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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북 Jan 17. 2024

비가 그치고 남은 것

우울과 공황이 잦아든 그 사이

선택을 해야 했다. 나의 하루 계획과 남편과의 데이트 중 한 가지를 고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드물게 나는 데이트를 골랐다. 

   


최근 약을 바꾸고 우울감과 공황이 꽤나 안정적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눈이 조심스럽게 뜨인 기분이 들었다. 주변의 불편한 공기가 스며들듯 피부로 느껴졌다. 그리고 현실이 다가왔다. 오랜만에 바라본 집은 아주 엉망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남편이 있었다.


남편은 무언가를 함께 하는 걸 참 좋아했다. 그저 같이 거실에서 TV만 보더라도, 함께 드라이브만 해도 행복해했다. 하지만 결혼한 지 3년 만에 나에게 우울과 공황이 나타났다. 게다가 자칭 시간 강박이라는 상황에 갇혔다. 우울하고 힘든 와중에 시간이 낭비되는 것을 참지 못했다. 혼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졸려서 잠에 취할 때까지 일을 하고, 자의적으로 일찍 출근해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타칭 일중독으로 불렸다. 번아웃으로 인한 충동도 경험했다. 그런 나를 남편은 묵묵히, 참을성 있게 바라봐줬다. 울고 괴로워하는 나를 어루만지고 달래주었다. 그의 강함을, 나는 동경했다.


하지만 3년이 더 지나 제대로 바라본 남편은 어쩐지 지쳐 보였다. 웃고 있는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서있는 것만 같았다. 서로의 감정이 예전보다 잘 전해지지 않았다. 형식적인 대화만이 오고 갔다. 남편이 마음속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된 건 언제부터였지. 아무리 더듬어도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나만 바라보던 사이, 남편은 많은 것들을 하나씩 포기하고 있던 게 아닐까, 자신의 아픔은 공유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 더 늦기 전에 하나씩 이전으로 돌아가는 연습을 해보려고 한다. 주변을 둘러보고 천천히 한 걸음씩 조심스레 걸어본다. 가장 먼저 체력이 되는 만큼씩만 집을 이전으로 되돌리기로 했다. 정리하지 못하고 널어놓은 물건들을 하나씩 자리에 가져다 놓고 먼지가 쌓인 곳을 닦기 시작한다. 쌓여있는 빨랫감도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단, 번아웃이 또 오지 않도록 일을 나누어 천천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므로 꼭 지킨다.


남편과 시간을 충분히 보내는 일도 나의 목표에 포함되었다. 우선 남편에게 작고 소소한 행복들을 많이 쌓아주고 싶기 때문이다. 시간 강박으로 잔뜩 가지고 있던 나만의 시간은 줄이기로 했다. 나 홀로 서재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대신 함께 데이트를 하기로 결정해 본다. 함께하며 마주 잡은 우리의 두 손이 더 힘차게 흔들리길 기대하며.



데이트 신청은 남편에게 아주 좋은 반응을 받았다. 우리는 즉흥적으로 데이트를 위해 집을 나섰다. 데이트 결과도 성공적이었다. 남편은 내가 좋아할 만한 장소를 골라내는 엄청난 매력을 보였고, 좋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행운도 따랐으며, 나란히 앉아 멋진 풍경을 바라보며 못 다했던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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