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서영 Oct 22. 2023

시근 머리와 시소

남순은 ‘시근 머리'라는 말을 자주 썼다. 특히 그의 며느리에게(물론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가장 많이 썼다. ‘시근 머리’라는 말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능력'이라는 뜻의 속된 경상도 사투리로, 사리분별과 옳은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혹자는 ‘철이 없다'를 ‘시근 머리 없다'는 말의 표준어라고 말하지만 경상도 토박이로서 나보다 더한 경상도 토박이인 어르신들이 그 단어를 쓸 때의 상황들을 오랫동안 지켜본 결과 ‘시근'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철'이라는 개념보다는 손아랫사람을 판단하는 손윗사람의 입장과 평가가 훨씬 더 관여된 느낌이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지만 내 팔의 관절 방향을 애써 무시하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본다면 혜순은 결코 어른들이 좋아할법한 싹싹하고 애살있는 성격은 못되었다(물론 내가 뭐라 할 입장은 못되지만). 법과 도덕 없이도 살 정도로 원리원칙을 지키는 똑 부러지는 면은 가졌으나 결코 따뜻하고 정을 내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 성격은 외동딸인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라고 느껴질 정도였으니 시부모에게 아니 시모에게(혜순에 대한 병철의 불만은 크게 기억나지 않으므로) 성에 차지 않는 며느리일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결과였을까.


남순은 전형적인 한국의 가부장적인 시모였다. 명절이나 어버이날, 혹은 생일처럼 특별한 날이면 당연한 듯 혜순에게 ‘시근 머리' 있는 며느리로서 책임과 역할을 요구했다 아니, 바라는 바를 대놓고 요구하지는 않으면서 썩 내키지 않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를 테면 명절날 아침 일찍 찾아오지 않으면 문을 열어주며 타박부터 한다거나 그러면서 혜순더러 ‘이번 명절에는 친정에 한 번 다녀오너라'하는 소리 한 번 없다거나, 방문을 할 때마다 여기저기 아픈 것에 대한 한탄을 하면서 가까이 살면서 더 자주 들여다봐주지 않는 혜순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는 식이었다. 그럴 때마다 혜순은 ‘아유, 어머니 명절에 딱히 할 일도 없는데 (실제로 찾아오는 이는 없어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오전 11시쯤 오면 되지 뭘 그러세요’라든지 ‘어머니 나이쯤 되시면 다 여기저기 편찮으신 게 당연하죠'하고 대꾸를 했는데 그런 혜순의 꼿꼿한 반응은 불편한 남순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런 마찰이 있을 때마다 혜순도 나름의 스트레스를 받았겠지만 그 뒷감당에 대한 몫은 온전히 내 것이었다.


며느리 입장에서 시부모와 함께 (남편도 없이) 오랜 시간 한 공간에 있는 것이 편한 시간일 리 없었다. 오는 손님이라도 있어 음식을 하고 내오고 치우는 일이라도 있었다면 그 어색하고 불편한 시간은 고된 가사노동으로 정신없이 채워졌을 텐데 외동아들이 죽고 나서 병철 쪽 친척과의 왕래가 끊어져 명절이라고 찾아오는 손님도 없어 우리의 명절은 고단할 만큼 한가했다. 재래시장에서 사 온 돼지고기 수육과 함께 나물 무침 몇 가지, 탕국(경상도식 소고기뭇국), 생선 하나를 구워 함께 식사를 하고 이것저것 치운 후 오후 3시쯤 되면 딱히 할 것도 없어 연예인들이 우스꽝스러운 만큼 크게 만든 윷가락을 던지며 몸개그를 뽐내거나 한국어를 곧잘 하는 외국인들이 한복을 입고 나와 한국어 퀴즈를 풀며 뻔한 실수를 하는 명절 오락 프로그램에서 조금의 재미라도 얻어보려는 기대를 하며 쳐다보는 일 외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명절 오후의 침묵은 견디기 힘들 만큼 불편했으나 괴로울 만큼 이해가 되는 것이었다. 그들을 연결하고 있던 다리 같은 존재가 사라진 마당에 도대체 무슨 할 일이, 할 말이 남아있단 말인가. 텔레비전 소리가 우리가 내는 소리보다 더 커지고, 더 이상 그 어떤 노동과 소음도 어색한 시간과 공간을 위해 남아있지 않을 때가 되면 오전 내내 아무 말이 없던 병철의 입이 떨어졌다. 수고했다. 이제 니는 그만 가거라. 병철의 마르고 갈라진 목소리는 속 시끄러운 침묵 위에 무겁고 서글프게 내려앉았다. 병철의 허락이 떨어지면 남순은 마지못해 오늘의 시집살이 퇴근 컨펌을 내렸다. 


“그래…… 갈라거든 고마 가거라(가려거든 그만 가거라).”


남순의 ‘그래'와 이어지는 뒷 말 사이에는 한 없이 공허한 외로움이 느껴졌는데 그로 인해 혜순에게 미안함을 느끼게 하려는 목적과 ‘가려거든’을 불임으로써 ‘네가 시근 머리 있는 며느리로서 의무를 다할 기회를 주겠으니 알아서 하라는 의도가 느껴졌다. 며느리에게 부담을 주어서라도 원하는 것을 얻어보겠다는 마음은 있었겠으나  혜순을 괴롭히기 위한 목적인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혜순이 느낄 부담감과 괴로움보다 본인의 외로움과 서글픔이 더 컸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순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1차에 이은 2차 허락까지 받은 혜순은 감동도 재미도 없는 명절 오락 프로그램에 집중해 보려는 노력을 미련 없이 거두고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도 수고하셨어요. 해방감이 느껴지는 그의 인사에는 명절날 유독 쓸쓸함을 느끼는 시부모를 두고 이른 오후에 떠나는 것에 대한 다소 민망한 미안함도 섞여있었다. 혜순을 배웅하고 문을 닫고 들어오면 여지없이 남순의 ‘시근 머리' 타령이 시작됐다. 그건 마치 12시 종이 ‘땡'하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짠'하고 풀리는 신데렐라의 마법처럼 혜순이 떠나고 나면 어김없고 틀림없이 일어나는 예정된 수순 같았다. 남순의 말인즉슨, 가족이라고 저밖에 없는데 오늘 같은 명절날만이라도  좀 붙어 있으면 어디가 덧나냐는 것이었고, 그렇게 혜순은 ‘시근 머리'가 없는 며느리가 되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 어색한 시공간이 더 길어지면 진짜로 어딘가 ‘덧날' 것만 같았기에 명절 오후가 오면 그 순간이 차라리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예정된 일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을 아는 한 최대한 빨리 겪는 게 덜 괴로운 법이니까. 그것이 기분 좋은 기다림을 가져오는 일이 아닌 한.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은 평행을 이루지 못하는 시소처럼 양쪽에서 오르락내리락했다. 며느리 흉을 보는 남순에게는 그만 좀 하라며 화를 내거나 시집살이 한탄을 하는 혜순에게는 좀 잘하면 될 것을 왜 그렇게 야박하게 구냐며 짜증을 냈다. 고부간의 갈등을 옆에서 지켜보며 양 쪽 나에게 화가 났던 것은 어찌 보면 둘 다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어른들이 나를 보는 동정의 눈빛을 통해 나는 타인을 동정하는 법을 배웠는지 몰랐다. 아들을 잃었기에 며느리에게 대놓고 시집살이를 요구하지 못하는 시모와 남편을 잃고도 간헐적 시집살이의 책임을 감당하느라 불편하고 억울했을 며느리의 마음을 굳이 내 아픔처럼 느꼈다. 그래서 남순의 노골적인 쓸쓸함이, 그리고 혜순의 시근 머리 없는 해방감이 이해가 됐다.


17살 때 혜순이 제안했던 캐나다 유학을 포기하고, 좀 더 수월한 등하교를 위해 혜순은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와 가까운 곳에 아파트를 구했다. 학교까지 버스를 타야 했던 남순의 집을 떠나 걸어 다닐 수 있는 혜순의 집으로 옮겼다. 캐나다 유학(留學) 대신 봉덕2동으로 유학(遊學)을 간 셈이었다. 책과 옷가지를 챙겨 혜순의 차에 실을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괜찮았다. 그런데 차에 타고 창문을 열고 남순에게 인사를 하는데 남순이 인사를 하려고 내밀었던 내 손을 잡고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아들을 잃고 남편을 보내고, 이제는 손녀까지 떠나간다니 완전히 혼자가 된 당신의 처지가 가여워 울음이 터진 걸까. 이유야 어찌 됐든 그의 서러운 울음을 정면으로 마주하자 나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열린 차 창문으로 손을 마주 붙잡고 오열하는 할머니와 손녀, 누가 보면 50년 만에 만난 남북이산가족이 다시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고작 봉덕 1동에서 봉덕 2동으로 가는 것일 뿐이었다. 2킬로미터도 안 되는 거리의 이사를 두고 남북이산가족 같은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남순과 나를 보다 못한 혜순은 ‘어머니, 이제 갈게요'하고선 차를 출발시켰다. 사이드미러 속의 남순이 작아지자 얼굴에 붙어있던 눈물을 소매로 훔치는 나에게 혜순은 화를 냈다. 자기가 둘 사이를 떼어놓는 나쁜 사람이 된 것 같다고. 왜 요란을 떨어서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냐고. 당시에는 울고 있는 나한테 모진 소리를 하는 혜순이 야속했으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아무도 강요하진 않았지만 평화나 화목 따위와 거리가 먼 가족 안에서 항상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있었다. 다 같은 ‘한 편'이면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혼자가 된 외로움을 며느리의 ‘시근 머리’로 달래 보려는 시모와 결혼 1년 차에 남편을 잃고도 수 십 년 동안 시부모와의 의리를 지키고 있지만 여러모로 쌓인 게 많은 며느리의 관계란 내가 아무리 갖은 수단으로 기름칠을 해보려 노력해도 쉽게 매끄러워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시소의 중간에 올라가 균형을 잡는 어릴 적의 놀이처럼 양 쪽에 마음을 조금이라도 잘못 배분하는 순간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마음이 곤두박질쳤다. 갑작스러운 남순의 울음에 울컥했던 나는 남순의 서사에 더 무게를 실었고 그걸 지켜보고 있을 혜순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리 중심잡기에 애를 썼다 해도 알게 모르게 남순과 혜순은 나에게 서운한 게 많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편을 드는 나를 더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셋 중에서 둘이 있을 때 그 자리에 없는 한 사람을 함께 흉보는 건 누구의 편을 떠나 비겁하고 야비한 행동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의 탓을 하고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의 외로움에 더 감정이입을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들도 다른 이의 흉을 보고 싶어서 나에게 서로의 불만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순과 혜순은 그저 각자의 속상한 마음을 나한테서 이해받고 위로받고 싶었던 것이었다.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쓰는 대신 속상한 마음을 이해하고 위로할 줄 알았다면 조금 덜 불편한 가족이 될 수 있었을까. 그렇다 한들 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기엔 그때 나는 너무 어렸다. 


이전 12화 쟈 키나 내 키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