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떨결에 경제학과로 입학했다.
얼굴에는 고등학생 특유의 풋풋함이 여전히 묻어있는 채로 대학교 1학년,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새로운 친구들, 아직은 낯선 대학교, 낯선 환경들.
성인이 되었음에도 나는 고등학교 모습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사람보다 책이 익숙한 학생으로 몸만 자라서 대학교에 입학했다.
사람 눈을 마주치는 것이 굉장히 어색했다. 신입생 엠티 자리에 선배님들과 함께 자리에 술판을 벌여 술게임을 하고 서로 인사를 하고 있는데, 술도 안 맞았고 사람들이 삼삼오오 둘러싸인 분위기가 숨이 막혔던 것이 기억이 난다.
웃음소리와 잔 부딪히는 소리가 뒤엉켜 귀가 멍해졌다. 구석에서 소주잔을 괜히 돌리다가, 사람들이 어깨동무하며 노래를 부르는 순간 나는 더는 버틸 수 없어 조용히 빠져나왔다.
겉돌고 싶어서 겉도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자연스럽게 어깨동무를 하는 모습들이 보였지만, 나는 투명인간이 된 것만 같았다. '소속되어 있다'는 감각이 무엇인지 몰랐다. 아니, 애초에 그런 경험 자체가 있었는지부터 의문이었다.
돌이켜보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가족의 떠돌이 생활로 깊은 우정을 쌓을 기회가 없었다. 고등학교에서는 입시에 치여 쉬는 시간마저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었다. 사람과의 관계보다는 책 속의 문장들이 더 편했다. 그런 내게 갑작스럽게 '사회적 존재'가 되라고 하는 것은 너무 가혹했다.
어렵게 신입생 오티에서 친구 2명을 사귀었다. 그래도 이 친구들을 보면서 같이 지내다 보면 무난하게 학교생활을 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애석하게도 그런 일은 없다는 듯 한 달도 채 지나기 전에 두 친구 모두 재수를 결심하며 학교를 떠났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강의실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을 즈음, 칠판에 판서 하나가 적혀 있었다.
“모든 인간은 합리적으로 행동한다.”
경제학원론 수업. 책을 펼치면 나오는 첫 번째 가정이었다. 의사결정은 선택이고, 모든 선택에는 기회비용이 따른다. 사람들은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칠판 위에서 사회는 X축과 Y축으로 잘린 도형처럼 간단해 보였다. 하지만 내 삶은 어떤 축에도 닿지 못한 채 공중에 떠 있는 점 같았다.
나는 합리적 인간이라는 가정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내가 문과를 선택한 것도,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움츠러드는 것도 - 어느 것 하나 '합리적'이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책 속의 이야기에서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나는 책 바깥에서 일어나는 ‘비합리적’인 일들에 대해서 너무나도 취약한 상태였다.
사람들과 진정한 관계를 맺으며 그들과 울고 웃어도 모자란 시간에, 나는 그 시간을 모조리 종이와 텔레비전 그리고 스크린 속에 묻어버렸다. 사람 한 명 한 명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다. 나는 강의를 듣고, 과제를 하고, 집에 돌아가는 일상을 반복했다. 감정의 기복도 없이, 누군가와 깊은 대화를 나누지도 않은 채로.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설 때, 옆에서 걷던 동기가 무심히 내뱉었다.
“너, 되게 로봇 같다.”
무표정한 말투. 나는 그 말이 마음속 깊이 박히는 걸 느꼈다.
아무런 감정도, 표정도 읽히지가 않아서 무슨 생각하고 사는지 모르겠다고. 나는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분명히 나한테도 감정이 있었다.
외로움도, 불안함도, 소속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다만 표현 방법을 전혀 몰라 감정이 엉킬 대로 엉켜 있었다.
화가 나는지, 슬픈지, 그냥 피곤한 건지 구분이 안 됐다. 목구멍 어딘가에 뭔가 걸려 있는 것 같은데 토해낼 수도, 삼킬 수도 없었다.
무언가 잘못됐다.
'합리적 인간'을 전제로 하는 학문을 배우는 나 자신이 가장 비합리적인 존재였다. 내가 왜 이렇게 사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지 - 나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지나고 보니 그저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살고 있었다. 그토록 바랐던 '자연스러운 삶',‘푸른 하늘이 보이는 삶’이 이런 무기력함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을 텐데.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나는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마치 개미지옥에 빠진 벌레처럼,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거울 앞에 서면 낯선 사람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람이 뭘 원하는지,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알아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