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차례
영화관을 가는 것은 하나의 놀이이자 재능있는 사람들의 꿈을 담아오는 행위였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영화관 입구엔 개봉된 영화의 포스터들이 존재감을 드러내며 비치되어 있었으므로 돈이 없어서 영화를 보지 못하는 가난한 대학생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 영화들을 마음 속에 담아둘 수 있었다.
포스터만 보더라도 그 영화의 줄거리나 배우들, 미장센 같은 것들을 예측할 수 있었고 글을 쓰고 싶은 나에게는 큰 자양분이 되었다. 얼마 전 이사를 하려고 책장을 열었는데 20년도 더 된, 그러니까 내가 중학생 때부터 병적으로 모으던 포스터들이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병적으로 모았냐하면, 영화 <몽상가들>에서 늘 맨 앞 자리에서 영화를 보는 이자벨과 테오처럼(스크린에서 나온 영화가 다른데로 흘러가지 않고 가장 먼저 본인들의 눈을 타고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그들처럼) 모든 영화들을 소유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대중들에게 엄청 난 사랑을 받던, 외면을 받던, 영화 그 존재 자체로 사랑을 느꼈다. 내 포스터 모음집에는 타이타닉 포스터나 하나와 앨리스 같은 명작 영화의 것들도 있다. 그 시절의 나는 차례차례 나의 사랑이었던 것을 모았다.
비가 왕창 내리는 어느 날, 운전면허 시험을 보겠다고 시험장을 가는 길이었다. 아무래도 자동차 시험장이기 때문에 이리저리 차사고가 날 것 같아 그랬는지 입구까지 가는 통로가 비좁았다. 사람 한 명 정도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아주 좁은 공간이었다. 우산을 쓰고 있었지만 대차게 내리는 거센 빗줄기에 옷은 젖었고, 이런 날씨에 면허 시험을 볼 수 있을까 걱정스런 마음이 울렸다.
저 멀리서 나보다 이십 센치는 더 큰 남자 아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머지 않아 우리는 서로의 막다른 길에 마주하게될 것이다. 우산을 잠깐 치우고 멈출까, 내가 몸집이 작으니까 옆으로 살짝 비킬까 여러 생각들이 공존했다. 그는 키가 컸음에도 우산으로 얼굴이 가려져 보이지 않았고 말 없이 뚜벅뚜벅 내쪽으로 걸어올 뿐이었다.
나와 마주치기 전 아주 짧은 순간 그는 망설임 없이 우산을 접었다. 그리고 비를 맞았다. 지나가세요.
우산을 쓴 두 명의 사람은 지나가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너무나 당연하게 상대방이 그 우산을 접기를 바랄 때가 있다. 그날의 나도 그랬다. 그런데 정작 그가 우산을 접고 나니 조금 당황스러워졌다. 누군가는 우산을 접고, 누군가는 그 배려를 받는다. 나는 종종 비가 많이 내릴 때면 그 아이를 생각한다.
서랍 안엔 케케묵은 20년 세월의 포스터도 있지만, 핑크빛으로 가득한 사랑 모음집이 있다. 모음집 안엔 사랑이란 단어가 아니라면 설명하지 못할 그 존재들이 담겨있다. 서랍을 열면 무언의 핑크빛 형체들이 마구 튀어나와 회색 도시의 절경을 핑크빛으로 물들이기도 한다. 모음집의 외형은 당연히 붉고 탐스러운 핑크빛 하트모양이다. 그 안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일들도 있고, 그런 존재들도 있다. 너무 소중해서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못한 기억들도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타인에게 배려를 받았던 예쁜 순간들이나 좌절하는 나에게 힘이 되어줬던 순간들. 그리고 그냥 존재자체로 나에게 사랑이 되어줬던 순간들. 나는 오늘도 그런 순간들을 차례차례 모은다. 아주 소중하게 접어 이름표를 붙인다.
오랫동안 그 서랍장을 열 일이 없었다. 모음집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올 여름, 아주 지루하고 따분해서 떠난 유럽 여행에서 다시금 그런 순간들을 마주했다. 그런 순간들은 바르셀로나 골목길 언저리에서 맛보았던 젤라또 맛과 비슷했다. 달콤하고 쌉쌀한 레몬맛, 바나나를 통채로 입 안에 욱여넣은 것 같은 바나나맛이다.
점원이 말한다. 가장 인기있는 맛은 품절이에요. 내일 다시 온 다면 당신이 먹을 양은 남겨 둘게요. 그가 해사하게 웃는다.
잠깐만!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달콤한 이 순간을 수집한다. 봉투를 꺼내 이름표를 붙이고 하트 스티커로 마무리한다.
그거 알아? 나는 이 순간을 아주 오랫동안 떠올릴 것 같아.
너 정말 젤라또 먹고 싶구나! 내일 꼭 와!
우리는 서로 다른 말을 하며 같은 웃음을 짓는다. 차례 차례 사랑을 수집하다보면 나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된다. 그렇게 아주많이 다르지는 않고 조금 다른 것들이 내 안에 쌓인다. 품절되기 직전에 인기 있는 젤라또를 먹으며 다음 사랑이었던 것을 수집하기 위해 발길을 재촉한다. 기다려보세요. 정말 사랑이라니까요. 사랑이 아니라면 불가능하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