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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 윤 May 05. 2020

이혼 일기 -Epilogue

그날의 일기

2017년 가을, 숙려기간을 거쳐 다시 법원에 갔다. 최종적으로 이혼에 합의하고 그 길로 바로 옆 구청에 가 이혼 신고까지 마쳤다. 구청을 나서는데  커피숖이 눈에 들어왔고, 마지막 인사를 어떻게 해야 하나 싶던 나는 문득 그에게 커피나 한 잔 하자는 말을 건넸다.


"나도 그러자고 하고 싶었는데 네가 싫어할 것 같았어."


 나도 왜 커피를 마시자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분명 다시 보기도 싫던 사람인데도 이대로 휙 가버리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것은 한때 내 인생의 큰 한줄기를 함께 했던  사람에 대해 예의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헤어짐에 대한 예의.


'어차피 이게 우리의 마지막이 될 테니까.'


주문한 커피가 나오고 우리는 일상적인 대화를 몇 마디 나눴다.

어떻게 지냈는지, 하고 있는 일은 잘 되어 가는지. 하지만 고작  몇 마디를 나누고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어색하게 침묵을 지켜야 했다. 뜨겁던 커피의 온기가 사라져 버렸을 때쯤, 물끄러미 날 바라보던 그가 말했다.


"미안해. 이렇게 돼서."


한참의 침묵 속에서 불현듯 나온 그의 말은 분명 진심이었다.

나는 이혼을 진행하면서 그에게 원망의 말을 하진 않았다.

행복하고 싶어서 한 결혼인데,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고 말했을 뿐, 그를 원망할 것도 없고 지난 시간을 자책할 것도 없었다. 이렇게 된 것이 어느 한쪽만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내가 그렇듯이 그도 나에게 섭섭하고 미웠던 점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을 아꼈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말을 들으니 갑자기 감정이 울컥하고 솟아올랐다.

그동안 잘 참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한 번만 그의 탓을 하고 싶어 졌다.


"나한테 왜 그랬어..."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그는 말이 없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을 것 같아 먼저 가볼게, 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걸어가는 내 등 뒤로 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뒤돌아 볼 수는 없었다. 이윽고 나는 차에 올랐고 집으로 향하는 내내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어 한참을 돌고 돌아서야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서류 정리까지 마치고 나니 정말로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새삼 뭔가를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에 망설였던 일을 하나 해볼까 싶어 졌다. 나는 머리를 잘 자르는 미용실을 수소문하고 마음에 드는 스타일의 사진을 구해 찾아갔다.


"커트 치려고요."

"찾으시는 선생님 있으세요?

"원장 선생님이요."

"오늘은 원장 선생님이 안 나오시는데...."

"아... 그럼..."   


당황스러웠다. 그냥 돌아가야 하나 곤란해졌다. 어쩌지. 이대로 가긴 싫은데. 일단 이 분과 이야기라도 나눠볼까.  나는 망설이다 사진을 찾아 내밀었다.     


"이런 커트를 치고 싶은데..."

"잘 어울리시겠네요. "


그녀가 사진과 나를 번갈아 유심히 바라보더니 활짝 웃었다.

난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금발머리에 웃는 얼굴이 화사한 디자이너 선생님은 내게 왜 커트를 치는지, 이 긴 머리가 아깝지 않은지, 남자 친구와 헤어졌는지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를 안내해줬고 이제 나에게 커트를 잘 친다는 원장이 자리에 없다는 사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진짜 잘 어울리세요. 다음에는 더 짧게 고준희 머리로 한 번 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


거울 속에 비친 내가 낯설었다. 이런 짧은 머리는 7살 이후로 처음이다. 그때 내 사진을 보고는 난 커트 치면 안 되는 사람이구나 하고 느꼈었는데. 제법 마음에 든다. 아니, 무척 마음에 든다.

값을 치르고 있는데 매니저분이 원래 자기 머리처럼 잘 어울린다며 칭찬을 해줬다.    

"긴 머리보다 더 예쁘세요.  "

인사치레인지 몰라도 환히 웃으며 말해주는 그의 말이 그럴싸해서 한층 더 기분이 좋아졌다.

헤어숍을 나와 다시 한번 들여다본다. 음. 잘생겼군. 이쁘네. 보이시가 아니라 보이가 될까 두려웠는데.  

소위 말하는 잘생쁨을 뽐내는 낯선 여자가 거울에 서 있었다. 표정이 조금 풀어진다. 한 번 웃어본다. 쿡쿡거리며 소리 내어 웃고 있다. 그 낯선 모습이 마음에 든다.     



긴 생머리를 평생 고수하던 사람이 숏컷을 하기까지는 그만큼 큰 결심이 필요하다.

난 학생 때부터 숏컷을 해보고 싶었고 그게 아마 10년은 된 것 같지만 용기 내지 못했었다.

남자들은 긴 생머리를 좋아한다는 친구들의 말과 그들이 말하지 않아도 내심 그것 때문에 두려워하던 나는, 그 걱정을 무시하고 머리를 자를 용기가 없었다.

그러다 남자 친구 안 생기면 어떡해.

이제 생각하면 참 우습게도, 고작 그런 걱정 때문에 못했던 일이었다.          

막상 자르고 보니 너무나 시원하고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나도 내 모습에 적응하는데 일주일은 걸렸다.

아침에 일어나 부스스하게 떠버린 까치머리도, 휑하니 불어오는 바람에 목덜미가 춥다-라고 느끼는 낯선 느낌도 처음엔 쉽사리 내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하나 재밌는 건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약속을 잡으면 나는 먼저 나가서  친구가 오기를 기다렸는데 친구들은 열이면 열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손을 들어 친구를 부르거나 이름을 외치면 깜짝 놀란 눈으로 슬그머니 다가오는 그들의 반응이 재밌어서 한동안은 약속에 꼭 일찍 나갔다.



어느 날, 나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준비를 서둘렀다. 새로 산 옷을 챙겨 입고, 짧은 머리를 매만지며 거울을 보았다. 잘할 수 있겠지. 오늘은 울지 말아야지.

약속 장소에 나가서 조금 기다리자니 친구가 도착했다. 어디 갈래 고민하던 친구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은 술 한 잔 어때?"

"술? 만나자마자?... 좋지."


곱창집에 도착한 우리는 청하를 주문했다. 목구멍으로 차갑게 넘어가는 달달한 술맛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내 고백에 그녀가 놀라는 얼굴을 볼 차례다. 싱긋 웃고는 숨을 한 번 들이쉰다. 뭔가 싶어서 바라보는 친구를 보며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나 이혼했어. "


친구가 말한다.


"그런 것 같았어. "


어떻게?라고 되물을 수가 없었다. 목이 메어왔기 때문이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말을 멈춘 내게 그녀가 말했다.


"머리 예쁘다. "


뜬금없는 말에 웃음이 나온다.


"한 잔 더?"


응. 고개를 끄덕였다. 한 잔이 아니라 한 병을 더 시켜야 할 것 같아. 그러자 친구가 웃었다. 그래라 그래. 열 병 시켜, 열 병.


몇몇 사람들은  나의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가 정말 나의 친구 거나 날 아끼는 사람이라면) 기다려준다. 언젠가 내가 상처를 극복하고 솔직하게 말해줄 때까지 배려하는 것이다.

섣불리 먼저 말하거나 물어오는 시도를 하지 않은 친구들이, 기다리고 위로해준 사람들이 새삼 고마웠다.




과거의 일을 말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입 밖으로 이 이야기를 덤덤히 내뱉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내가 극복한 것이라고. 그래서 언젠가 마음이 단단히 아물고 나면 내 이야기를 적어봐야지 라고 늘 생각했었다. 실제로 3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자 내게 일어난 일을 다른 누군가에게 말할 때 울지 않을 수 있게 되었고 비로소 글도 써지기 시작했다. 글을 쓸 때 가슴 한편이 아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전보다는 미약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약해져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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