이고 일주일 살아도 전혀 지장 없다. 내가 어디에 속한 어느 회사의 직장인이고, 내가 어디 사는 누구고, 어느 대학을 나왔고, 누구 친구고, 몇 년 생이고, 결혼을 안 한 미혼이고, 등등 이렇게 나를 규정하는 것들에서 다 벗어나 ‘자연인’(부부의 말을 빌리자면)의 상태로 돌아간다. 그럼 진짜 내가 누구고, 어떤 사람이고, 이런 걸 생각해 볼 수가 있는데, 나는 마음이 반반이다.
해외여행을 할 때마다 드는 내 감정은, ‘어딘가에 아무데도 속해있지 않은 내모습이 너무 자유롭고 좋다’ 절반, 동시에 ‘진짜 나는 별거 아닌 아시안1 이다 = 오히려 한국에서 어딘가에 속해 있는 내 모습이 더 좋다’ 절반.
여행을 하면서 아내 분이 결심하게 된 작은 마음의 변화가 아직까지도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고, 또 그 부분 때문에 아내 분은 지금 아주 많이 행복하다고 했다. 핵심은 바로 이 태도다. 고작 1년 세계여행을 다녀온다고 삶이 갑자기 드라마틱하게 바뀌거나, 내 인생을 통째로 바꿀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거나 하는건 거의 <비포 선라이즈> 같은 로맨스 영화에나 나올 법 한 일이라 생각한다. 다만 아무도 나를 모르는 타지에서 튀어나오는 근거 없는 당당함(?)을 베이스에 깔고, 평소 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씩 도전할 수 있는건 여행자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다. 아내 분의 도전은 그 동안 본인을 옥죄고 있던 ‘착한사람 콤플렉스’를 벗어던지고 ‘아닌 건 아니다’라고 당당하게 컴플레인하는 것이었고, 그 때의 작은 시도가 지금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아주 크게 바꿔놨다고 하셨다.
남편 분의 도전은, 친화력 갖기였다고 한다. 공감 갔던 이야기 중 하나가 ‘해외여행을 한다고 해서 외국인 친구를 저절로 사귀게 될 거라는 꿈은 버려라’ 였다. 나도 공감 하는 게, 먼저 다가올 거라 생각하고 가만히 있으면 정말 100에 80의 확률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욕망이나 해보지 않은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에 대해 딱히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남편 분의 마인드와 비슷한 점이 많다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면서 그로 인해 누릴 수 있는 풍족한 것이나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는 상태를 좋아하고, 뭔가를 계속해서 성취해가면서 ‘아 내 존재가 이렇구나’를 느끼는 아내 분의 마음도 나와 정말 같다 생각했다.
그 분들이 해준 이야기는 ‘우리 세계여행 이렇게나 많은 데 다녀왔어’, ‘회사 때려치고 갑자기 떠날 수 있는 용기 그게 얼마나 멋진 건지 아니’ 같은 게 아니었다. 정말 솔직한 날 것의 이야기들이었는데, 가장 오래 기억하고 싶은 말 중에 하나는 아내 분이 했던 말이다.
“여행 8개월 째 됐을 때 한국이 너무 가고 싶었는데, 그 감정이 가장 절정에 달했을 때가 있어요. 스페인에서 낮에 브런치를 먹고 있는데, 점심시간이 되니 정장을 입은 근처 회사의 직장인들이 우르르 나오더라고요. 그 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나도 강남에서 옷 잘 차려 입고 출퇴근 하던 때가 있었는데. 아 나도 목에 사원증 걸고 노트북 들고 회사 다니고 싶다. 저 사람들 부럽다. 근데 남편은 그 순간에도 아 쟤네는 출근했는데 우리는 여기서 놀고 있네 쿠하하하핳. 이랬다니까요? 우린 정말 태생부터 다른 사람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끼고. 제가 해 드리고 싶은 말은, 꼭 뭔가를 다 때려치고 여행을 가야만 답을 찾을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사실 유럽 애들은 회사 한두달씩 휴직 내고 여행 다니는게 일상이니까 저희처럼 ‘퇴사하고 세계여행!’ 이런 욕망이 거의 없다고 보면 돼요. 근데 저희는 여기에 속해 있는 사람들인데 어떡해요. 내 일도 열심히 하고, 또 그 와중에 짬내서 잠깐씩 다녀오는 여행이라면 그만큼 더 소중하고, 또 더 의미있을 거 같다는 생각을 해요. 저희는 그게 안 되니까 다 그만 두고 떠날 수 밖에 없던 거였고.”
그리고 또 하나 와 닿았던 말. “생각보다 남들은 나에게 많은 신경을 쓰지 않아요” 부부가 여행을 결심하고, 또 다녀와서 일상에 복귀하고, 그 모든 일련의 과정 속에서 늘 했던 고민이 ‘아 예전회사 다시 가면 좀 뻘쭘한데 어떡하지?’ ‘너네 여행 다녀와서 결국 또 회사원이야?’ 등등의 흔히 예상할 수 있는 타인의 말들이나 시선들을 걱정했다고 한다. 근데 다녀와서 보니 부부가 여행을 다녀왔던 그 1년의 시간은, 타인에게는 그냥 평소와 다를 바 없는 1년이었고, 별 다른 게 크게 변하지 않았으며 부부가 여행을 다녀와서 뭘 하건, 왜 왔건, 그냥 잠시 궁금해 할 뿐이지 어디까지나 그들에게는 철저한 남일이라는 거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예전보다 남의 시선에서 아주 많이 자유로워졌다고 했다.
1년의 여행을 끝내고 현실에 복귀한 부부는 아직도 고민을 하고 있는 단계라 했다. 아내 분의 경우에는, 다니는 회사에서 승진도 하고 싶고, 하는 일을 좀 더 잘해내고 싶으면서도, 그러면 다시 예전처럼 회사에 질식되는 삶으로 돌아갈까봐 걱정도 되고, 남편 분의 경우에는, 좋아하는 일들을 하며 살고 싶은데 또 그것만 하고 살기에는 돈벌이가 안되고.
5년차 직장인에 접어드니 엉덩이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하는 일이 싫은 건 아니지만 이대로 계속 회사만 다니며 살아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직장인이 회사를 다니며 퇴근 후 할 수 있는 것(공부, 취미활동)/ 직장인이 회사와 병행하며 부수입을 낼 수 있는 것(투잡)/ 직장인이 회사를 그만두고 새롭게 할 수 있는 것(....) 등등의 가능성들을 고민했고 그 중 하나가 세계여행이었다. 그래서 퇴직금 중간정산 페이지도 한창 들락날락거렸다. 세계여행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은 돈과 시간인데 그 시간은 마침표의 순간이 와야 생긴다. 그 순간은 예를 들면 퇴사인데 사실 예를 들면이 아니라 거의 유일한 시점이라 본다.
엉덩이가 들썩이는 지금을 충분히 고민하고 즐기려 한다. 나를 갉아먹기보다는 오히려 나를 더 움직이게 만들어서다. 고민을 시작하게 되면서부터 시야와 가능성을 넓혀 더 바지런히 움직인다. 알수 없는 조급한 마음이 들다가 또 안심하다가도, 지루하다가 또 분주하다. 아내 분 말대로 어쩌면 지금처럼 회사를 다니며 일년에 한 두 번 휴가를 내 여행을 다녀오는 게 내 삶을 가장 윤택하게 만드는 길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서도, 아직 도전해 보지 않은 것에 대한 막연한 설렘도 여전히 있다. 계속 고민하고 움직이고 조급해하고 바지런 떨거다. 퇴사냐, 퇴근이냐!
- 부부가 전해준 세계여행 꿀팁 -
1. 짐은 최대한 가볍게. 필요하면 가서 사라. 가면 다 있다.
2. 세계여행=배낭여행 아니다. 캐리어에 챙겨라. 30kg 짜리 배낭 들고 다니다가 목디스크 온다.
3. 비싼 네비게이션 필요 없음. 구글맵이 최고.
4. 대부분 와이파이가 잘 터진다.
5. 여행자 보험은 ‘삼성 글로벌케어’ 추천, 여행예산 가계부 앱으로는 ‘트라비 포켓’을 추천한다.
6. 남미는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고, 대중교통이 아주 잘 되어있다.
7. 한국인이 많이 안가는 곳? 생각해 봐라. 사람들이 많이 안가는 데는 이유가 있다.
8. 사진, 영상을 많이 남겨라
+ 이번 크로아티아 여행에서 처음으로 영상을 많이 남겼는데, 영상으로 뭔가를 남기는 건 정말 해도 해도 과하지 않은 일인 것 같다. 사진으로는 담기지 않는 그 때의 분위기 느낌들이 소리와 어우러져서 내 기억을 몇 배는 아주 아주 더 생생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