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우리

과거에 대한 미련보다는 현실의 소중함을

by 서연우

"이따가 영화 보러 나갔다가 올게."

"언제?"

"1시간 후쯤."

"나도 보러 갈까?"

"......"


사실 나 혼자 보러 갈 생각으로 다녀오겠다는 통보를 한 건데 갑자기 같이 가겠다는 남편의 말에 내심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 영화는 남편이 아닌 혼자 생각을 하며 보고 싶었으므로.

만약 같이 가서 영화를 봤다고 하면 '영화 별로 재미없네.' 또는 '이 영화가 말이야...' 하며 감상 아닌 평가를 할 거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나고 마음속으로 찬찬히 생각하고 느끼고 싶은데 자꾸 남편의 영화평을 들어야 할 거 같았으나 차마 '그냥 나 혼자 보러 갈게'라는 말은 입속으로 꾹 삼켰다.


영화를 보러 가기 전 '지금 나갈 거야'라는 말을 하려고 방문을 연 순간, 남편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속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나 영화 보러 갔다 올게."

"응"

자는 순간에도 내 목소리는 들었나 보다.

'아차, 이 영화는 눈물 없이 못 본다는 후기가 많았지? '눈물을 흘릴 정도로 많이 슬플까?'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요즘 들어 갑작스럽게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아졌으므로 눈물, 콧물을 닦지 못해 옷으로 대강 훔쳐야 하는 사태는 미연에 막아야겠다는 마음에 화장지 몇 장을 뜯어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영화 시작 1분 전.

예매하지 않아도 충분히 자리가 많았으므로 조급할 것 없이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상영관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일부러 다른 사람들하고 떨어진 자리, 그리고 시야가 가려질까 싶어 내 좌석 앞에는 아무도 앉지 않는 자리를 고른 터라 차분한 마음으로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2008년 비가 내리는 여름.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그 둘은 처음 만났다. 빨간 우산을 쓰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녀, 정원.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는 은호.

예상치 못한 산사태로 버스는 도로에 멈춰 서고 은호를 마중 나온 아버지의 차에 그녀도 함께 동승하며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평소 구교환을 좋아했거나 문가영을 잘 알지 못했지만 영화 '탈주'에서 인상에 남았던 구교환이 멜로 영화인 이 영화에서 어떻게 연기를 할까 궁금했다. (사실 구교환의 목소리는 영화 보는 내내 좀 거슬리긴 했다. 그건 개인 취향이므로 논외로 하고.)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 그렇게 자신의 심장까지 줄 것 같이 뜨겁게 사랑하고 어떤 상황에도 함께 이겨낼 것처럼 사랑했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와 힘듦에 헤어지고 10년의 시간이 훌쩍 흐른 2024년 베트남에서 우연찮은 태풍 '캐슬린'때문에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된다. 과거의 연인과 함께 호텔방에서 하룻밤이라니...


'태풍 이름이 캐슬린이란 이유는 곱게 잘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붙였다고 하는데 태풍은 이름과 달리 다 쓸어버리죠'라는 베트남 택시 기사의 말이 그들의 사랑이 태풍처럼 몰아쳤음을 그리고 아름다운 사랑을 했지만 깊은 상처와 아픔을 남겼음을 암시했다.


'영화를 보고 그 누군가 떠올랐어요.', '눈물 나는 영화', ' 오열했어요.'라는 후기를 보고 미리 준비를 해서 그런가 영화를 보는 내내 슬프기보단 마음이 좀 답답하고 그 시절 서로에게 조금 더 힘이 되어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사실 눈물이 났던 장면이 하나 있는데 그건 은호 아버지 편지를 정원이 읽는 장면이었다. 은호 아버지의 정원이에 대한 마음이 느껴져서 마음이 아팠다.


솔직히 말하면 많이 울고 싶어서 본 영화였고 많이 마음이 아프고 싶어서 보러 간 영화였는데 나의 사랑을 다시금 돌이켜보고 현실을 마주하게 된 영화였다.


참으로 아름답던 20대 중반, 한 남자를 알게 되고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소설 몇 권을 써 내려갈 만큼 뜨겁게 사랑하고 싸우고 아파하고 헤어지고 눈물로 지내기를 반복했던 나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우리는 사랑한 만큼이나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헤어졌다. 결국 헤어짐에 못 헤어 나와 나는 몇 개월을 헤매기도 했었다. 만약 우리가 영화에서처럼 그때 우리가 서로를 못 잡았다면 아마도 이 영화를 보면서 오열했을 수도 있겠다. 그때 다시 사랑을 잡지 못했던 나 자신을 원망하면서.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울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사랑의 대상과 현재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무척 행복하냐고?


아니... 행복하지만은 않다. 이제는 '그때 우리가 다시 만나지 않았어야 했다고.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는 말들이 오가며 결혼 후에도 많이 싸웠다는 건 비밀이 아닌 사실이다. 결혼하면 마냥 기쁠 줄만 알았던 나와 그의 기대가 한순간에 무너져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아픈 시간을 오랫동안 가졌었고 이혼의 위기가 왔었음도. 하지만 이제 시간이 지나서 그 위기들을 모면했으나 여전히 어찌 될지 모르는 외줄 타기 하는 기분이다.

결혼은 현실이고 결혼에는 사랑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처절히 깨달았던 시간들이었다.


'만약에 그때, 내가 너를 잡았더라면 어땠을까? '

'만약에 그때,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행복했을까?'라는 은호의 질문에

나는

'아니요'라고 대답한다.

'아마 결혼했다면?'

정원이가 대답했던 '이혼했겠지.'.라는 말에 동의한다.


서로를 잡지 못해 아쉬움이 많이 남겠지만 10년 전 그들의 한 선택은 시간이 지나도 그들의 이별이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서로의 현실을 이겨내고 난 후 마음이, 상황이, 처지가 나아진 후 여유로워져서 다시 만났다면 그들은 결혼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만으로 모든 상황을 이겨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이므로.


10년이 흐른 뒤 각자의 자기 자리에서 꿈을 이루고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그들이 만났기에 서로를 힘껏 안아주고 응원하며 인사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현실은 늘 영화 같지 않으니까.

아직도 꿈을 찾고 있는 중이며 여전히 현실에서 녹록지 않은 형편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라면 마주쳤을 때 모른 체 도망쳤겠지.


"영화 잘 봤어?"

"응"

영화를 보고 온 나에게 남편이 인사를 건네준다.

다행히 무슨 영화를 봤냐고 물어보지 않은 남편이 고마웠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2002년. 한일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뜨거웠던 그 여름, 우리의 사랑도 그만큼 뜨거웠다.

'만약 이 사람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하며 원망했던 시간들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고 이겨내고 있는 이 사람과의 시간들을 감사해야겠다.

은호와 정원처럼 서로를 선택하지 못한 미련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서.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그와 함께 지내고 있는 현실이 더 소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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