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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서영 Oct 22. 2023

내 인생에 '선생님'은 없어

국민(초등) 학교 시절 매일 밤 화장실 변기 위에서 똥을 누던 시간을 기억한다. 좌 병철, 우 남순을 두고 그 사이에서 잠이 들고 깨던 일상 속에서, 세상과 차단된 1평 공간 안에서 가만히 힘을 주는 그 시간이 하루 중 내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양질의 고독이었다. 20여 분의 시간 동안(유아 변비가 있었는지) 나는 주로 기도를 하며 보냈고 그 내용은 한결같았다. 이 똥을 다 누고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어른이 되어 학교를 가지 않게 해 주면 정말 고맙겠다. 만약 그게 어렵다면 차라리 눈을 뜨지 않게 해주는 것도 옵션이다. 사실 기도의 형식을 가지고 있던 협박에 가까웠다. 대게의 그 또래 아이들이 학교 가기 싫어하는 이유였던 ‘공부가 싫어서’ 한 기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공부를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공부 자체를 좋아했다기보다 시험 문제에 맞는 답을 찍어 제법 높은 점수를 받을 때 얻었던 ‘공부 잘하는 애'라는 프레임에 관심이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로 가끔 칭찬을 받던 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년기 시절 동안, 나는 학교를 경멸했다.




지금은 분명 많이 나아졌으리라 짐작하지만 90년 대 초등학교(국민학교)는 인권 감수성이 제로에 가까웠다. 그 시절 인권 감수성이 형편없던 곳이 어디 초등학교뿐만이었겠냐마는 유일한 사회활동의 장이었기에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세상의 전부인 양 느껴졌다. 학생의 개인정보 보호와 인권 보장에 대해 쥐뿔만큼도 경각심이 없었던 대한민국 공교육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보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으나 대부분의 경우 실패했다. 그 당시 한국은 경제호황과 외환위기를 짧은 기간에 겪는 질풍노도의 시간을 보내느라 인권 감수성을 고려할 여유는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며 최후의 아량까지 짜내 보아도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나는 학교와 교사를 이해하기 어렵다. 아이들이 당하고 있는 가정폭력이나 학교폭력 보다 그들이 사는 집이 자가인지 전세인지, 부모님의 차가 무슨 브랜드인지를 더 궁금해했던 소위 윗사람들로부터 내려온 행정 업무를 처리하느라 아이들이 상처받을 마음까지 일일이 헤아려주기에 학교는 너무도 바빴겠지.




학년이 바뀌고 새로운 반과 담임이 배정되는 년 초 시즌이 되면 학교에서는 가정환경조사서를 나눠줬다. 그 종이를 받아 들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조금 홀가분해지는 걸 느꼈다. 앞으로 일어날 악재가 주식의 가격에 선반영 되는 것처럼 이 순간이 어김없이 올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내 기분은 3월 초부터 폭락할 대로 폭락해 있었다. 때문에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자 나자 오히려 살짝 반등하는 기분마저 들었던 걸까. 조사서의 항목은 매년 조금씩 바뀌었는데 절대 바뀌지 않는 기본적인 사항은 아래와 같았다.




거주지 주소, 부모의 이름, 나이, 직업, 직장, 직위, 학력, 그리고 매년 조금씩 바뀌는 '배리에이션'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들어가거나 빠지거나 했다.


주거형태(자가/전세/월세), 자동차(소유여부/차종), 재산액, 사교육 현황(다니는 학원 종류와 개수), 부모의 육성회 임원경력


요즘에야 인권이다 개인정보다 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그때는 ‘선생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이 여전히 건재하던 시절이라 학교가 시킨 일에 다들 별다른 군말 없이 따르는 분위기였다. 아이들의 가정환경을 파악하는 것이 교육에 도움이 된다는 믿음이 가정환경조사의 취지인 것 같지만 지나치게 구체적인 항목들 때문에 아이들이 받는 상처의 크기에 비하면 보다 나은 교육의 효과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이 조사의 수혜자는 정해져 있었다. 번듯한 직업과 고급 자가용을 가진 양부모를 둔 아이들, 올해 육성회비 예산을 미리 알게 될 행정부, 그리고 어떤 아이를 공략해야 두둑한 촌지봉투를 챙길 수 있는지 알고 싶은 교사들. 나를 포함한 그 외의 대부분의 아이들은 비슷한 이유로 지나치게 구체적인 가정환경 조사를 싫어했다. 




학교에서 받아온 투박한 갱지에 인쇄된 조사서를 병철에게 내밀었다. 적당히 알아서 써주면 서로서로 어색할 일이 없었을 텐데 병철은 꼭 어린 내게 불러주며 직접 받아 적게 했다. 서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불러주는 병철과 받아 쓰는 내가 둘 다 신경 쓰는 부분은 딱 하나였다. 아버지 '부' 자가 적혀있는 칸에 이르자 2초 정도 정적이 흘렀다.


"거기는 없으니까 넘어가고. 다음."


어색하기 그지없는 그 순간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시키는 대로만 받아 적었다. 사실 공백으로 남기지 않고 뭐라도 채웠으면 했다. 선욱의 이름과 (살아있었다면 지금의) 나이를 적고 차라리 직업란에 '사망'이라고 적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공란 대신 뭐라도 적혀 있으면 가정환경 조사지를 제출할 때 좀 더 당당하게 종이를 내밀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라졌을 뿐이지 애초부터 없던 게 아니잖아. 나는 속으로 그렇게 외쳤지만 '없으니까'라고 할 때 떨렸던 병철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아무 말하지 않았다.


태평양보다 넓게 느껴지는 조사서의 빈칸을 애써 외면하며 학교에 들고 가면 선생님이 가져온 종이를 앞에서 뒤로 넘기라고 시키거나 각 분단의 맨 앞줄에 앉은 아이더러 걷어오라고 시켰다.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민감한 개인정보들이 가득 적혀 있는 종이를 무신경하게 다뤘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그래도 그건 ‘양반'이고 사실 그보다 더 한 것은 아이들의 가정환경조사지가 회수되고 사흘쯤 뒤에 일어난다. 2교시나 3교시쯤 매우 바빠 보이는 얼굴로 학년부장 교사가 수업시간이 불쑥 들어와 수업을 하던 담임교사 대신 교탁을 차지한 후 ‘엄마 없는 사람 손들어라', ‘아빠 없는 사람 손들어라' 그리고 ‘엄마 아빠 둘 다 없는 사람 손 들어라' 하며 손 드는 아이들의 숫자를 적고는 옆 반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어른이 되어 지금 생각해도 나는 그 일이 이해되지도 용서되지도 않는다. 이미 가정환경조사지를 걷어갔을 것이고, 편부모 가정이나 보육원에서 지내는 아이는 그 종이의 빈칸만 세어봐도 파악할 수 있지 않은가. 서로 피차 피곤하게 왜 일을 두 번이나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간혹 손을 들게 하기 전에 아이들에게 눈을 감으라고 하는 나름 신경을 쓰는 교사들도 있었으나 그들의 배려에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그 또래의 아이들이 눈을 제대로 감을 리 없었고 그 수업이 끝나면 나는 폭풍 같은 쉬는 시간을 겪어야 했다. 실눈을 뜨고 본 아이들은 나에게 쫓아와서 반짝이는 눈으로 질문 공세를 퍼부었고 호기심으로 가득 찬 반짝이던 눈은 내가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내놓자마자 동정과 우월감 그 어느 사이를 담당하는 눈빛으로 바뀌었다. 천진난만한 그들이 무슨 잘못이랴. 내가 미워한 건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아이들이 받을 상처에 무신경했던 교사들이었다. 


교사들에 대한 나의 증오는 교사였던 혜순에게는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왜 그렇게 선생님들을 싫어하냐'라고 묻는 혜순에게 ‘내 인생에서 선생님은 고1 때 담임 선생님 빼고는 없다’며 가정환경조사나 학년부장 교사의 만행 따위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유를 말하지 않음으로써 같은 교사라는 이유로 그에게도 내 상처에 대한 책임을 묻고 싶었던 걸까. 혜순이 다닌 학교에서도 분명 행정 업무가 있었을 것이고 담임과 학년 부장을 주로 맡았던 그도 당신의 딸이 겪었던 일을 어떤 식으로든 했을 것이었다. 


“엄마는 가정환경조사 종이 걷을 때 어떻게 하노?  반에 돌아다니면서 편부모 가정 조사할 아이들한테 대충 눈 감으라고 하고 손들게 하나?” 


물어보고 싶었으나 한 번도 입 밖에 꺼내지 못한 질문이었다. 질문의 이유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혜순은 질문 안에서 딸이 겪은 일과 그로 인해 받은 상처를 짐작할 것이었다. 진심으로 궁금하긴 했지만 내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그를 굳이 슬프게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저 아니길 바랐다. 적어도 혜순이 조사를 담당했던 아이들은 나 같은 상처를 받지 않았길, 그래서 내가 혜순을 내가 만난 다른 교사들처럼 미워하지 않을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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