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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역 Dec 09. 2018

해방촌 걷기

내가 해방촌을 좋아하는 이유

걷기 좋은 동네 해방촌을 좋아한다. 일부러 수고롭게 찾아가야 하는 곳이라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도로인지 인도인지 구분도 안되는 좁은 길을 쭉 따라 걷다보면 처음에는 ‘이게 다야?’ 하는데, 그 사이사이 숨어 있는 가게들을 찾아가는게 해방촌의 매력이다.


비좁은 길 위로 마을버스라도 지나가면, 길 가던 사람들이 조심조심 멈춰서 한줄로 가야할 정도로 길이 자그마하다. 좁은 길 양 편엔 내가 애정하는 작은 가게들이 즐비해 있는데, 가게들이 워낙 다닥다닥 붙어있거나, 간판이 잘 안보이는 경우가 많아 처음 가는 가게를 찾아 가는 날에는 가게를 바로 코 앞에 두고도 빙빙 헤매기 쉽상이다.


해방촌까지 가려면 녹사평역 2번 출구서부터 한참을 걸어야 하는데, 출구를 나와 쭉 직진하다 보면 소문자 y 모양의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왼쪽 갈림길로 들어서면 해방촌이 시작된다. 초입 왼편에 장독대가 가득 쌓여있어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걸으면 걸을수록 남산과 가까워져 좋다. 좀 더 설명을 보태면, 해방촌이 남산타워의 남쪽, 즉 남산 밑 언덕에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해방촌 초입부터 계속 직진해 위로 올라가게 되면, 남산타워 바로 밑 남산 3호터널과 맞닿게 된다.



해방촌이라는 이름은, 광복과 함께 해외여행에서 돌아온 사람들, 북쪽에서 월남한 사람들, 한국 전쟁 때문에 피난 온 사람들이 이 동네에 정착하게 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지어졌다.


해방촌의 모든 가게들은 공간이 좁다보니 바 형식의 자리들이 많다. 그래서 창 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다. 가게 뒤로는 작은 빌라 같은 것들이 언덕 위로 빼곡한데 밤이 되면 그 동네에 사는 듯한 외국인들이 피자집이나, 맥주펍에 많이 보인다. 이태원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경리단길 보다는 불빛도 별로 없고 길도 비좁을 뿐더러 사람도 많이 북적대지가 않아 대충 쓱 보면 정말 별거 없어 보이는 동네다. 하지만 해방촌의 작은 가게들은 한 번만 가고 끝나는 데가 없다. 한 번 가보면 두번이고 세번이고 계속 찾아가고 싶어지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이 데려가고 싶어진다.


좋아하는 가게들에 대한 감회

미주리

해방촌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게. 좋아하는 사람들을 정말 많이 데리고 갔고, 다들 좋아했다. 간판에 한자로 ‘미주리’라고 아주 작게 써있어 찾기가 쉽지 않은데, 어둑하고 비좁고 아늑한 느낌이다. 와인병, 식기구들이 셋트장처럼 널부러져 있는 바 자리도 좋고, 가구와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가득찬 안쪽 룸 자리도 여럿이서 도란도란 놀기에 좋다. 룸 자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 받지 않는 독립된 공간이라 예약을 꼭 해야 한다. 어두운 노란 빛의 은은한 조명과 오래된 라디오, 난로, 꽃무늬 커튼, 찬장 같은 빈티지 소품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메뉴는 모두 한식 퓨전이다. 적어도 한번씩은 다 먹어봤는데, 나는 그 중에서도 들깨 미주리탕과 돼지앞다리 석쇠구이에 햇반을 추가해 먹는 걸 제일 좋아한다. 참소라 봉골레, 목살구이와 젓갈 메뉴도 맛있다.



성광대도

해방촌 메인 길에서 쭉 걷다보면 세갈래 길이 나오는데, ‘꼼모아’ 라는 프랑스 음식점 간판이 보이는 왼쪽 갈래길로 올라가면 된다. 꽤 가파른 언덕길이다. 조금 오르다 보면 왼편에 강한 붉은 조명이 새나오고 있는 작은 가게가 있는데 살짝 반지하라 찾기가 쉽진 않다.


오래된 술집 같기도 하고 홍콩의 밤 같기도 하다. 붉은 조명과 낡은 검정 가죽소파 같은 것들이 만들어낸 분위기다. 명란을 가득 올린 고소한 덮밥과 담백한 닭구이 요리가 제일 맛있다. 원하는 취향대로 칵테일도 주문할 수 있고 가끔 석화 같은 것들을 푸짐하게 서비스로 주신다.



올드나이브스(old knives) 

간판이 없다. 해방촌 메인 길에서 세갈래 길이 나오기 직전에 있는데, 미수식당 바로 건너편이다.오픈 키친 앞 바 자리와 테이블 두세개 정도가 전부다.


메뉴판도 없다. 주 메뉴는 스테이크와 통 베이컨 크림 파스타 단 두 개다. 오픈 키친이라 눈 앞에서 바로 구워 주시는데 스테이크가 정말 두껍고 입에서 녹는다.


바 자리에 앉아서, 연극 무대를 구경하는 것 같다는 상상을 했는데 키친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목소리가 다 연극배우 같았고 옷차림도 개성이 독특했다.



트웰브(Bar Twelve)

여기도 간판에 없다. 절대 안 열릴 것 같은 육중한 철문 위에 로마숫자로 1부터 12까지 적혀져 있는데, 숫자 하나가 좌석 하나를 뜻한다. 숫자 8에 불이 꺼지면 8번 자리가 비었다는 거고, 불이 1부터 12까지 들어와 있으면 만석이라는 의미다.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문 밖에선 절대 상상도 못하던 비밀스런 공간이 펼쳐져 있다. 동굴 같기도 하고, 조명이나 소품들이 영화 ‘킹스맨’을 떠오르게 한다. 딱 12자리 밖에 없는 비좁은 공간에서 마치 특별하게 비밀공간에 초대 받은 듯한 느낌을 만끽할 수 있다.


피아프(Piaf)

성광대도를 지나서 정말 한참을 올라가야 나오는 곳인데 가파른 언덕이라 가는 길이 꽤 고되다. 테이블 두세개 정도와 바 자리로 아늑하게 꾸며져 있는데 메뉴도 다양하고 와인 1병 콜키지프리라 오래도록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보니스피자

해방촌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맛집인데, 유일하게 줄을 너무 오래 서야하는 곳이라 치느님 보다는 피느님을 외치는 나도 딱 두 번밖에 도전하지 못했다. 미국 교환학생 시절, 한 조각이 얼굴 크기만한 대형 파파존스 피자 한판을 시켜놓고 기숙사 친구들이랑 잔디밭에서 밤새 먹고 놀았는데, 그 때 먹은 파파존스 피자는 정말 인생 피자였다. 보니스피자의 페퍼로니&하와이안 조합은, 행복했던 그 순간의 맛을 유일하게 떠올리게 한다.


쿠촐로

여기는 다 아는 인기 파스타집. 김지운 셰프의 ‘쿠촐로’, ‘마렘마’, ‘볼피노’ 시리즈 중 한 곳이다. 내가 생면파스타를 처음으로 맛 본 곳인데, 트러플을 너무 좋아하는 나에겐 블랙트러플 파스타 하나를 먹기 위해 가는 곳이다. 화이트라구 파스타, 소고기 까르파치오도 정말 훌륭하다.



오랑오랑

해방촌 신흥시장 안에 다 쓰러져가는 작은 가게들과 낡은 골목들 사이 쌩뚱맞게 있는 카페다. 여기에 진짜 루프탑 카페가 있어? 하는 의심이 자꾸 드는데, 카페 내부는 외관과 다르게 앤티크한 소품들로 근사하게 꾸며져 있다. 옥상으로 가려면 경사가 무지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아주 위험하니 조심해야 한다. 옥상에는 테이블로 쓸 수 있는 나무판자 몇개, 고철 의자 같은 것들이 무심하게 툭툭 놓여져 있다. 평범한 낡은 소품들과 붉은 벽돌집이 굉장히 이색적으로 느껴지는 공간인데, 바로 앞에는 남산타워가 선명히 보인다.



야채가게

신선한 우니한판, 우니우동, 우니계란 같은 색다른 우니요리가 일품인 곳이다. 젊은 사장님이 매일매일   새로운 재료들로 뚝딱뚝딱 근사한 요리를 만드는데, 배우 천정명의 단골 집으로도 알려져 있다.


중앙에 빙 둘러 앉을 수 있는 큰 테이블 하나와 구석 구석 있는 빈티지 소품 같은 것들이 독특하다.



리빙룸

지나가다 우연히 들어가게 된 곳인데 인테리어가 정말 거실처럼 꾸며져 있어 기억에 많이 남는다. 해방촌에 있는 다른 펍에 비해 공간도 꽤 널찍하고 의자도 듬성 듬성 있는게 색다른 느낌이다. 거실 중앙에 있는 긴 쇼파와 선풍기 한 대, 벽면에 턱턱 붙어있는 액자 같은 것들이 진짜 거실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서울비닐(Seoul Vinyl)

사장님의 취향을 알 수 있는 음악 선곡과 여러 LP 들도 구경할 수 있는 곳. 비가 눅눅하게 내리는 날에 다시 가면 좋을 거 같다.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 즐거운 게 해방촌의 또 다른 매력이다. 해방촌 초입에서 남산과 가까워지는 길이 미세한 오르막이라, 반대로 내려가는 발걸음이 몇 배는 가볍다. 그래서인지 올라갈 땐 안보이던 가게들이 다시 눈에 들어오기도 하는데, 밤이 깊어질수록 저마다 흥겨워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보여 내려가는 길이 더 즐겁다.


날이 많이 추워져 오래 걷지 못하는 게 아쉽다. 추위가 다 지나가고 나면, 밤이 깊을 때까지 해방촌 구석구석을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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