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불안이라는 감정(2)

by 서우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데에는 돈 한 푼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도서관 이용자들은 '실패'를 두려워한다. - 장강명, <당선, 합격, 계급>

길었던 여름이 지나고 벼는 고개를 숙이고 나무는 붉은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아침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고 바람은 차다.


매미소리가 시끄럽게 울어대던 시간은 어디 가고 가끔씩 들려오는 참새소리. 떨어지는 낙엽.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벌레들도 하나둘씩 숨어든다.


가을이다.


오래간만에 긴 연휴를 받았다. 집에서 혼자 있기에는 적적하고 몸이 근질거려 서해안을 따라 차를 끌꼬 천천히 내려갔다.


검은색 아스팔트 위를 달리면서 건물들과 아파트가 즐비하는 회색 풍경에서 벗어나 주변 풍경이 초록빛에서 누런빛으로 변하는 산 풍경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느새 나도 멀리 보이는 산처럼 천천히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을 체감했다.


네모난 창문 너머 똑같은 회색 풍경 속에서 멈춰있던 시간이, 산과 강을 만나자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새삼 나도 나이가 들었고, 나의 생활도 많이 안정되었음을 자각한다. 하지만 누렇게 변한 논 풍경을 보면서 이전에 읽었던 장강명 소설가의 <당선, 합격, 계급>의 저 구절이 떠오른다.


내가 걸어온 길이 정말로, 내가 좋아해서 따라갔던 일들이었을까?


이렇게 행복한 순간들도 결국은 흔들리는 순간이 올 텐데 그게 과연 단단한 근거에 선 것일까? 그냥 '실패'를 두려워해서, 주변에서 말하는 좋은 기업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살아가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배워서 그렇게 행동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들이 도서관에서 제일 많이 빌리는 책이 '손수레에 담은 책‘들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이 읽고 막 반납한 책들. <당선, 합격, 계급>의 표현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그 실패란 '상당한 시간을 들여 꾹 참고 읽었지만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책임을 뒤늦게 깨닫는 일‘이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시간과 노력이 문제다.- - 장강명, <당선, 합격, 계급>, p351

시간과 노력. 내가 열심히 했는데 그 결과물이 알고 보니까 의미도 없고 인정도 받기 어려운 것이라면 내 인생 전부가 부정당한 느낌이어서 그게 싫어서 내가 ‘이상적인’ 판단에 집착했던 것이 아닐까.


어렵게 찾은 안정적인 생활이지만 한편으로는 그게 과연 안정적일까라는 불안감. 내가 그냥 ‘네모난 규격’ 안에서 세상을 다각적으로 보지 못하고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불안감.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네모난 것들 뿐인데
우린 언제나 듣지 잘난 어른의 멋진 이 말
‘세상은 둥글게 살아야 해’
- 네모의 꿈 / W.H.I.T.E

세상은 둥근데 나도 모르게 네모난 삶에 익숙해서 거기에 내가 물들어버린 것은 아닌가. '감정이라는 것도 어떨 때는 모난 면이 있다.


회사 내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화를 내봤자 손해'라며 분노를 상자에 넣었다. 좋아하는 동기가 퇴사한다고 했을 때, '원래 회사 생활은 그런 거지'라며 서운함을 상자에 넣었다.


언제부턴가 내 감정들은 모두 '적당한 크기'의 네모난 상자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분노라는 감정도, 기쁨이라는 감정도, 행복이라는 감정도 어떨 때는 둥글게 움직일 텐데. 이제는 감정이 올라오면 그렇구나 하면서 네모 상자 안에 묻어뒀구나. 잠잠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스쳐가는 누런 벼이삭들을 보면서 문득 깨달았다.


저 벼들도 초록에서 노랗게, 다시 고개를 숙이며 변해왔듯이, 나의 불안도 계절처럼 자연스러운 변화의 일부일지 모른다고. 완벽한 답이 아니더라도.


내가 지향했었던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이상향에서 멀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자연 속의 둥글고 다채로운 풍경처럼. 그걸 받아들이기까지는 무수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갔다.


취직이 어려워서 불안에 떨고 있었던 나는 이제 변화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나로 바뀌었지만.


풍경이 썩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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