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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서영 Oct 22. 2023

부재가 만든 죄인

캐나다에 살다보니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캐나다'라는 말을 많이 하게 된다. 가끔 한국에 사는 친구나 지인과 통화를 하다가, '캐나다 어때?' 하는 질문들에서, 여기 사는 한국 사람들과 대화할 때 '캐나다는 그렇지'하는 감상들에서. 그렇게 자주 입에 올리는 단어지만 나는 아직도 '캐나다'라는 말이 좀 아프다. '캐나다'의 두 번째 음절 '-나-' 쯤에 이르면 목구멍이 싸해지는 느낌이 0.1초쯤 든다. 그건 '가나다'하고 말했던 병철의 얼굴이 매번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캐나다를 '가나다'와 '카나다' 그 사이 어디 즈음에 있는 발음으로 불렀다. 말수가 지독히도 없었던 병철이 가끔 입을 뗄 때면 성대에 걸려있던 무언가와 부딪히는 것 같은 공허하고 걸걸한 소리가 났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항상 1인용 소파 앉아있던 병철은 소파와 함께 땅으로 조금씩 꺼져가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기억하는 병철은 언제나 무기력했는데 그런 병철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의지 같은 것을 보인 적이 있었다. 무언가를 하겠다거나 가겠다거나 갖겠다는 그 어떤 의욕도 보이지 않던 그가 마치 여생의 모든 의지력을 전부 끌어모은 것처럼 느껴졌다.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이 다가오고 있을 무렵, 혜순은 나를 데리고 막내 삼촌(혜순의 동생)과 이모(혜순의 언니)가 살고 있는 캐나다 에드먼턴에 다녀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혜순에게서 여름방학 계획을 들은 병철은 며칠 뒤 혜순을 불러 제안을 했다. 비행기 삯을 포함한 모든 비용을 당신이 다 지불할 테니 이번 캐나다행에 병철과 남순도 동행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병철의 제안을 들은 우리 모두 깜짝 놀랐다. 패키지 해외여행에 같이 가자는 십여 년에 걸친 남순의 설득에 꿈쩍도 하지 않던 병철이 갑자기 캐나다를 가고 싶어 한 것이다. 혜순은 조금 복잡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동생과 언니에게 물어보겠다고 했고 다음날 전화 통화로 긍정적인 답변을 병철에게 알렸다. 오랜만에 친정 식구들과 편안하고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테지만 항상 침울해 보였던 시아버지의 부탁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준 당시의 혜순에게서 나는 어른의 모습을 보았다. 어른은 자고로 그런 거구나, 생각했다. 혜순에게도 캐나다행은 아주 아주 오랫동안 기다리고 바라왔던 일이었을 게 분명하니까. 그때 혜순의 나이를 얼추 지나고 있는 지금의 나라면 불편할 것이 분명한 시부모와의 동행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표정관리가 됐는지 안 됐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가슴이 터질 듯이 기뻤다는 것이다. 난생처음 가족여행을, 그것도 캐나다로 가게 되다니, 진부한 표현이라 쓰고 싶지 않지만 이 말 외엔 딱히 더 적확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때의 심정은 정말 '꿈만 같았다'. 남순과 혜순의 심정은 복잡 오묘했겠지만 혜순의 긍정적인 대답에 병철의 얼굴에는 내가 처음 본 기쁨과 설렘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기쁨과 설렘보다 내 것이 조금 더 컸을 것이다. 사실 캐나다든 아프리카든 남해 바다든 장소는 아무렴 상관없었다. 가족의 모든 구성원이 다 함께 여행을 간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전에도 가끔 어버이날이나 생일 같은 특별한 날이 되면 혜순의 차를 타고 함께 외식을 하러 가기는 했지만 네 명이 함께 여행이라고 부를 만한 이벤트는 없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가족여행 사진을 내라, 가족신문을 만들어 와라 따위와 같은 숙제를 6년 동안 조금의 변주도 없이 꾸준히 내주고 있었는데 그건 정상가정을 가진 아이들과 그 외의 아이들의 헤게모니를 가시화하고 심화시키는 숙제였을 뿐 선생들이 생각하는 만큼 많은 아이들에게 감동과 재미를 선사하는 숙제는 아니었다. 아니, 사실 나는 좀 진절머리가 나 있던 참이었다. 그런 숙제를 정기적으로 받아 들 때마다 나는 꽤 난감했지만 한 번도 '숙제를 해야 하니 가족여행을 가자'는 얘기를 꺼낸 적은 없었다.




가족여행이라 하면 본디 모든 가족구성원이 '함께'여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는데 나야 셋 다 적당히 친(?)하다지만 혜순은 무슨 죄란 말인가. 방패막과 윤활제 역할을 해줄 남편도 없이(한국의 남편들이 그 역할을 톡톡히 잘 해내고 있다는 사정보다 그렇지 못한 사정을 더 많이 듣긴 했지만) 시부모와 함께 여행이라니 그건 어린 내가 생각해도 영 어색하고 불편한 행사가 될 게 분명했다. 게다가 아들에 대한 상실감으로 가득 차 있는 남순과 병철에게는 아들을 빼고 가족여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슬픔을 한 층 깊게 만드는 일이었을 거다. 여하튼 나로서는 그런 거시기(?) 한 일을 벌이느니 차라리 숙제를 하지 않는 불량한 학생이 되는 쪽이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여행 목적지가 캐나다라면 좀 다른 분위기가 될 거라 생각했다. 남순을 제외한 우리 셋의 첫 해외 경험이 될 터였다. 캐나다라는 낯섦과 처음이라는 의미가 가져다 줄 설렘과 긴장감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 어색함과 불편함, 그리고 우울함을 눌러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나는 앞으로 또 받게 될 학교 숙제에 대비해 캐나다에 가면 가족사진을 잔뜩 찍을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순간을 정확히 기억하는 그 다음날 이른 아침 나는 아직 이불속에 있었고 거실에서 남순과 병철의 대화가 들려 잠이 깼다.




"캐나다, 고마 가지 마입시더"


"...... 와......?"


"자식도 없는 노친네들 염치도 없이 며느리 따라왔다고 욕합니더. (선)욱이나  있으면 모를까 아도 없이 우리가 무슨 염치로 거길 갑니꺼.


"......"


"내가 어미한테 전화해가 안 간다 캅니데이."


"......"




그리고 곧 남순은 혜순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부지가 캐나다 안 간다 하신다."


"@#$@#$@"


"건강도 안 좋고 한데 괜히 멀리 가서 고생할까봐 겁도 나고...... 니랑 아랑 둘이 댕겨 오너라."


"@#$@#$@#$......"


"어~어, 아이다. 우리는 안 간다. 사돈 식구들한테도 그래 전하거라, 고마."


전화기 건너편 혜순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알았다. 혜순의 성격 상 분명 이렇게 되물었을 것이다.


"왜요, 어머니. 아버님이랑 같이 가시지요. 동생이랑 언니도 같이 오시라고 그러는데......"


그리고 남순의 성격 상 혜순의 채근을 다 듣지도 않고 말 허리를 잘라 단호하게 말한 것이었을 거다..


"어~어, 아이다. 우리는 안 간다."




그때 이불속에서 뛰쳐나와 남순과 병철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은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 중에서 하나다. 그들의 대화를 막아야 했다. 아니라고 염치없는 것이 아니라고, 아니 염치가 좀 없다 해도 그냥 눈 딱 감고 이번만 가자고. 할무이는 세상천지 좋은데 다 다녀봤지만 할아버지는 아니지 않냐고. 그렇게 해서 내가 남순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면 혜순에게라도 내가 들은 이 대화의 전말을 알렸어야 했다. 할아버지가 건강이 걱정돼서 안 가는 게 아니라 할머니가 자식 없는 노친네들이 무슨 염치로 가냐고 할아버지를 가스라이팅한 거라고. 할아버지는 지금도 가고 싶은 게 분명하니까 엄마가 한 번 더 가자고 해달라고. 만약 혜순도 남순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면 캐나다에 사는 삼촌에게 전화를 걸 수도 있었다. 아들도 없는 주제에 염치도 없이 며느리 따라 캐나다까지 왔다고 욕 절대 안 할 거니까 사돈어른 오셔도 된다고 삼촌이 우리 할머니한테 직접 말해 달라고 부탁해 볼 수도 있었다. 당신 손녀가 국제전화까지 해서 부탁했으니까 꼭 함께 손잡고 오시라고 한 번만 설득해 주면 안 되겠냐고, 뭐라도 시도했어야 했다. 나는 그중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당시의 나는 어렸던 나를 과소평가했다. 고작 초등학생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모르는 척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남순과 병철의 슬픔과 상처에 개입할 용기가 없었다. 남순이 혜순에게 전화를 걸어 나의 첫 가족여행을 무산시키는 동안 나는 자는 척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있었다. 마치 불타는 돌멩이를 삼킨 것 같았다.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병철의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낸 용기였고 의지였다는 것을. 바닥으로 꺼져가는 1인용 소파에서 일어나 비행기를 타볼 마지막 기회였다는 것을. 자식 잃은 부모의 ‘염치' 때문에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가족여행이, 병철의 인생의 마지막 희망 같은 순간이 부서졌다.




남순의 이야기에 아무 대꾸가 없었던 병철의 침묵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가나다'하고 발음하는 그의 가보지 못한 '캐나다'가 떠오른다. 목구멍에서 불타는 돌멩이를 느낀다. 밴쿠버의 아름다운 자연을 볼 때마다 새 파란 하늘을 올려다볼 때마다 병철이 이 땅을 한 번이라도 밟아봤더라면 이 아름다운 걸 한 번이라도 봤더라면 그의 여생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종종 상상한다. 그해 여름, 병철의 마지막 용기와 희망을 지켜주지 못한 채 병철이 사준 비행기 티켓으로 나는 염치도 없이 캐나다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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