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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서영 Oct 22. 2023

상실을 견디는 방법

외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병철과 남순은 다른 방식으로 각자의 슬픔을 견뎠다. '보험 아줌마'로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실적을 올리며 승승장구했던 남순은 알뜰살뜰 모은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줄 생각에 발에 굳은살이 박혀 겨울에는 쩍쩍 갈라지고 여름에는 지독한 무좀에 시달리면서도 일이 힘든 줄 몰랐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각종 생명보험에 건강보험 등 병철과 자신의 보험도 넘칠만큼 들어두어 외동아들이 자신들의 노후를 걱정하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었다. 선욱의 생명보험금을 수령하던 날 남순은 병철과 본인의 이름으로 들었던 모든 종류의 보험을 일말의 미련도 없이 해지했다. 그리고 해지한 보험금으로 럭셔리 해외여행을 다니며 사치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건 일회용 행주도 빨아 쓰는 지독한 구두쇠인 남순이 삶과 운명을 상대로 반항하고 발악하는 방식이었다. 남순이 울분을 터뜨리는 방식으로 슬픔을 견뎠다면 병철은 절망을 안으로 누르며 함께 침잠하는 방식을 택했다. 남순이 한 달 걸러 한 번씩 쫓아다닌 럭셔리 해외여행 패키지 상품은 대부분 부부동반 여행이었음에도 병철은 함께 가자는 남순의 제안을 받아들인 적이 없다. '이번엔 같이 가입시더', 하던 남순의 부탁에 병철의 대답은 항상 '알라는 누가 보고(애는 누가 돌보고)?'였다. 사실 병철까지 세계 여행에 열심이었다면 '알라'였던 내 처지가 좀 난감해졌으리라란 것은 사실이지만 병철은 내 존재가 없었대도 따라 나섰을 것 같지 않다. 남순이 슬픔을 견디는 아니 잊는 방법으로 삶의 모든 욕구를 폭발하듯 분출하는 방식을 택했다면 병철은 삶의 모든 의욕을 포기하는 방식을 택했다.




말도 안 되게 비싼 옥장판이나 독일제 드럼 세탁기(드럼 세탁기가 보급화 되기 전) 해그리드의 코트와 닮은 네덜란드 산 양면 양털 코트 따위에 돈을 물처럼 써버리는 남순을 보면서 병철은 가끔 버럭 했지만 대부분 속상해서 돈이라도 써야겠다는 남순의 사치를 외면해주곤 했다. 남순이 한풀이로 소비를 하는 주로 본인의 옷이었는데 문제는 사기만 하고 버리는 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남순이 해지한 보험금이 얼마나 많았던 것인지 관광했던 나라를 다시 가기도 했다. 내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서유럽 패키지는 세 번, 북미는 다섯번, 그리고 이웃나라 일본은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였다. 남순이 지구를 몇 바퀴나 돌 동안 병철은 봉덕동을 떠나지 않았다. 어찌나 소파에 앉아있는 시간이 길었던지 매일 조금씩 소파와 함께 밑으로 꺼져갔고, 나는 그가 언젠가 소파가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슬픔은 같았으나 슬픔을 견디는 방법은 달랐던 둘은 끝내 서로의 슬픔에 연결되지는 못했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될지는 모르지만 슬픔을 나누면 정말 반이 되는 건지 아직 잘 모르겠다. 에너지총량보존의 법칙이 말해주듯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슬픔의 에너지는 어쨌거나 뭘 해도 변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해주는 위로는 공허할 뿐이고 내 슬픔을 이해하는 사람은 결국 나와 같은 슬픔을 공유하는 사람일 텐데 그런 경우는 겨우 옅어지고 있는 고통에 자꾸 덧칠을 하는 게 아닐까, 두 사람을 보며 그런 생각들을 했다.




그들이 남은 평생 괴로웠던 이유는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서가 아니었다. 대체할 수 없는 하나의 희망이 사라져서였다. 세상 최고의 효자였다던 외아들을 (게다가 잘 생기기까지 한) 어디에서 어떻게 대체할 수 있단 말인가. 둘의 슬픔을 보며 생각했다. 항상 대체제를 염두해야겠다고. 그래야 혹시 나의 경우에 내가 사그라들지 않을 수 있겠다고. 그때부터 나는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은 꼭 두 개를 사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면 잃어버리거나 도둑 맞거나 혹은 망가지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게 사람이라면 '똑같은 두개'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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