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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서영 Oct 22. 2023

착한 아이의 후회

병철이 세상을 떠나고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혜순은 어느 날 나에게 책 한 권을 건넸다. 노란색 색지로 씌워진 책 표지를 열자 캐나다 유학에 관한 책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엄마의 동생, 그러니까 삼촌(외삼촌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지 않다)은 나를 귀여워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으로 혜순과 캐나다 에드먼턴에 살고 있는 삼촌집을 방문했을 때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일기를 쓰는 나를 기특해했고 그 이후로 혜순에게 안부 전화를 걸어올 때마다 나를 캐나다로 보내라고 유학은 빠를수록 좋다며 설득했다. 혜순은 삼촌의 권유를 수년 동안 들으면서 캐나다 유학에 대한 내 의사를 적극적으로 묻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도 묻지 않았다. 이유는 뻔했으니까. 초등교사 벌이로는 유학비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외동딸을 멀리 떠나보내기 힘들었을 것이며 남순과 병철에게서 그들의 유일한 핏줄인 나를 떨어뜨려 놓기 미안했을 것이다. 마지막 이유 때문에 책 표지가 색지로 가려져 있다는 것도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던 혜순은 내가 고등학생이 되자 삼촌의 권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혼자 이것저것 알아보다 나에게 자신이 읽었던 캐나다 유학 관련 책을 주며 나도 한 번 읽어보라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고 했다. 솔직한 심정은 가고 싶었다. 하지만 혜순이 삼촌의 오랜 권유를 들으면서도 나에게 말을 꺼내지 않은 내가 짐작한 세 가지 이유가 나도 마음에 걸렸다. 그중에서 첫 번째 이유만 혜순에게 물었다.


“엄마, 근데 유학 돈 많이 들잖아.”


‘근데' 앞에 생략된 ‘나도 가고 싶긴 한데'의 내 마음의 소리가 혜순에게 들렸을까. 


“...... 네가 가고 싶다고 하면 빚을 내서라도 보내주지.”


혜순의 대답 전에 잠깐 흘렀던 정적이, 나에게 고민해 보라고는 했지만 진짜 가고 싶다고 하면 어쩌지 싶은 혜순의 고민이 들리는 것 같았다. 혜순의 말대로 시간을 들여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혜순이 건네준 책을 4분의 3쯤 읽었을 때 말했다. 가지 않겠다고. 혼자 이국 땅에 간다는 것이 무섭거나 겁이 난 것은 아니었다. 다시없을 기회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학 제안을 고사한 이유는 (지금 생각해 보면) 어쭙잖은 자신감과 필요 이상의 책임감 때문이었다. 유학 자금을 위해 빚을 지게 하면서까지 가고 싶진 않았다. 유학을 가지 않아도 공부를 열심히 하면 어른들이 말하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남순과 혜순을 남겨 두고 갈 수 없었다 아니,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남순이 더욱 적적해할까 걱정도 됐으나 더 큰 걱정은 둘 사이의 남게 될 빈 공간이었다. 내 몸무게가 40 킬로그램이 채 되지 않던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선욱이 담당하던 ‘가족의 다리'같은 역할은 이제 내 몫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없으면 그렇지 않아도 이 ‘어색하고 슬픈' 가족이 더욱 암담해질 것만 같았다. 선욱이 남기고 간 바통은 싫든 좋든 내게 주어졌고 그건 당시의 내 몸무게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질 만큼 무거웠지만 내려놓을 순 없었다. 나는 그 무거움을 어떻게든 승화시키기 위해 애썼다. 전국노래자랑을 볼 때 아는 트로트가 나오면 과장된 트로트 창법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요란한 음악이 나오면 그보다 더 요란하게 몸을 흔들며 막춤을 췄다. 그때마다 병철과 남순, 그리고 혜순이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이었다. 유일하게 셋이 함께 웃는 순간이었다. 웃음이 터지는 수 초의 순간 동안 셋 사이의 어색한 공간이 잠시나마 사라졌다. 그 순간을 위해 나는 동요 대신 트로트를 연습했고, 만화영화보다 전국노래자랑과 가요무대 방영 시간을 더 꼼꼼히 챙겼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내 의무였다. 그런데 내가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캐나다로 가 버리면 그걸 누가 한단 말인가. 선욱이 나에게 훌렁 던져버린 바통을 넘길 상대가 내게는 없었다. 바통이 제 역할을 다 하지 않으면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이 두 사람이 겨우 붙들고 있는 가족의 끈이 혹시라도 끊어져 버릴까 봐, 가족이라는 형식적인 틀마저 산산조각 날까 겁이 났다. 


그래서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혜순은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었고, 나는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때의 확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힘을 잃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고, 사회인이 되는 동안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내가 거절한 혜순의 제안을 떠올렸고 그로부터 10년 후 더 많은 것을 포기하고 나는 결국 캐나다행을 감행했다. 마음속 깊이 원하던 일을 아무도 요구하지 않은 책임감 때문에 스스로 포기했기에 후회가 되어도 탓할 사람은 나 자신뿐이었다. 그때 이해했다. 왜 사람들이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하고 후회하는 게 낫다고 하는지. 나이 서른이 다 되어 시작한 해외 생활은 결코 만만치 않았고 캐나다의 삶 속에서 장벽이 느껴질 때마다 10년 전에 내 선택을 뒤집어 상상해 보며 그랬다면 지금과는 얼마나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 그려본다. 하지만 하나 다행인 것은 그때의 선택에 대한 길고 깊은 후회를 통해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을 만들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어쭙잖은 책임감이나 체면 혹은 어정쩡한 배려로 하는 선택은 결국 돌아보면 타인을 위한 것도 나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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