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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역 Jan 13. 2019

버리며 살기로 했다

비움의 기적

11년 만에 이사를 하면서, 비움을 얻었다.


버리는 것보다는 층층이, 켜켜이, 차곡차곡이 더 익숙해, 그렇게 수 년간 쌓아 올린 짐들에 파묻힌 채 살아왔다. 창고 안엔 몇 년 동안 한번도 열어 보지 않은 상자들이 가득했다.  


이건 왠지 나중에 한 번은 더 입을 것 같아, 이건 몇 년 뒤 유행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하며 미련을 갖고 못 버리고 무겁게 이고 지고 쌓아온 수 많은 옷들. 내가 옷정리를 시작했다 하니 친구 C가 한마디 했다. 일년 동안 한 번도 안 꺼냈으면 앞으로도 계속 안 꺼낼 거라고.


정말 그랬다. 왠지 내년에 입을 것 같아 박스에 넣어둔 옷은 새롭게 사는 새 옷들에 묻혀 상자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고 나중엔 어디있는지 찾을 수도 없을 정도로 까맣게 잊혀졌다. 그리고 이렇게 큰 맘 먹고 옷 정리를 할 때나 되서야 아 이게 있었지, 하고 깨닫게 되는데, 이 때 과감히 버리지 않으면 또 다시 쌓고 묻히고 잊히는 패턴이 반복 된다.  


똑같은 검정 폴라티인데 재질의 쫀쫀함(?)이 미세하게 달라 하나를 버릴지 말지 한참을 고민하는 날 보며 엄마가 말했다. 버리고 새로 사. 그리고 새 걸 사려면 일단 버려야지.

 

맞는 말이다. 비워야 자리가 생기고, 그 자리에 새 것이 들어온다. 기존 걸 하나도 버리지 않은 채 그 위에 계속 새 것만 계속 쌓아 올리면 결국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게 된다. 욕심이다.


미련 없이 과감히 다 버렸다. 이거 없다고 내일 당장 발가벗고 나가야되는 것도 아니고.

큰 종량제 봉투 크기로 몇 봉지가 나왔다. 아, 나는 정말 벌 받을거야. 이렇게 무분별하게 옷을 사대다니.


내 방에 빈 공간을 남기기로 했다. 예전엔 수납장, 옷장, 모든 구석의 공간을 켜켜이 채워뒀다면, 이제는 최대한 비워두는 거다. 빈 공간을 보니 숨통이 트이고 스트레스가 사라졌고, 죽었던 고요함이 소생했다.


쓸데 없는 짐들은 다 버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방을 채웠다. 좋아하는 그림들, 여행 가서 늘 사오는 엽서, 직접 찍은 필름카메라 사진, 그리고 작은 스피커 하나와 향초를 머리맡에 뒀다.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놓으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만들어진 나만의 작은 세계가 펼쳐졌다.



침대 옆에는 작은 우드 협탁을 놨는데 침대에서 차를 마시거나 책을 읽을 때 아주 요긴하게 쓰고 있다. 방 분위기는 화이트&우드로 통일하고 싶어 동대문 시장에 가서 베란다 커튼, 피아노 덮개로 쓸 만한 새하얀 커튼을 맞췄다.



피아노 공간엔 생동감을 주고 싶어 코튼 액자 두 개를 걸었다. 베란다 옷장 벽에는 내가 좋아하는 린다 매카트니의 사진포스터를 붙였다. 커튼을 걷히면 초록, 파랑 자연을 배경으로 폴 매카트니와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실루엣이 나오는게 꽤 맘에 든다.



내 방과 거실 사이 주방 한 켠도 엄마와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웠다. 여기도 작은 스피커 하나와 향초, 그리고 커피.



비움은 기적이다. 버리고 비운 것 밖에 없는데 이렇게나 마음이 단번에 달라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집순이와는 거리가 한참 멀던 내가, 내 방에 오래 머무는 시간을 좋아하고 소중히 하게 된 것도 기적이다. 오래된 묵은 짐들과 불필요한 욕심들을 한바탕 게워내고 나니, 내내 비우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과감하게 비우는 삶, 버리는 것에 미련 없는 삶을 지향하고, 사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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