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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역 Apr 19. 2019

일회용의 맛

내가 일회용 필름카메라를 사는 이유

몇 년 전부터 길고 짧은 여행을 갈 때마다 일회용 필름카메라를 필수 준비물로 챙긴다. 여행 중에 들고 다니기도 가볍고 부피도 작아 부담이 없다. 보통 하루에 필름 한 통 꼴로 계산하는데 3박 4일이면 3개, 6박 7일이면 최소 5개는 캐리어 구석에 담는다.


오프라인에서 일회용 필름카메라를 구하기가 쉽지 않아 주로 온라인을 통해 구매한다. 내가 애용하는 건 ‘코닥 펀세이버 800-27’나 ‘코닥 데이라이트 800-27’(야외용)인데 11번가에서 펀세이버는 12000원, 데이라이트는 9700원에 구매할 수 있다.



여행을 가기 전에는 온라인에서 미리 주문을 하고, 여행을 다녀온 뒤엔 사진관에 가서 필름을 맡긴다. 스캔본을 받을 메일주소를 적고 짧으면 2~3일, 길게는 일주일까지 기다려 다시 사진관에 들러 사진을 받아온다.



아주 번거롭고, 불편하고, 비효율적이다.


이 번거로움을 굳이 감수하는 이유는 필름카메라 특유의 아날로그 감성 분위기가 좋아서다.



특히 자연광에서 찍은 사진들은 두고두고 보고 싶은 사진들이 많다.



찍을 수 있는 컷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한 컷 한 컷 소중하게 아껴 찍는 맛도 있고, 찍고 난 뒤 바로 확인도 못하고 어떻게 나왔을지 두근두근 기다리는 2~3일의 시간도 나름 재미가 있다.


투박하고 거친 질감의 사진이 나올 때도 있고, 초점이 하나도 안 맞춰진 흐릿한 사진이 나올 때도 있다. 예측하기 어려운 불확실한 맛이 있다.



한 컷 찍은 뒤 다음 컷을 찍기 위해 드르륵 넘길 때의 소리도 좋다. 다음 컷을 준비하는 찰나가 되기도 하고 몇 컷 남았는지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대부분 자연광에 있을 때 셔터를 누르지만 간혹 어두운 실내에서 찍은 사진들도 마음에 쏙 들 때가 있다.



창 사진 찍는 순간을 제일 좋아한다. 네모난 창 사이로 비치는 자연광이 실내를 환하게 비추는 자연스러운 찰나가 좋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내 시선으로 담는 것도 좋다. 현상한 뒤 느껴지는 따뜻한 시선이 있다.



최근에 빈티지 필름카메라를 하나 장만했다. 필름 한 통 쓰고 버려지는 일회용 카메라가 아깝기도 하고 내 손 때가 묻은 카메라가 갖고 싶기도 했고.

연남동의 ‘엘리카메라’는 1800~1900년대 유럽 빈티지 필름카메라를 전문으로 판매하는 곳이다. 별별 신기한 빈티지 카메라들이 가득하다.



한 눈에 반해 사게 된 ‘엑사 1A’는 아래로 내려다보는 뷰파인더가 가장 큰 매력이다. 예약하고 무려 3주나 기다려 받았다. 카메라 나이가 60년이 넘었다고 한다. 오래된 나이만큼 잦은 고장들이 있을 수 있어 작은 버튼들 하나하나 소중히 다뤄줘야 한다. 빈티지 카메라로 담아내는 세상은 또 어떤 느낌일까.


EXA 1a


아주 번거롭고,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일회용 카메라는 앞으로도 계속 애용할 예정이다. 어디로 떠나든 꼭 챙겨야 할 필수품 0순위다.


27컷을 다 찍으면 영원히 버려지고 소진되지만, 한 컷 한 컷 아껴 찍고 현상해서 받기까지의 느긋하고 신중한 과정들은 ‘일회용’ 이란 수식어와는 대비가 되니 매력적이다.


오전에 받은 제주 사진들이 다 너무 마음에 들어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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