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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역 Dec 18. 2018

기숙학교

하지 말라는 것들을 꾸역꾸역 하던 날들

내가 나온 김포시 월곶면 갈산리에 있는 기숙학교는 안과 밖이 아주 이질적이다.


학교 근처에 볼거라고는 낮고 평평한 논밭이나, 동네 사람들이나 가끔 들르는 작고 오래된 읍내 시장, 노선도 몇 개 없는 느릿느릿한 마을버스, 기껏해야 오리구이집 같은 것 뿐인데, 학교 안엔 갓 지어진 신식 기숙사 건물과 나름 세련된 교복, 외고입시를 준비하며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학생들과, 중국인, 일본인, 미국인의 원어민 교사들이 학교 안팎의 세상을 아주 다른 곳으로 만들었다.


입학이 확정되고서 OT에 오기 전에 여자는 연노란색, 남자는 연두색의 아주 촌스러운 겨울용 생활복과 FILA에서 나온 투박하고 못생긴 검정색 스포츠샌들 같은 것들을 사야 했는데, 교복 이외의 이런 부수적인 의류잡화들만 거의 몇십만원에 육박해 돈이 너무 아까웠다. 그 못생기고 비싼 옷들은, 우리가 졸업을 한 뒤엔 엄마들이 집앞 산책을 가거나, 집 안에서 아무렇게나 입는 옷이 됐다.


한 학년은 총 8반인데 영중, 영일, 중어, 일어 이렇게 네 개의 과, 각 두 반씩이다. 같은 과 안에서만 반을 바꾸기 때문에 3년 내내 같은 반을 한 친구도 꽤 있다.


입학 후 첫 평가시험이었나, 무튼 뭔가 시험을 보던 날이었다. 다들 숨죽여 앉아있는데 앞문에서부터 딱 딱 플랫구두 굽소리를 내며 골반을 양쪽으로 흔들며 들어오는 친구가 있었다. 단정한 단발에 딸기모양 머리핀을 꼽고 자주색 안경에 연한 와인색 스키니를 입은 S였는데, 첫인상이 독특했다.


눈썹 바로 위까지 빼곡히 채운 앞머리에 가슴 밑까지 자란 긴 생머리, 얼굴의 절반을 덮는 빨간 뿔테 안경을 낀 L. 호피무늬의 큰 잠자리 안경을 쓰고 호탕하게 웃는 웃음소리가 특이했던 또 다른 L. 길고 빼빼 마른 체형의 J와 새하얀 피부에 큰 눈을 가진 또 다른 J까지. 다 다른 외모에 다른 개성을 가진 여섯의 친구들이 이 기숙학교에서 10년 같은 3년을 보냈다.


하이텍시냐, 하이테크냐

나와 딸기핀 S, 빨간안경 L은 인천에서, 호피무늬 L과 흰 피부 J는 일산에서 왔다. 그 당시 유행하던 얇은 심의 잉크펜 하이테크를 우리는 당연히 ‘하이테크’라 불렀는데. 일산에서 온 L과 J는 그게 ‘하이텍시’라고 해서 서로 박박 우겼던 기억이 난다. 별 것도 아닌데 서로 초중딩 시절의 자존심인지 뭔지 때문에, 하이테크 말고도 각자의 지역차로 서로 큰소리를 내고 비웃고 하던 일들이 그 후로도 여러 번 있었다.


중학교 때 우리 동네에서는 머리를 돌돌 말아 거의 정수리 맨 끝에 똥처럼 올리는 당고머리가 유행이었다. 나는 입학 하자마자 정수리 위에 큰 왕만두를 얹고 다녔는데, 우리 윗선배 중 몇몇이 나를 ‘명성황후’, ‘왕만두’라 부른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중에 한 명은 검정색 뿔테 사이로 쫙 올라간 눈꼬리를 가진 센 인상의 언니였는데, 괜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쫄아서 우연히 마주치면 가만히 눈을 깔고 지나갔다. 우리는 그 언니를 잠자리 안경이라고 불렀는데, 몇 달이 지나고서 정수리 위에 나보다 더 큰 왕만두를 얹고 다니는 잠자리를 보게 됐다.


내 첫번째 룸메이트

L은 키가 작고, 마르고, 무쌍커플에 까무잡잡한 피부 톤을 가졌다. 복도에서 만나면 특유의 하이톤으로 ‘룸메!’라고 부르며 다가와 폭 안기는데, 한 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체구를 가졌다. 복도를 지나가면 특유의 러쉬 샴푸향이 진하게 남았다. 방에서 속옷 차림으로 아무렇지 않게 활개하거나, 좋아하는 남자애한테 먼저 뽀뽀를 한다거나 하는 그 당시 보기드문 당찬 매력을 가진 L이었다. 고양이같은 얼굴에 고양이처럼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고 다녔는데 여자가 봐도 묘한 게 살살 흘렀다. 원래는 6개월에 한번 룸메가 바뀌는게 룰인데, L은 ‘대상포진이라 새로운 룸메한테 몸을 보여주기 싫어요’라는 말도 안되는 뻥을 쳐가며 남들보다 3배나 긴 1년 반 동안이나, 나와 죽이 잘맞는 룸메가 됐다.


어른들을 기억하는 법

3년을 우리와 함께한 선생님, 기숙사 사감들을 포함한 모든 어른들을 기억해내는 특징적인 에피소드들이 하나씩 있다. 되돌아보면 훈훈한 기억보다는 어이없고 웃긴 기억들이 왜 더 오래 남는지 모르겠다. 다한증이었던 윤리선생님 L은 손을 툭 털면 앞자리 친구에게까지 땀방울이 후두둑 떨어졌고, 다니엘헤니를 닮은 영어회화 선생님 J는 처음엔 외모 때문에 여럿이 호감을 가졌으나, 한번은 수업시간에 꾸벅꾸벅 조는 L의 머리 위에 뜨거운 보온병에 담긴 물을 실실 웃으며 쏟아 부은 사건이 있었고, 잘생긴 싸이코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줬다.


할아버지에 가까운 지긋한 나이의 중국인 선생님 Wang은, 얼굴에서 도통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웃는 일도, 목소리 톤 변화도 거의 없다. 그래서 아주 가끔은 Wang이 소름이 돋게 무서운 존재로 느껴지거나, 왠지 모를 연민이 들 때도 있었다. 대머리 영어회화 선생님 D는 영어를 잘 가르치긴 하나 특이한 행동들을 하는 또라이로 유명했는데, 졸업을 하고 나서 몇몇 여자 애들한테 사적인 문자를 보낸다고 소문이 나면서 진짜 또라이로 판명이 나게 됐다.


기숙사 층마다 있는 사감들을 부르는 별명이 하나씩 있었는데, 그 중 제일 대빵인 사감을 DD라 불렀다.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의, 머리 숱이 없고, 배가 조금 나온 아저씨였는데, 입술 색은 늘 핏기 없는 보라빛이었고 양 볼은 심술이 난 불독처럼 아래로 축 쳐졌다. DD한테 잘못 걸리면 듣기 싫은 짜증을 듣는게 일쑤여서 최대한 눈에 안걸리는게 상책이었다. 저 멀리 DD가 지나가기라도 하면 마치 다같이 신호음을 보내듯 규칙적인 박자에 맞춰서 외쳤다. “디디, 디디, 디디, 디디”


10년이 지난 지금은, 연세가 60에 가까워진 분도 있을 거다. 계속 선생님을 하는 분도 있을 거고, 아예 다른 일을 하는 분도 있을 거고. 다들 어디서 뭘 하고 계실지, 그들도 우리처럼 그 때의 기숙학교를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하지 말라는 것들을 꾸역꾸역 하던 날들

사감들이 온 방을 뒤지며 핸드폰이나 술, 담배 같은 반입 금지된 물건들을 샅샅이 찾아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연한 인권침해인데, 이런 상식 밖의 일들이 그 때는 아주 당연하게 일어났다. 핸드폰이나 고데기 같은 것들을 뺏길까봐 핸드폰은 지퍼락에 넣어 가루세제통 안에 묻어두고, 고데기는 창 밖 틀 같은 데에 몰래 껴놓는, 우리만의 미션수행 같은 날들이 계속 됐다.


밤 11시 40분 정도 매일같이 점호를 하는데, 직접 사감들이 방 하나하나 돌아다니며 제대로 다들 있는지 확인을 한다. 자기 방이 아닌 다른 방에서의 합숙은 금지고, 걸리면 벌점이다. 점호가 다 끝나고 소등을 한 뒤 사감 몰래 숨죽여 방 이동을 했는데, 한 때 기숙사 전체를 휩쓸고 간 장난전화를 다같이 하기 위해서다. 한창 숨죽여 낄낄 대다가 우리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져서 사감이 급습했는데, L의 방에 몰래 놀러온 S는 너무 당황해서 한사람인척 하려고 L 위에 그대로 포개어 누웠다. 생각지도 못한 S의 순발력과 빠릿함 때문에 다행히 걸리진 않았는데, 하나로 포개지는 그 장면을 생각하면 여전히 아주 숭하고, 미친 듯이 웃기다.


기숙사 내 주문음식은 절대 금지다. 마송 읍내에 ‘일품불닭’ 이라는 엄청난 맛집이 있는데, 매콤한 불닭 소스에 밥을 비벼 먹는게 별미다. 일품불닭은 전화 주문도 가능했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다행히 우리 편이었다. 아주머니와의 코웍으로 창문이나 숨겨진 뒷문으로 아슬아슬하게 불닭을 받아 세상에서 제일맛있게, 양념이 묻은 손가락까지 쪽쪽 빨던 기억이 난다. 우리의 열일곱부터 열아홉을 달고 짜게 만들어준 1등 공신인데, 졸업을 하고서 먹으러 가자 가자 여러번 말만 하고 정작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시 맛보지 못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지코바치킨을 먹으면서 그 때 그 맛이 생각났는데, 아주 흉내만 낼 뿐 여전히 그 자리를 완전히 채우진 못한다.


아디오스로 깨던 아침

‘와 뻬이비 와(why baby why)’가 반복되는 중독성 있는 후렴구와 함께 매일 아침을 맞았다. 신서유기에 나오는 기상미션처럼, 라틴풍의 노래 간주가 시작되면 다들 좀비처럼 기어 일어나 대충 아무거나 옷가지를 둘러매고 나가서 산책로 한바퀴를 쭉 돈 뒤에 사감에게 이름 체크를 해야 한다. 기상송은 연달아 한 대여섯곡 나오는데 노래들이 다 끝나기 전에 기상과 산책 모두를 완료해야 한다. 은지원의 아디오스, 지아의 물론, 에픽하이의 우산과 같은 3년 내내 거의 바뀌지 않던 기상송들은, 여전히 우연히라도 듣게 되면 몸이 먼저 반응하는데, 침대에 누워서 지금 일어날까 말까 매일같이 똑같은 고민을 하던 그때의 날들이 반사적으로 떠오른다. 그 땐 몰랐다. 이후로 10년 동안 매일 아침을, 알람과 싸움 하며 살게 될 줄은. 아직도 은지원 ‘아디오스’를 들으면 억지로 잠에서 깨던 아침과 눈을 반쯤 감고 생활복을 주섬주섬 입던 순간들이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그땐 무척이나 짧게 느껴졌던 노래가 지금 다시 들으니 3분 25초짜리다. 오늘 아침에 아주 오랜만에 아디오스를 들으며 생각했다. 앞으로 몇 년이고, 몇 십년이고, 어쩌면 내가 죽기 전까지, 그 때를 떠올리고 되감고 싶을 때마다 들을 수 있는 아디오스 같은 노래가 있다는 건 참 행운이고 즐거운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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