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탐방기 1

by 서연우

오랜만에 서울에 도착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편과는 작년에 다른 일로 여러번 왔었지만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은 2년 만이다. 막내는 서울대학교에서 실시하는 이틀간의 체험을 하기 위해 왔고 그동안 나는 가고 싶은 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특별히 서울에 올 일이 없지만 아이 덕분에 온전히 혼자서 짧은 여행을 할 수 있는 이벤트가 생겨 기분이 좋았다.


막내를 서울대학교 체험장소에 데려다준 후 어디를 갈까 고민하던 중 오랜만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보기로 했다. 요즘 케데헌 때문에 박물관에 방문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아졌다고 했는데 겨울방학 중이라 사람들이 너무 많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이 앞섰으나 그래도 혼자 가는 길이니 기다리는 줄이 왜 이렇게 기냐며 짜증 낼 법한 아이가 옆에 없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2호선 지하철에서 내려 4호선으로 갈아타고 이촌역 2번 출구로 나가니 오후 1시가 넘은 시각에도 박물관에 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박물관 앞 매표소 앞에는 <우리들의 이순신>과 <인상주의에서 초기 모더니즘까지> 특별전을 보기 위해 예매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고 상설전시장 입구는 대기 없이 바로 입장할 수 있었다.


검색대를 지나 선사, 고대관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요즘 한자능력검정시험공부를 하고 있는터라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유물들이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예전에는 '음, 저게 주먹도끼, 슴베 찌르게, 빗살무늬토기, 민무늬토기구나'하면서 대충 지나갔다면 이제는 빗살무늬토기 무늬 하나라도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없었다. 반달돌칼 앞에 서서 '지난번 최태성 선생님이 말씀하시던 반달돌칼이군.' 하며 서 있는데 때마침 문화해설 선생님이 초등학생들을 데리고 우르르 반달돌칼 앞에서 서더니 열심히 학생들에게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방학인데도 이렇게 열심히 역사공부를 하기 위해 모여 있는 학생들이 귀여웠다. 순간 우리 반 학생들이 떠올랐다. '만약 우리 반 학생들도 이곳에 와서 교과서에서 배운 것들을 실제로 본다면 얼마나 실감 날까. 교과서나 TV화면으로만 보던 여러 시대 유물들을 직접 보면서 공부하면 참으로 재미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가? 역사를 좋아하는 친구들이라면 모를까 재미없고 따분한 설명을 들으며 다리 아프게 계속 돌아다녀야 하는 것을 싫어한다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2026년 겨울방학 <교과서 속 문화유산 탐험>이라는 무료 해설도 있고 사설에서 실시하는 도슨트 프로그램도 있던데 아무튼 국립 중앙박물관 근처에 살면서 보고 싶을 때 와서 보고 배울 수 있는 이곳 인프라가 참 부럽다.


너무 자세히 들여다보고 찬찬히 둘러봤던 탓일까?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조선까지 가보지도 못했다. 큰일이다. 2층 사유의 방도 가봐야 하는데 말이다. 서울대까지 4시 전까지 도착해야는데 그러려면 3시 넘어서는 무조건 박물관에서 나가야 했다. 그러나 아직도 보고 싶은 유물들이 많이 남았다. 이러다간 지난번처럼 고대만 보고 나가야 할 것이다. 발걸음을 서둘러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삼국시대까지 많은 힘을 써버렸다. 조선부터는 어깨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허리까지 아파왔다. 하지만 이렇게 온 이상 제대로 보고 싶었다.


내가 봤던 유물들 중에 인상에 남았던 유물들이 몇 개 있었는데 그것들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명도전이다. 철기 시대에 중국과 교류하였음을 보여 주는 유물들 중 하나인데 중국의 전국 시대 연에서 사용된 명도전은 표면에 '명(明)'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청동으로 만든 칼 모양의 화폐다. 이게 뭐 눈에 띄는 유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번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준비를 하면서 다시금 자세히 알게 된 유물이랄까?

<명도전-오른쪽 위 2개>


두 번째는 호우 글자가 들어있는 청동그릇이다. 이것은 호우청 청동그릇, 호우명 그릇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경주 호우총에서 발견된 그릇이다. 그릇 밑바닥에 '을묘년국강상 광개토지호태왕 호우십'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당시 신라와 고구려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주는 그릇이다. 여기에서 ‘국강상’은 왕의 무덤이 있는 지역을 나타내고, ‘광개토지호태왕’은 광개토대왕이 죽은 뒤 영토를 널리 개척한 업적을 칭송해 붙인 시호諡號라고 한다. ‘을묘년’은 415년(장수왕 3)으로, 3년 전에 돌아가신 광개토대왕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해석한다는데 기록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신라 내물왕의 구원 요청을 받고 5만 대군을 보내어 주변국의 위협으로부터 신라를 구했으며 광개토대왕을 기념하기 위한 물건으로 신라에 보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혹은 을묘년(415)에 거행된 광개토대왕의 추모 행사에 참석했던 신라 사신이 이 그릇을 받아 와 대대로 간직하다가 무덤에 넣은 것은 아닐까 추측한다고도 했다.

<호우 글자가 있는 청동그릇>


세 번째는 연가 7년에 만든 부처이다. 우리가 대개 알고 있는 명칭은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이다. 이것은 국보 제119호이며,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불상 중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불상 중 하나인데 1963년 경상남도 의령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연가(延嘉)"는 삼국시대의 연호로 533년에서 539년에 이르는 고구려 안원왕의 연호인데, 이 불상은 그즈음 고구려에서 만들어졌으며 승려들이 천불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만든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또한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려가 신라 먼 곳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에게는 2가지 일화가 있다.

첫 번째는 발견 당시 일화이다. 1963년 7월 16일 경남 의령 대의면 하촌리 마을밖 도로공사에 품팔이를 나온 마을주민 강갑순 씨(40)와 큰아들 전병철 군(17)이 야산 비탈의 돌무더기를 파헤치고 있었는데 갑자기 걸리적거리던 잡석 하나를 곡괭이 끝으로 제치자 네모반듯한 작은 공간이 있었고, 그 안에 누워있던 금빛 찬란한 불상을 발견했다고 한다. 당시 문화재관리국은 불상을 발견 신고한 강갑순 씨 모자와 땅 임자(전 모 씨·55)에게 각각 20만 원씩의 보상금을 주었다고 한다. 사회 시간에 우리 반 아이들에게 보상금이 20만원이라고 했다. 그러자 "에이! 그것밖에 안 줘요? 문화유산을 찾았는데?" 어이없어했다.

"얘들아, 20만 원이 지금으로 생각하면 적은 돈인데 그 당시 20만원은 지금으로 하면 1400만원 정도 한대"

"그래도 보상금이 너무 적어요." 한다.

또 하나는 바로 1967년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 도난사건이다. 당시 이 불상은 덕수궁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오전 10시 40분경 불상은 사라졌고 24시간 안에 돌려주겠다는 쪽지가 남겨져 있었다고 했다. 다행히 입상은 12시간 만에 되찾았지만 범인은 현재까지도 잡히지 않았다. 혹시 이 사건이 궁금하시면 유튜브에서 찾아봐도 좋다. 사회시간에 우리 반 학생들에게 이 불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 도난사건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내가 알려준 이야기의 대상, 그 국보를 실제로 보고 있다니 감격스러웠다. 도난된 유물을 되찾지 못했다면 우리는 지금 이 귀중한 유물을 보지 못했을 텐데 말이다. 이 불상 앞에서 사진을 앞뒤로 촬영하고 한참을 보고 있노라니 눈이 초롱초롱한 초등학교 남학생 한 명이 와서 자세히 한참을 들여다보고는 사진까지 야무지게 찍고 갔다.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



네 번째는 광개토대왕비 탑본이다. 광개토왕비는 414년(장수왕 3)에 아들인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왕의 공적을 기리고 묘지기를 책정하기 위하여 세운 석비이다. 이 비는 광개토왕비, 호태왕비, 광개토왕릉비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탁본은 석회 탁본으로 원석(原石) 탁본이 아니며, 광개토왕비 탁본의 수요가 늘어가면서 닳아 없어진 비면 글자의 윤곽이 확실히 드러나도록 원비에 석회를 발라 대량 생산을 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석회를 바르고 난 뒤에 채택된 것을 석회 탁본, 바르기 이전의 원래 상태에서 채택된 것을 원석 탁본이라고 한다. 광개토왕비는 총 네 면으로 되어 있고, 높이는 약 6.39m이다. 사진으로는 별로 크게 보이지 않지만 실제 탁본 앞에 서 있으면 정말 크다. 탁본 1면에는 서문 격으로 광개토왕의 출자(出自)와 신성성이 서술되어 있고, 1면 중간 부분부터 끝까지 본문 격인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본문 부분에는 왕의 업적과 묘지기에 대한 규정 등이 적혀 있다고 한다. 탁본만으로도 이렇게 웅장한데 실제 광개토대왕비를 실제로 보면 어떨까? 아마도 그 크기와 위엄에 압도될 것 같다.

<광개토대왕비 탑본>


다섯 번째는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였다. 이 비석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와 있다고? 설마 복제품이겠지 생각했다가 옆에 설명을 읽어보니 진짜 이곳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고 이전에 세워졌던 자리에는 원형을 본뜬 모형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를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은 1816년 추사 김정희가 비봉에 올라 조사한 결과 이것이 진흥왕 순수비라는 것을 알아냈다는데 그 높은 곳에 추사 김정희가 올라갔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


여섯 번째는 공민왕과 공민왕비의 초상화다.(이건 원본이 아님. 원본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있음) 노국대장공주는 원나라의 왕녀 신분이었음에도 공민왕의 개혁정치나 반원정책을 적극 지지했다고 한다. 공민왕의 정치적 동반자나 다름없었으며, 후대까지 백성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의 내조 덕분에 노국대장공주를 향한 공민왕의 사랑은 그야말로 유일무이해서 다른 여자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둘이서 알콩달콩 잘 살았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 공민왕이 노국공주가 얼마나 좋았으면 노국공주의 무덤 옆에 자신의 무덤을 만들었을까. 죽어서도 노국공주와 함께 하고 싶었나 보다.

<공민왕과 공민왕비의 초상화>


일곱 번째는 화성성역의궤다. 조선시대에 수원 화성을 건설하면서 공사 일지, 동원된 장인의 명단, 사용된 물품의 종류와 수량 등 화성 건축과 관련된 자료를 수록한 책이다. 화성 성곽은 원래 10년 예정의 계획을 세웠으나 정조가 팔달산八達山에 올라 지시한 축성의 방략(御製城華籌略)에 따라 착공되어 32개월 만인 정조 20년(1796) 완성되었다. 이는 정조의 각별한 관심과 조정의 적극적인 역할, 막대한 자금 투입, 치밀한 설계, 근대적인 공법 등 당시 국가의 역량이 총동원되어 공사 기간이 크게 단축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다산 정약용의 거중기가 수원 화성을 쌓는데 잘 사용되었다는 사실.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설명한 것을 실제로 보니 그림과 글이 아주 자세하게 쓰여있다. 사회시간에 이 화성성역의궤를 직접 들고 설명하면 얼마나 좋을까. '이게 말이지. 이렇게 자세하게 쓰여 있어. 너희들도 한번 봐봐' 하면서 말이다.

<화성성역의궤>


여덟 번째는 박지원 열하일기다. 열하일기는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에 나온다. 실제 국어책에는 <장복이, 창대와 함께 하는 열하일기> 책의 한 부분이 소개되어 있다. 하지만 많은 내용이 담겨 있는 게 아니라서 아이들과 이 부분을 공부할 때는 역사적인 사실을 조금 설명해 주고 이해시켜 주는 작업이 필요했었다. '열하'는 청 건륭제의 별궁이 있던 지역이고 박지원은 건륭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연행사를 따라 그곳에 다녀오게 되었는데, '열하일기'는 박지원이 대제국으로 발전한 청의 실상을 보고 청나라와 조선의 문화 차이를 상세히 기록한 여행기다.

<열하일기>


이 외에도 내 핸드폰 사진첩에는 많은 사진들이 있는데 이 중에서 8개만 소개한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그동안 내가 알던 것들이 종지그릇만큼이었다면 이젠 공기그릇정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귀로만 듣고 화면으로만 보았던 것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할 때의 감흥이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두쫀쿠를 직접 맛보는 느낌이다.


지루하고 재미없을 것 같지만 나에겐 신기하고 재미있는 박물관 투어는 점심도 잊게 한 채 1시간 30분 동안 계속되었다. 사실 많이 피곤했지만 피곤함도 잊고 유물들을 보며 생각하고, 나의 두 눈으로 하나 하나 소중히 담았던 귀중한 시간이었다.

몇 년 전에 아이들이 초등학생 시절, 경주를 2박 3일로 해서 아침부터 늦은 시간까지 수학여행보다도 더 빠듯한 스케줄로 이곳저곳을 구경했었다. 많이 힘들었지만 그때의 기억들을 아이들과 가끔 이야기하면 아이들도 그때 그랬지 하며 좋아한다. 이른 아침에 올랐던 토함산, 그곳에서 마주친 다람쥐들, 뭐라 형용 수 없는 석굴암 본존불, 불국사, 먹는 것도 잊은 채 간식거리만 먹으면서 열심히 걸어 다니고 구경했던 그때로 돌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국립경주박물관에서는 무려 4시간 넘게 있으면서 화려하고 찬란한 신라의 보물들을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었다. 다시 경주를 가게 된다면 하루는 그냥 온종일 국립경주박물관 투어를 하고 싶다.


어쨌든 국립중앙박물관에서의 아쉬움은 뒤로 한채 시간이 촉박해 3시 30분쯤 나와야 했다. 입장마감이 오후 5시인데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입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조금 놀라웠다. 가보지도 못한 2층, 3층의 유물들은 다음으로 미루고 나는 서둘러 지하철을 타야 했다.




* 사진 출처: 본인이 찍은 사진.

* 유물 관련 내용: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최태성의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책, 나무위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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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2편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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