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거절

내가 안전하기 위한 거절

by 서연우

오전 11시 36분.

늦은 아침을 먹기 위해 신라면 한 봉지를 꺼내고 인덕션 위에 냄비를 올렸다. 아닌가? 아침을 모닝빵과 커피로 8시쯤 간단히 먹었으니 이른 점심인가 보다. 어쨌든.

물에 수프를 먼저 넣고 있으니 핸드폰이 울렸다.

010- 0000-0000

어디서 온 전화이지?

모르는 전화번호가 뜨면 대략 전화를 받지 않는 편인데. 지금은 방학 중이어서 연락처에 저장하지 않은 직장 동료의 전화번호인가 싶어서 살짝 고민한 끝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안녕하세요. 여기는 예비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공부를 돕기 위해 개인별 학습 PT............


-아... 네.


순간 젊은 남자의 이어지는 설명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나 고민을 했다. 네. 중고등학생은 있지만 지금은 학원을 다니면서 공부해서 저는 괜찮습니다. 내지는 일단 설명을 들어보고 무료 상담이라도 한번 해봐야 할까? 아니면?


나는 이 사람의 소개를 듣다가 이렇게 말했다.


- 네. 죄송하지만 저는 이미 애들이 다 컸어요.

- 아. 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뚝.


젊은 남자가 내게 전화를 하는 중에도 그 사람 주변에 다른 전화상담사들이 열심히 전화통화를 하는지 살짝 시끄러웠다. 하루 종일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화통화를 하면서 자기 말을 들어주는 학부모를 찾아 몇 번씩이나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하는 게 얼마나 힘들까? 게 중에 상담이 성공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얼마나 많을지 또는 하루에 수많은 거절은 어떻게 당해낼지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물론 필요가 없는 경우에는 상담전화에 응할 필요는 없지만 가끔씩 모르는 번호로 보험 관련 전화라든지 카드 회사 관련 전화를 받을 때마다 생각하는 건 이 전화를 어떻게 내가 잘 마무리하는 거였다.

예전에는 열심히 들어주다가 실제로 전화로 보험을 들었던 경우가 있어서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전화로 보험을 이렇게나 많이 들었어?'라는 꾸중을 들었기도 하고 거절을 잘 못해서 10분 가까이 상담원과 통화를 한 후에 죄송하지만 '저는 안 해도 될 거 같아요'를 한 적도 있다. 차라리 거절을 할 거면 애초에 거절을 할 것이지 열심히 듣고 질문까지 했으면서 나중에는 결국 거절을 하다니 상담사로서는 굉장히 기분이 나쁠 것 같기도 하고 힘이 빠지기도 할 거 같았다.




초임 시절, 늦은 오후 우리 반으로 모르는 여자분이 들어왔다. 내가 20대 중반이었지만 그때도 내 얼굴에는 여드름이 있었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조심히 우리 교실에 들어와 내 앞에 낯선 여자가 섰다.


- 안녕하세요.

그 여자는 나의 얼굴 천천히 보며 말했다.

- 선생님은 속이 많이 안 좋은 거 같아요. 속만 제대로 치료하면 얼굴은 바로 좋아져요. 저는 00시에서 온 사람인데 000과 000을 함께 먹으면 이렇게 좋아진답니다. 제 고객들은 주로 여성분들이 많으며... 선생님들도 많고....... (블라블라)

- 저를 잘 못 믿겠으면 여기로 직접 와 보셔도 됩니다.

하며 명함을 내밀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내가 뭘 잘 알았겠나. 그리고 그 당시 나의 콤플렉스는 여전히 얼굴에 난 여드름이었다.

그때 나는

- 괜찮습니다. 저 회의에 가야 해서요.

하고 일어서야 했다. 그러나 그런 임기응변에 능하지 않던 나는 그 말에 정신에 홀린 듯 훅 넘어갔다.

-약은 정기적으로 제가 가지고 올게요. 그리고 올 때마다 전신마사지는 해드릴게요.


그리고 나는 정산서에 사인을 하고 있었고 그렇게 100만 원 넘는 금액이 훅 긁어졌다.

이후로 여자는 한 달에 한번 꼴로 우리 반을 찾았고 올 때마다 많은 알약을 쇼핑백에 가득 안겨 줬고 또 다른 추가 약도 판매하며 떠났다. 올때마다 약속이라도 지키는 듯 전신마사지를 해줬고 화장품 등 여러 선물들을 주고 갔다.

'나 사기꾼 아니에요.'라고 증명하듯이.

차마 우리 집에 그 약들을 놓을 수가 없어서 교실 서랍장에 깊이 넣었는데 결국엔 그 약들은 제대로 먹지도 않고 교실을 옮길 때 쓰레기통으로 들어갔으며 매달 내 카드 결제액은 한도에 차 있었다.

내 통장에서 카드 결제액이 매달 쑥쑥 나갈 때마다 내가 왜그랬을까 후회했다. 내 결제금액이 맘에 들었던지 혹은 더 이상 나한테서 가져갈 금액은 충족했다고 생각했는지 그 뒤로 그 여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남편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는 슬픈 과거다. 미련하게도 그게 사기라는 것도 전혀 몰랐다. 정말 내가 생각해도 바보였다.




그 후로는 이젠 쉽게 넘어가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지금은 잘 버티고 있다. 물론 모르는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가 다 사기전화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온다. 사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대부분 카드나 보험 전화가 많다. 하지만 내게 진짜 필요 없는 것은 과감히 거절하고 제대로 알아보고 결정하자고 다짐했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어떻게?

초반에 잘 안전하게 거절하자(내가 안전해지기 위한 거절)이다.

'지금 회의 중이어서 지금은 어렵습니다. 또는 지금 운전 중입니다. 아니면 저는 아이가 아직 어려요 내지는 아이가 다 컸어요. '

이렇게 쉽게 거절할 수 있었던 것을 왜 나는 거절을 잘 못할까? 가만 생각해 보면 나는 거절을 하면 상대방이 기분이 나빠질까, 상처받을까 내심 눈치를 많이 봤던 거 같다.


남편은 예전부터 내게 '당신은 사기당하기 딱 쉽겠어. 남의 말을 너무 잘 믿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다.


'어 맞아. 사기당했었어. 그런데 이제는 안 그래.'

속으로만 대답한다.




결혼 후 몇 년이 지난 어느 여름날,


- 자기야, 여기 믿을 수 있는 거 같아. 그 사람 말대로 했는데 주식이 올랐어.

- 그거 사기 아냐? 요즘 말 많던데. 그런 사기.

- 아니거든. 내가 꼼꼼히 분석해 보고 살펴봤어.

- 아닌 거 같은데.

- 아니, 넌 왜 못 믿냐. 내가 몇 번이나 의심하고 그 사람하고 대화해보고 했어. 해봐도 될 것 같아.

- 난 아닌 거 같은데...


며칠 뒤,

- 나 그 사람 사기로 신고했어!


남편은 사.기.를. 당.했.다.


'......'


'뭐야.. 당신 귀도 얇고만.'






(*대문 사진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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