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고 한달살기 아니고 휴가내고 한달살기
안녕하세요. ㅇㅇ팀 ㅇㅇㅇ입니다.
9/00~9/00 장기근속 휴가로 자리를 비웁니다.
휴가 전날 자동회신 메일을 써 본 게 숱하지만 23박 24일은 처음이었다. 3주를 넘는 기간 동안 나를 둘러싼 모든 현실에서 로그아웃을 한다니. 그 순간만큼은 그 누구보다 내가 위너 같은 느낌이었는데. 어디 동네방네 격하게 자랑하고 싶었으나 고작 자랑할 데가 인스타그램 뿐이었다는 게 참...
올해 8월, 첫 회사에 입사한지 만 5년이 됐고 ‘장기 근속’의 보상으로 10일의 휴가를 받았다. 요즘엔 근속을 오래 하면 그 보상으로 휴가나 돈을 주는 회사가 꽤 있다. 옛날만큼 ‘평생 직장’의 의미가 사라진 데다가, 솔직히 ‘여기가 진짜 내 회사’라는 느낌으로 절대적인 충성심으로 회사를 다니는 회사원이 얼마나 될까 싶다. 회사 입장에서는 사람이 계속 나가면 그만큼 인력을 새로 충원해 또 가르쳐야 하고, 그게 결국 다 비용이니 기존 인력들을 최대한 붙잡아 두기 위해 장기근속 보상이라는 혜택을 준다. 이게 한 개인에게 얼마나 큰 동기부여가 될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겐 아주 충분한 동기부여와 원동력이 됐다.
2년 전 퇴사를 한 동기를 최근에 만났다. 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한 회사에 5년이나 다녀?”
순간 적잖이 당황했다. 내가 일부러 5년을 아득바득 참고 ‘존버’ 하며 회사를 다녔다기 보다는 그냥 나름대로 그때 그때 충실하면서, 일 하고 보람도 얻고 스트레스도 받고 회사 욕도 하고 휴가도 가고 뭐 그러다 보니 5년이 간 것 뿐인데, 누가 보기엔 한 회사를 5년 ‘씩이나’ 다닌 게 놀라울 수도 있겠다. 아 요즘처럼 2~3년만에 회사를 옮기고 이직을 하는 세상에서, 큰 불평불만 없이 한 회사를 오래 다니는 게 좀 신기해 보일 수도 있겠다 뭐.
엄마는 가끔 말한다.
“누구네 집 보면(엄마들 자주 하는 화법) 딸들이 매일 집에 오면 퇴사한다고 징징댄다던데 5년을 별 말 없이 다닌 딸이 자랑스럽고 고마워”
음. 엄마. 나는 회사 다닌 것 뿐인데 엄마한테는 그게 또 자랑스러운 딸의 모습 중 한 면이 될 수도 있겠구나 뭐. 음. 그거 참 다행이네.
뭐가 됐건. 회사를 만 5년 다니니 회사에서는 이제 업무도 많이 익숙하고 안정적인 상태고, 고생했다고 휴가도 주고, 회사 밖에서는 어느덧 6년차 직장인이고, 또 부모님에게 자랑스럽고 고마운 딸도 됐고. 뭐가 됐건 좋은 게 좋은 거다.
장기여행의 목적지는 남미와 발리를 두고 오래 고민 했다.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 최소 10년은 회사를 다닐 텐데 그 사이에 또 이렇게 길게 휴가를 낼 수 있는 날이 올까. 남미는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가야 하지 않을까.
오랜 고민의 의미가 무색할 만큼 최종결정은 의외로 별 거 아닌 계기로 하게 됐다. 일하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아니 내가 어쨌든 5년 존버 해서 받은 리프레시 휴간데 가서 고생하는 거 말고 진짜 ‘아무것도 안하고 쉬는’ 휴양을 해야겠다는 생각. 여기에 여자들끼리 남미 가면 위험해~ 라고 말리는 주변인들의 말도 한 몫을 해서. 최종 목적지는 발리가 됐다.
9월의 추석 연휴와 연차 4일을 더 붙여서 23박 24일의 일정으로 발리 왕복 비행기를 끊었다. 어디 블로그나 주변 건너건너 지인들의 이야기로만 듣던 ‘발리 한달 살기’(6일 모자란)를 내가 하게 된 거다. ‘퇴사하고 한달 살기’는 많이 봤는데 ‘휴가 내고 한달 살기’는 사실 잘 못 봤다.
이 기나긴 여정을 함께한 동행자는 5년을 함께 한 입사동기 P였는데, 국내 해외 할 것 없이 함께 여행도 많이 다니고 공유 하는 것도 많아 굳이 뭘 맞추지 않아도 찰떡인 여행 메이트다.
‘아무것도 안하기’의 여행 컨셉과 일맥상통하게 가기 전에도 아무 것도 안 했다. 그간의 여름 휴가와 너무 비교될 정도로. 첫 일주일을 보낼 꾸따 서핑 캠프를 알아본 것, 우붓, 렘봉안, 길리의 일정으로 이동하자는 대강의 루트 정도.
성공적으로 ‘아무 것도 안한’(진짜 아무 것도 안하진 않았더라) 장기휴가를 다녀온 뒤 느낀 건 크게 두 개다.
하나는, 꼭 회사를 다니는 것만이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늘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니 더 크게 느껴졌다. 근데 우선 뭐가 됐건, 나는 일단 가능한 한 회사를 더 오래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회사가 아닌 다른 목표에 대한(오래 전부터 입으로 말해오던 목표) 의지는 강해졌으나 일단 그 중장기 목표를 이루기 위한 현재의 최선의 수단은 회사를 다니는 거라는 약간의 앞뒤 안 맞는 생각.
다른 하나는, 휴가는 길게 가나 짧게 가나, 그냥 다 짧다는 것. 남는 건 또 사진 뿐.
24일의 시간 동안 느꼈던 감흥들은 차례차례 정리해 써 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