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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서영 Oct 22. 2023

쟈 키나 내 키나

남순에게는 평생을 따라다닌 콤플렉스가 3개 있었다. 첫 째는 짧은 가방끈, 둘 째는 넓적한 얼굴, 셋 째는 작은 키였다. 이 세 가지는 남순이 뭐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골고루 ‘입에 달고' 살았던 평생의 콤플렉스였지만 만약 요술램프의 요정 지니가 나타나 딱 한 가지 소원만 들어준다는 제안을 한다면 나는 남순이 어떤 소원을 빌 것인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돈벌이를 하지 못하는 남편 대신 남순은 보험회사를 다녔다. 그 때문에 평소에는 그와 외출할 일이 많이 없었으나 가끔 수금이 없는 날이면 남순은 어린 나를 데리고 함께 병원이나 시장을 다니곤 했다.


내 손을 잡고 걷던 남순이 내 손을 놓는 순간은 대게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낼 때나 누군가를 가리킬 때였다. 횡단보도 맞은편에 서 있는 사람이나 우리보다 앞서가는 사람 중 한 명을 가리키며 하는 질문을 한결같았다. 저 사람보다는 내가 크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 보면 멀리서 봐도 작은 체구라는 것을 알만한 누군가가 있었다. 남순은 그렇게 마주치고 스치는 세상 모든 사람을 자신의 높이와 비교했다. ‘수숫대 키재기’라는 말은 없어도 ‘도토리 키재기’라는 말이 있는 이유는 도토리를 두고 ‘네가 큰지 내가 큰지’ 따지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말일 텐데 남순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큰 의미처럼 보였다. 횡단보도 건너편 저 멀리 떨어진 사람의 키와 남순의 키를, 그들보다 더 작았던 내가 봐도 148센티미터가 채 되지 않는 남순의 키는 정말이지 독보적으로 작아서 곁눈질로 봐도 남순이 가리킨 사람이 주먹 하나 정도는 우습게 큰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굳이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희망과 기대로 가득 찬 남순의 목소리와 눈빛에 굳이 실망을 안겨 주고 싶지 않을 만큼의 인류애와, 내 대답 한 마디에 평소에 두려워했던 사람의 눈빛이 환하게 살아나는 것을 볼 때의 짜릿한 승리감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 대답은 항상 같았다. 에이~ 대충 봐도 할머니가 훨씬 크지.


이제는 남순에게 원망보다는 이해와 용서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혜순이 여전히 용서하거나 이해하지 못한 사건이 있는데 그건 혜순과 선욱의 결혼 초기 남순이 한 발언이었다. 

풍문으로 듣자면 선욱은 훌륭한 효자일 뿐 아니라 훌륭한 남편이기도 했다는데 남순이 소개해준 많은 여자 선생님들을 마다하고 혜순만 좋아했다고 했다. 혜순보다 인물도 키도 훨씬 나은 다른 후보들을 마다하고 혜순을 택한 아들의 선택에 대해 남순은 인물 좋고 키 큰 여자 선생님들을 왜 다 마다하고 혜순을 선택했는지 모르겠다며 못마땅했는데 남순의 불만을 듣다 못한 병철이 입을 뗐다.

“쟈(혜순) 키면 딱 마침맞다(적당하다).”

평소 작은 키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남순에게 못마땅한 며느리를 옹호하는 남편의 말은 남순을 울컥하게 했을 게 분명했고 그 순간 남순이 이렇게 외쳤다..

“쟈 키나 내 키나!”

그 말에 병철과 혜순 둘 다 할 말을 잃었다고 혜순은 회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159센티미터와 148센티미터의 키는 누가 봐도 큰 차이가 났고 키라는 것은 본디 작은 사람 입장에서는 얼마간의 차이도 다 비슷하게 느낄지 몰라도 1센티미터라도 큰 사람 입장에서는 나보다 작은 사람이 나와 ‘같은 키'로 여기는 것을 몹시 부당한 느낌이 드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키에 대한 자격지심과 아내를 엄마보다 좋아하게 된 효자 아들에 대한 서운함, 평소 무뚝뚝한 남편이 며느리 편을 들어주는 데에 대한 질투, 그런 것들이 한데 섞여 터져 나온 남순의 발언은 혜순과의 고부갈등의 신호탄과 같았다. 남순의 그 한 마디는 3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혜순의 마음에 풀리지 않는 앙금으로 남아 고부간의 불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혜순은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네 할머니가 엄마더라 뭐라고 했는 줄 아나?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무려 11센티미터의 차이와 함께 뭉개진 것은 키 차이 말고도 있었는데 그건 며느리에 대한 인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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