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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서영 Oct 22. 2023

방 안의 코끼리

평일에 학교를 나갔던 혜순은 주말이 되면 병철과 남순과 지내는 나를 데리러 왔고 우리는 주말을 함께 보내곤 했다. 처음으로 병철과 남순이 내 손을 잡고 선욱의 산소를 보여주던 그 주의 주말에도 나는 혜순의 집에 있었다. 남순이 나에게 소리 내어 묘비에 새겨진 글을 읽어줄 때 병철이 나지막이 말했다. 엄마한테는 여기 왔다고 얘기하지 말거라. 왜? 하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물어보나 마나, ‘속상해할 거니까'가 병철의 대답이겠지. 그래도 알건 알아야지, 생각했다. 정보의 불균형으로 한 사람을 소외시키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일이니까. 나는 그 주의 주말 혜순에게 선욱의 산소에 갔었다고 불어(?) 버렸다. 정확히 어떤 단어와 표현으로 그 사실을 이야기했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신파를 싫어하는 나로서 제법 ‘캐주얼하고 쿨하게’ 전달했던 것 같다. 


당시 사람들은 (일가친척들을 비롯해) 내 앞에서 선욱의 죽음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어린 내가 들어서 혹은 알게 되어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짧은 생각에서 비롯된 잘못된 처사였다. 어차피 너도 나도 다 아는 사실 그냥 허심탄회하게 속 시원히 말하든지 아니면 내 얼굴을 힐끗 한 번 쳐다 보고서 ‘지 아부지 쏙 뺐다(꼭 닮았다)’ 따위의 말을 혼잣말인 양 하질 말든지…… 아이가 혼자 상실의 전말을 상상하고 짐작하게 하는 것만큼 정서에 해로운 것도 없다. 정신과 전문의의 견해도, 신빙성 있는 모집단의 통계자료에 입각한 내용도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어른들이 쉬쉬하는 분위기에 나는 적당히 맞춰주었다. ‘나는 왜 아빠가 없어?’ 혹은 ‘아빠는 어디에 있어?’라는 상투적인 대사로 신파를 연출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물을 필요도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안쓰러운 눈빛들만 다 끌어모아도 의사가 찍어낸 사망확인서 보다 더 명징한 증거였다. 내가 한 번도 말을 꺼낸 적 없으니 모른다고 생각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내 눈치를 아니 어린아이의 직감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어른들과 방 안의 코끼리(Elephant in the room)를 두고 밀당 아닌 밀당을 했지만 모두에게 보이는 코끼리를 나에게만 안보이는 척하는 것도 꽤나 피곤한 일이었다. 언제까지고 안 보이는 척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걸 가장 먼저 깨기로 한 것은 병철과 남순이었다. 나를 산소에 데려감으로써 더 이상 쉬쉬하지 않기로 했던 모양이었다. 언젠가 올 일이라고 생각해 왔기에 딱히 충격적이라거나 견디기 힘든 것은 아니었다. 내가 괴로웠던 것은 그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사실을 나에게 전하는 그들의 슬픔을 지켜보는 일이었다. 어딜 가는지 알려주지도 않은 채 천주교 공동묘지에 도착했다. 남순은 내게 절하는 법을 아냐고 묻지도 않고 나에게 무턱대로 절을 하라고 시켰다. 영문도 모른 채 텔레비전에서 본 걸 기억하며 바닥에 적당히 엎드렸다. 차가운 시멘트의 한기가 이마와 손바닥과 무릎에 스며드는 것을 언제까지 느끼고 있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 이제 그만 일어나라는 말을 하는 대신 남순은 울음을 터뜨리며 본인이 직접 썼다는 묘비문을 읽기 시작했고 꽤 긴 문장들이 끝까지 읽힐 동안 나는 바닥의 냉기를 온몸으로 느꼈다. 묘비에 적인 사망일을 확인하고 나도 제법 속이 상해서 울고 싶은 심정이 들었으나 나까지 울면 뒷짐을 진 채 먼산만 바라보던 병철이 몹시 난감할 것 같아 그러지 않았다. 셋 중에 우는 사람이 둘이나 되는 건 여러모로 곤란한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항상 남순에게 ‘더 슬픈' 사람 포지션을 양보했고 나는 한 번도 ‘슬픈 사람'이 되어보지 못했다.


그건 혜순과 있을 때도 비슷했다. 처음으로 선욱의 기일에 조촐한 제사상을 차려놓고 위령기도를 바칠 때 혜순은 울음을 터뜨렸고 위령기도는 중단됐다. 울음이 터진 혜순과 눈물을 훔치는 남순 사이에 앉아 이 순간이 제발 빨리 지나가길 그래서 중단된 위령기도가 다시 시작되어 얼른 끝내버릴 수 있길 기도했다. ‘울음을 삼키다'의 동사 ‘삼키다'는 비유 같은 게 아니라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토할 것 같은데 토할 수 없는 상황일 때 목구멍에 치솟는 토사물을 다시 삼켜야 하듯 울지 않기 위해서는 마른침을 목구멍으로 밀어 삼켜야 겨우 참을 수 있었다. 좌 혜순, 우 남순, 그리고 거실 1인용 소파에 혼자 앉아 있는 병철. 혜순의 울음과 남순의 눈물과 병철의 침묵을 느끼며, 눈물도 침묵도 못하는 나는 삼 인분의 슬픔을 모두 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묘비문을 읽던 남순의 울음이 잦아질 동안 병철은 내 손을 잡고 묘지 근처 구멍가게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골라보거라 했다. 평소 혜순이 좋아하던 ‘멜로나'를 집었고 병철은 아마도 ‘메가톤바'를 골랐던 것 같다. 찐득하게 녹아내리는 멜로나를 빨면서 선욱과의 첫 대면 아니, 선욱이 죽었다는 사실과의 첫 대면의 날, 묘지에서 나는 돌을 하나 주웠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난생처음 보는 모습의 돌이었다. 한 번도 안아보지 못한 딸을 위해 선욱이 주는 선물 같은 걸지도 모른다는 유치한 동화 같은 상상을 하며 남들이 볼까 얼른 주머니에 넣었다. 선물이 아니면 첫 만남 기념이라고 하지, 뭐 생각하며.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나는 병철이 사준 멜로나를 토했다. 가슴을 뜯으며 우는 남순을 지켜보며 그 순간이 끝나길 기다렸던 시간만큼, 토할 것 같은 메스꺼움을 1시간이나 참는 것은 몹시 괴로운 경험이었다.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인다는 건 아이스크림을 토하고 난 후 입 안에 남아있는 들큼하고 시큼한 토사물의 맛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불편하든 어색하든 어쨌거나 우리는 삶의 곳곳에서 진실을 마주해야 할 때가 있다. 다른 이들이 방 안의 코끼리를 부여잡고 울음을 터뜨렸을 때 나는 언제는 조용히 앉아서 그 순간이 지나가길 참는 쪽이었다. 피할 수 없는 그 순간을 나는 최대한 담담하고 너무 뜨겁지 않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코끼리의 존재보다 나를 더 괴롭혔던 것은 토할 수도 삼킬 수도 없이 그 순간이 끝나길 기다리는 일 밖에 할 수 없었던 혼자 남겨진 느낌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멜로나'를 먹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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