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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May 16. 2022

영천 은해사, 백흥암, 거조암

일년에 두 번만 개방하는 백흥암과 국보 제14호 거조암 영산전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팔공산 아래에 있는 사찰인 은해사.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도 인종의 태실이 있어서 오랜 세월 동안 명맥을 유지했다. 비록 19세기 중반 대화재로 1,000여 칸의 대다수 건물이 산화했지만, 오늘날에도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본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사찰이다. 그래서 부속암자도 상당히 많다.


그런데 부속암자 중에 일 년에 딱 두 번 개방되는 암자가 하나 있다. 바로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처인 백흥암. 부처님오신날과 음력 7월 15일 백중에 딱 두 번 개방된다. 특히 백흥암의 경우 부속건물인 극락전과 극락전 안에 있는 수미단이 보물로 지정되어 이번 기회에 꼭 보고 싶었다. 부처님 오신날을 기회삼아 이번에 백흥암, 은해사 그리고 고려시대 건물이 남아 있는 거조암를 둘러보기로 했다.


일 년에 딱 두 번 개방하는 백흥암


부처님 오신날이어서 그런지 은해사 들어가는 길에는 수많은 차량으로 가득했다. 나도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간신히 주차장에 들어섰는데, 처음에는 백흥암을 도보로 올라가려고 했다. 하지만 다행히 오늘은 특별한 날이어서 백흥암으로 가는 차량이 11시부터 3시까지 운행한다고 한다. 백흥암 외에도 혹시 부처님 오신날 은해사의 다른 암자를 둘러보고 싶다면 참고하자.


차를 타고 백흥암 가는 길을 보아하니 의외로 오르막길이 길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백흥암에 도착하니 보통 때는 닫혀 있는 보화루의 문이 오늘은 활짝 열려 있다. 코로나19가 진정되는 상황이어서 그런지 수많은 사람들이 누에 앉아서 차를 즐기는 풍경이 보였다.


부처님오신날의 백흥암 보화루. 극락전으로 가는 문이 열려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보화루 누각에서 차담을 나누고 있다.


보화루를 지나니 조선 후기 기둥머리와 그 좌우로 공포를 짜 놓은 다포양식의 건물이자 보물 제790호인 극락전이 수많은 연등을 앞으로 하고 우뚝 서 있다. 극락전 건물을 보아하니 색이 상당히 바라 있었는데, 인조 21년(1643)에 짓고 여러 차례 수리한 것이라고 한다. 무려 350년 세월을 넘게 버텨온 것이다. 극락전은 말 그대로 극락세계를 상징하고 있는 아미타부처를 좌우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시고 있다.


극락전 불상 아래 불단도 꼭 잊지 말고 주목하자. 불교에서 상상의 산인 수미산 형태의 불단으로 제작했다고 해서 수미단이라고 부른다. 봉황, 공작, 용, 코끼리, 사자와 같은 동물들을 상당히 섬세하게 조각했다. 조선 전기 작품 중 조각이 매우 특이하고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아 1968년 보물 제486호로 지정되었다.


보물 제790호 백흥암 극락전. 기둥과 기둥사이에도 공포를 올린 다포양식과 팔작지붕의 화려함이 조화를 이룬다.
극락전 삼존불과 보물 제486호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 불교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을 묘사했다. 신비로운 동식물들을 섬세하게 새겨놓았다.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내가 봤던 화려한 사찰들과 달리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하는 공간이라서 그런지 벽은 하얗고 기둥은 붉게 칠하지 않고 자연색 그대로 남겨 두었다. 그래서인지 보화루에 앉아 마음을 다듬고 암자를 바라보면 은은한 느낌이 든다.


백흥암은 조선 인종의 태실을 수호했던 사찰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백흥암과 은해사는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도 왕실의 후원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태실은 신일지까지 내려와서 북서로 800m로 올라가면 있는데, 조선 왕의 태실 중에 가장 큰 규모라고 할 수 있다. 태실에서 가장 가까운 백흥암에서 인종 태자를 위해 강녕을 기원했지만, 안타깝게도 즉위 8개월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현재 인종태실은 일제에 의해 1929년 서삼릉으로 강제로 옮겨지다 2007년에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영천 치일리 인종대왕태실. 백흥암은 인종대왕의 태실을 수호했던 임무도 있었다. 조선시대 태실 중에 가장 큰 규모.


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와 700년 세월을 버틴 거조암 영산전


백흥암과 인종의 태실을 보고 은해사 본사를 보러 내려왔다. 수많은 신도들이 본전인 극락보전 앞에서 부처님 오신날 봉축법요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갔을 때는 부처님을 모신 상단에 향, 등, 꽃, 과일, 차, 쌀 등의 여섯 가지 공양물을 올리는 의식인 육법공양을 성대히 진행하고 있었다. 불교 신자가 아닌 나는 주로 옛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사찰을 둘러봤지만, 살아있는 법요식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10교구 본사라서 그런지 육법공양을 봉행할 때 즈음에는 지역 정관계 인사들이 앞자리로 입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만 은해사 본사 건물을 자세히 보면 백흥암 극락전과 달리 새로 중건한 건물이 많이 보이는데, 창건(통일신라 헌강왕 1년) 이래 1847년 큰 불이 나서 옛 은해사 건물들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옛 건물의 모습이 전해지지 못해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수호사찰의 역할은 다행히 오늘날까지 이어진 느낌이다. 특히 조선 후기 불교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성보박물관이 은해사의 전통을 잘 말해준다.


박물관에서 인상 깊었던 작품은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중생들을 반야용선을 태우고 극락으로 인도하는 보물 제1857호 염불왕생첩경도다. 당시 인도로 갈 수 없던 화가가 중간에 우리나라 옛 건축물로 그린 게 내 눈에 확 들어왔다. 게다가 얼마 안남은 조선 후기 극락왕생도 중 하나여서 가치가 높다고 한다. 이 외에도 보물 제1604호 청동북과 복걸이 그리고 추사 김정희가 쓴 은해사 현판도 있으니 전시물을 꼼꼼히 보고 가자.


은해사의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 법요식 시작 전 극락보전에서 육법공양을 봉행하고 있다.
보물 제1857호 영천 은해사 염불왕생첩경도. 가운데 건물을 우리 전통식으로 그린 게 눈에 띈다. 조선시대의 불교 예술을 잘 나타내는 문화유산.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오늘날까지 명성이 자자한 은해사를 뒤로 하고 부속암자인 거조암으로 향했다. 거조사는 청통면으로 다시 나온 후 계지리에서 북서쪽으로 청통천을 따라 가는 길로 가면 나온다. 이곳을 온 이유는 바로 영천을 대표하는 국보 제14호 영산전을 보기 위해서다.


영산전은 은해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무려 고려시대 후기(1375)부터 이어져 오는 사찰건물인데, 기둥머리 위에만 짜 놓은 공포들로 이루어진 주심포 양식이다. 백흥암 극락전의 화려한 다포양식과도 대조되지만, 오히려 적은 공포들로 무거운 기와들로 이뤄진 사람 인(人)자의 맞배지붕을 700년 넘게 버틴 게 대견스럽다. 소박하고 간결하지만 건물의 뼈대를 정교하게 만든 옛 장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영산전 안에는 삼존불상과 석조 나한상 526분이 모셔져 있다. 나한상을 자세히 보니 표정이 각기 다르다. 그리고 나한상마다 이름이 전부 부여되어 있다. 제작연대는 알 수 없지만, 하나하나 개성 있는 나한상을 새기기 위해 장인들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정성을 쏟았을까? 그리고 수많은 나한상들 때문에 영산전이 아직 생동감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나한상들은 영산전을 수호하기 위해 정진하고 있겠지.


국보 제14호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고려시대부터 700년 넘게 이어진 건물이다. 백흥암 극락전과 달리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양식이라 수수한 느낌이 든다.
영산전 석조 나한상. 526분이 모여있고, 각기 표정이 다르다.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영천을 대표하는 사찰인 은해사.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오는 거조암 영산전과 백흥암 극락전을 제외한 대다수 건물들이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중건되었지만, 조선시대 인종태실 수호사찰의 역사는 실전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성보박물관에 남아 있는 조선 후기 불화들은 당대 예술 양식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은해사는 인종태실을 너머 거사들과 보살들을 수호해주고 강녕을 기원해야 하는 조계종 10교구 본사로 진화했다. 이들을 위해 은해사가 올바른 역할을 하여 거조암 영산전이 버텨온 세월 이상으로 오랜 전통을 이어가길 바라며 여정을 마무리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동시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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