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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여섯 번째 키워드

by 황서영


명절의 의미


캐나다에 살게 된 이후로, 한국 명절이 다가오면 복잡한 마음이 교차한다. 자식 된 도리로 부모님 찾아뵙고, 얼굴 보여 드리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자녀들에게 한국 고유 명절에 대해 경험하고 익힐 수 있는 기회를 주지 못한다는 미안한 마음. 그런데 익숙해진다는 게 이렇게 무서운 일인지 몰랐다. 신기하게도 캐나다에서의 해를 거듭할수록 이런 복잡했던 마음은 조금씩 옅어져 가고 나름 합리화를 하기 시작했다. 왜 명절이라는 게 시작되었을까. 캐나다에 이민 온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들의 명절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이런 생각에 이르자 캐나다에서 함께 음식을 만들어 나누어 먹고, 감사를 나누는 이들과 내가 혈연관계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들 무슨 상관이랴 하는 생각에 이르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아이들이 어릴 적엔 한국 명절 또는 캐나다의 특별한 날이 돌아오면, 캐나다에 우리 셋만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게 청승맞기도 하고 그래서 냉동 칠면조를 사서 인터넷에 나온 요리 법대로 칠면조도 만들어, 주변 친구들도 초대해서 나눠 먹기도 했다. 큰딸이 대학 간다고 집을 떠나고, 둘째가 고등학생이 돼서는 매번 이런저런 캐나다 명절 때마다 작은 딸아이 친구 집에 초대받아서 또 그렇게 명절을 함께 보내곤 했다.


그해 그해마다 함께 한 사람들의 얼굴은 다르고, 상위에 차려진 음식들은 달랐지만, 중요한 건 언제나 푸짐한 음식을 함께 준비하고, 또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다. 감사하는 마음이야 굳이 여럿이 모여서 하지 않아도 혼자서도 항상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모여서 함께 음식을 나누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눈다는 이 의식이 삶에서 소중한 순간임을 나이가 들수록 더 깨닫게 된다.


지난 주말에 오래도록 교제하던 지인 집에서 가까운 사람들과 저녁 모임이 있었다. 한참 전에 그날의 모임 날짜를 정했을 때는 분명 그날이 한국의 추석 날인지도 모르고 그냥 여느 주말 오후 중 하루를 선택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모임 날이 가까워지니 그날이 추석 명절인 걸 알게 되었다. 워낙 주변에 베풀기를 즐겨하는 주인 부부는 그날도 어김없이 푸짐하게 바비큐 그릴에 고기를 구워 연기를 자욱하게 명절 분위기를 띄워 주었고, 안주인은 명절에 전이 빠질 수는 없다며 정성스레 깻잎전, 고추전, 산적 등 눈으로 보기만 해도 감동스러운 전을 준비해 주었다. 늦은 오후부터 시작된 우리의 모임은 후식까지 다 먹고 난 후에도 아무도 자리를 뜨고 싶어 하지 않았다. 휘영청 보름달이 주변을 환히 밝히는 그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솜씨 좋은 바깥 주인의 김치 소면으로 한 끼를 더 얻어먹은 후 마무리가 되었다. 어릴 적부터 성장하는 걸 보아 왔던 서로의 자식들 이야기, 아이들 학교, 직장 이야기, 살인적인 물가 이야기 등등을 하며 우리의 기억 속에 추석 날에 대한 특별한 추억을 하나 더 보태고 왔다.


어릴 적 사진 속 한 장면처럼 뇌리에 박힌 장면이 있다. 6살 남짓 된 여자 아이가 사과를 깎으며 사과 껍질이 길게 한 줄로 늘어지는 걸 감탄하며 신나라 하는 장면이다. 그 옆에는 아빠와 어린 남동생. 이게 내 기억 속에 박혀있는 명절날 아침 한 장면이다. 2살 위의 오빠는 어릴 적 허약 체질로 시도 때도 없이 아팠던 것 같다. 아주 덥지 않은 때로 기억이 나니 아마 지금 이맘때 추석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오빠가 급히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어서 집에는 아빠와 나와 남동생이 조용한 명절 아침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깎은 사과를 오물오물 씹다가, 아무래도 사과와는 다른 질감이 느껴져서 뱉었는데, 애벌레가 나와서 온 가족이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 추석에 함께 하지 못한 우리 아이들은 명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불현듯 궁금해진다.


소냐민정@mjk_immigration




명절이 뭐라고! 만들면 되지!


명절. 엄마는 새벽부터 일어나 부엌에서 무언가를 분주하게 준비하시고, 아빠는 이미 깨끗해 보이는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하기 시작하신다. 내복 차림의 우리 세 자매는 이불 정리하라는 아빠의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뒹굴뒹굴 장난을 치며 여유롭고 행복한 명절 아침을 맞이한다. 한 번도 제사를 드려본 적이 없는 우리 집의 평범하고 조용한 명절 아침 풍경이다. 엄마는 제사음식을 준비하시는 게 아니라 소풍 음식을 준비하신다. 물론 각 명절마다 챙겨 먹는 명절 음식으로 부지런하게 도시락을 싸신다. 모든 사람들이 지옥 귀경길에 조금이라도 빨리 합류해서 고속도로를 통과해 보려고 부랴부랴 서두를 때, 우리는 도시락을 들고 가까운 산으로 소풍을 간다. 추석 때면 동생들과 솔잎을 따서 즉석 송편을 만들어 먹었던 기억이 난다. 생각해보니 산속에서 떡국도 끓여먹었다. 어떻게 부모님이 떡 만들 재료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명절 때마다 어린 세 딸을 데리고 산에 가셨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우리는 명절이 되면 할머니 할아버지를 뵈러 시골에 내려가지 않았다. 명절이 다 끝나고 모든 사람들이 일상으로 돌아갈 때쯤 여유롭게 고속도로를 타고 경상북도 구미와 청도로 내려가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뵈었다. 어린 마음에 시골 가는 길이 멀기도 했지만 마을분들이 쓰시는 경상도 찐한 사투리가 익숙지 않아 마치 외국말을 쓰는 외국에 온듯한 느낌이었다.


한 가정의 큰 며느리가 된 다음에야 왜 우리 집이 이렇게 남들과 다르게 명절을 보냈는지 알 것 같았다. 종갓집 장손에게 시집와서 아들 없이 딸만 셋을 출산한 엄마에게 명절은 정말 너무 힘들고도 스트레스받는 축제 아닌 축제였을 것이다. 아빠는 늘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가정의 평화는 엄마로부터 시작된다' 현명했던 아빠는 막냇동생이 태어난 이후로 우리만의 명절을 만드셨다. 그 어떤 가정보다 풍성하고 행복하고 스트레스 없는 명절로 기억된다. 아침에 엄마가 명절 음식을 만드시는 동안, 우리 세 자매는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사진 찍기가 취미이신 아빠의 요구사항에 맞게 모델포즈를 취해가며 사진을 찍었다. 사진 촬영과 음식 준비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명절 파티 시작. 우리는 등산을 간다. 너무 웃긴 이야기지만 말이 등산이지 나의 기억은 산에 오르는 일반적인 등산이 아니라 산에서 돗자리를 펴놓고 하루 종일 맛있는 걸 먹고 놀다가 내려온 기억뿐이니 엄마 아빠의 짐이 얼마나 많았을지 상상이 간다. 느지막하게 집에 도착해서 우리가 좋아하는 티브이 프로그램으로 하루를 마감하면 우리의 명절은 늘 언제나 완벽했다.


아빠의 선택은 정말 현명했다. 명절 후 시골 친척들을 방문할 때면 우리는 시골에서 귀한 손님 대접을 받았다. 오롯이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삼촌 심지어 동네 어르신들로부터도 온전하게 우리만 넘치도록 사랑을 받았다. 외부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으니 당연하다. 검색을 해보니 명절(名節)은 해마다 일정하게 지키어 즐기거나 기념하는 축일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 나의 기억 속 명절을 이처럼 아름답게 만들어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리며, 부모님의 기억 속에서도 우리 가족이 함께 보냈던 명절이 정말 행복하고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기를 기도해본다. @famiroyale @canada_famiroyale



명절 (조금 참는 날)


역대 최고의 귀성길 정체가 예상된다는 뉴스 덕에 이른 새벽부터 아이들을 깨웠다. 큰 집 식구들한테 흠 안 잡히게 애들 잘 꾸며서 오라고 시어머님의 신신당부에 명절맞이 특가 세일로 산 옷을 가방에 싸고 내복채로 떠날 참이었다. 휴게소 입장은 꿈도 못 꾸니 차 안에서 이것저것 먹다 보면 옷이 금방 더러워질 것을 예상한 염렵함이었다. 손녀 둘은 깔끔한 원피스 입히고 귀한 막내 손주는 한복을 입혀서 오라는 특별 주문도 내키진 않은 데다 도착하자마자 앞치마를 입고 벗지 못할 생각을 하니 미리 아득해진다. 분명 형님과, 동서는 오늘도 직장일로 늦을 거라며 해맑은 얼굴로 나타나 “우리 집 회장님”이라는 문구가 적힌 돈봉투로 효도 행세의 절정판을 보여줄 참일 텐데 그것도 종교의 힘으로 조금만 참고 견디자며 스스로 달래었다. 경기가 나빠 회사 직원들 상여금도 못 챙겨준 남편에게 고기라도 좀 사갈까 말이 목구멍에서 맴돌다가 주저앉았다. 병원장으로 승진한 아주버님이 청담동에 집을 샀다는 소식은 이미 배는 열 번이나 아팠던 터였는데 그 이야기를 영웅 담화 다큐멘터리 시리즈로 다시 읊을 때에 월급쟁이 남편이 혹시나 어깨가 처지질 않을지 걱정도 됐다. 왜냐하면 내 어깨도 같이 쳐질 거였기 때문이다. 솔직히 남편보다 나를 더 걱정했을지도 모른다.


이윽고 도착해 아이들을 제대로 씻겨 새 옷을 갈아입히고 화려하진 않아도 때깔 나게 잘 키웠소 임금님께 상납하는 심정으로 아이들을 시부모님께 앉혀드리는 순간부터 예상 시나리오의 쏜쌀같은 화살들이 마구마구 나의 마음 과녁으로 쏟아졌다. 올해는 시어머님에, 이혼하고 돌아온 시누까지 합세했다. 남편일도 다 내 잘못, 친정 어려움도 다 내 잘못. 너무 억울했지만 아무 말도 못 하고 듣기만 하다 목구명에 박힌 불덩이 하나는 식혜 한 모금으로 식혔다. 역시 미리 예상 시나리오 시뮬레이션을 하고 오기 잘했다. 애써 표정관리를 하고 부엌문으로 몸을 피하 고선 동태 전거리를 다듬고 있는데 아버님이 뒷문으로 잠시 오라며 부르신다. 친정 갈 때 고기 한 근 사고 옷 하나 사 입으라 건네주시는 아버님의 용돈이다. 눈물이 왈칵 쏟는다. “애들 잘 키워주서 고맙다, 형석이 곧 잘 될 거니 조금만 참아주라”하시는 말씀에 닭똥보다 더 큰 눈물 하나가 돈봉투에 툭 떨어졌다.


이번 추석은 그래도 아버님 덕에 참을 만했다고 생각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제사 음식 간식거리가 지겨워질 즈음, 어젯밤에 만났던 먼 일가친척을 하나씩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해대며 '뒷담화 간식'을 만들었다. 이게 진정한 간식 아닌가 싶다. 몸이 약해 장거리 여행 시엔 항상 멀미약을 달고 살던 큰아이가 표정이 좀 안 좋아졌다. 배가 싸리 싸리 아프다며 화장실을 가고 싶다는 말이었다. 집에 가려면 아직 40분 정도 더 남았는데 아이는 얼굴만 봐도 본인의 괄약근을 최대한 오므리고 있음이 역력해 보였다. 몇 번이나 조금만 참으라 말끝에 갓길에 차를 세우고 볼일을 보면 어떨까 해도 어린아이생각에 그건 죽어도 못 참을 자존심이었는지 손사래를 치며 싫어했다. 아이의 생리현상을 자극시키는 일을 최대로 자제한 채 달려 급기야 도착한 휴게소, 다리가 땅에 닿고 괄약근이 조금만 느슨해져도 사고가 날 거 같음을 암시하고 남편은 아이를 들쳐 안고 냅다 뛰어 화장실로 들어갔다. “조금만 참아 이제 화장실 다 왔어.” 험난했던 큰 숙제를 해결한 아이는 핫바를 입에 물고 유유히 걸어왔다. 동그란 아이 얼굴이 웃는다. 보름달도 밝게 웃는다.


Pinkpen@mindmap.anna



성묘가 뭐라고


내 어릴 적 명절 모습은 복잡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주일 전부터 일하는 언니들이 그 당시 유행하던 분홍색 이쁜이 비누와 볏짚으로 놋그릇을 닦고 씻고 반지르르하게 윤이 나게 만든다.

이 뿐 아니라 목기도 죄다 꺼내어 마치 전쟁 나가는 군인들이 총을 잘 닦아 두듯이 온 정성을 다해 준비해 둔다.

이건 제사 때마다 벌어지는 일종의 예식 같은 거였다.

일 년이면 10번 이상의 많은 제사를 치러야 하는 우리 집은 명절이면 더할 나위 없이 분주했고 고작 3학년이던 내게도 일감이 주어졌다.

바로 콩나물 머리와 꼬리를 따는 거였는데 이게 워낙 양이 많다 보니 이후로 난 콩나물이라면 질색을 하는 사람이 되었을 뿐이다.

오늘날같이 언제 어디서나 옷을 쉽게 살 수 있는 것과 달리 맞추어 입던 때였기에 ‘명절’ 하면 떠오르는 건 늘 새 옷을 한 벌씩 가지게 된다는 거였고

그건 신나는 설렘으로 새록새록 떠올리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시간이 되어 일가친척들이 우르르 오셔서 제사를 드리고 맛있는 식사와 흐드러진 웃음 속에 하루를 즐겁게 보내고 다들 돌아가시고 나면

또 산같이 쌓인 설거지 감들을 보며 놀랐던 기억이 있다. 어느 명절날 손님들이 돌아간 후, 엄마의 심부름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학교 친구를 만났다.

서로 안부를 주고받던 중에 그 친구는 가족들과 함께 성묘하러 간다고 했다.

우리 집에선 대구 친가나 부산 외가까지 멀리 가서 성묘할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지 제사만 지냈던 터였고

그 당시 사실 난 성묘라는 게 뭔지도 잘 몰랐다.

그저 가족들과 나들이 가는 걸로만 보여서 어찌나 부럽던지.


그것도 우리 집이 교회를 나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한순간 딱 멈춰 버렸다.

예전과 다른 명절 분위기였음을 말할 것도 없었다.

우리가 교회에 나가면서 제사를 모두 다른 분께 반납하게 되니 일가친척들은 고작 몇 분 외에는 거의 우리 집에 들르지 않으셨다.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한 후의 명절은 어린 내 눈에도 훨씬 일이 적어졌고 그래서 우리 가족끼리 오붓하게 맛있는 음식을 먹고 그저 영화관에 가거나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했을 뿐이다. 그런 어느 해인가 우리 집에서도 드디어 성묘라는 걸 가게 되었다.

아마 제사 준비 등의 분주함이 없어지니 고향에 갈 여유를 부리신 듯하다.

온 가족이 기차를 타고 부산에 내려서 외가가 있는 시골 마을까지 또 한참을 배를 타고 들어갔다.

김해 ‘명지’라는 곳인데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안 계신 외가지만 큰 외삼촌과 외숙모님, 그리고 엄마 형제자매가 그곳을 지키며 살고 게셨다.

그 당시는 교통수단도 열악했고 배에서 내릴 때도 다리 대신 쇠 널판을 배와 육지에 연결해둔 게 고작이었다.

출렁거리는 그 쇠 널판 다리엔 구멍이 중간중간 뚫려있어 내 작은 발은 자꾸 그 구멍에 걸려 빠질 듯했었다.

아슬아슬 잘 건너는가 했는데 결국 그 사이로 나의 사랑하는 운동화 한 짝을 흘려보내야 했던 마음 아픈 시간이 떠오른다.

또 그날 외가에서 먹었던 음식들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지금도 최고의 밥상으로 가슴속에 품어져 있다.


하지만 이곳 캐나다로 이민을 온 후론 그런 정겨운 풍경은 가질 수도 보낼 수도 없었다.

그저 딸들이 어릴 땐 한국의 정서를 알려 주자는 의미에서 추석이면 모여 앉아 송편도 빚고 명절 기분을 내려고

여러 가지 음식들을 준비하곤 했을 뿐이다.


이제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떤 종류의 음식이든지 마음대로 시켜먹고 사 먹을 수 있는 한국이 그립다.

그래서인지 미국 살던 친구도 몇 년 전에 아예 한국에 들어가 살고 있으면서 편하고 좋다고 한다.

우리 부부도 2, 3년 후엔 한국에 가서 살아 보자고 시간만 나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9월 10일 바로 오늘이 추석이라 하니

더욱 한국의 명절 음식과 그곳에 사는 언니와 동생들이 생각나고

무엇보다 거기에 살고 있는 둘째 딸이 보고 싶다.

어릴 땐 와글거리며 많은 사람이 우리 집에 모이는 걸 달갑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돌아보니 그때가 정말 좋은 시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같이 모여 음식을 나누고 그동안의 여러 소식들을 주고받으며 하하 호호 웃음이 끊이지 않던 순간들.

2부 순서로 빠지지 않던 화투 치기와 명절놀이들.

며칠씩 계속해서 먹게 되는 남은 음식들의 변신까지가 고스란히 추억으로 남아있다.

어느 해 추석에 맞춰 입은 오렌지색의 원피스와 성묘 가던 날의 기억은 몇십 년이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사진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니 사실 난 거처를 잃은 사람처럼 뭔가가 허전하다.


명절의 방정식이 소리 없이 사라진 지금 나는 그저 오래된 영사기를 돌려보듯이 어린 시절 명절 풍경을 담아내고

앨범 속 빛바랜 낡은 사진 마냥 기억 속에 여전히 둥둥 떠다니는 그 당시의 말을 끄집어낼 뿐이다.

지금도 내 귀엔 “성묘가 뭐라고.” 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마치 옆에서 들리는 듯하다.


성은 @life_ coaching. sue




동그란 명절을 갖고 싶어요


계절이 돌아오듯 추석이 돌아왔다. 매 년 돌아온다는 사실만 같고 매 해 다른 추석이었다. 올해는 3년 만에 대면 명절을 보내는 가족들이 많을 것이다.우리는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 명절을 몇 번이나 지내왔다. 오손도손 모여 젓가락 부딪히며 정을 나눈다는 명절은 코로나를 거치며 우리에게 더욱 날것의 민낯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젊은 세대들은 듣기 싫은 잔소리 레퍼토리를 듣지 않아도 되어서, 50대 이후의 어른들은 집안 아이들 용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어서 오히려, '어쩔 수 없이' 만나지 못하는 이유를 만들어준 코로나가 고마웠다며 익명의 설문지에서 솔직한 민낯을 드러낸 것이다.


사실 유교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는 가부장적인 한국의 명절 문화에서 즐거운 사람은 딱 한 부류다. 술 상봐오너라, 떡, 과일 내 오너라 하고 소리치고는 취기가 과하게 오르면 불콰한 얼굴로 그대로 엎어져 낮잠 한 숨 때릴 수 있는 인간들이다. 그들이 시댁에서 전을 부치던 며느리 일지, 3년째 공무원 공부를 하고 있는 조카 일지, 이혼하고 돌아온 시누이 일지, 난임으로 1년째 고생하고 있는 처제 일지는 대단한 창의력이나 상상력이 없어도 알 수 있는 답이다. 원래 명절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농경민족으로서 수확의 계절을 맞이하여 풍년을 축하·감사하며 햇곡식으로 밥·떡·술을 빚어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성묘하여 그 은혜에 보답했다. 음식을 서로 교환하며 후한 인심을 나누었으며 농사를 마감한 한가한 시기에 다음 해의 풍년을 기원하며 소놀이·거북놀이·줄다리기·씨름·활쏘기 등 세시풍속을 함께하며 공동체 의식을 다졌다. 문헌에 의하면 삼국시대 초기부터 즐기던 명절로서 그 연원이 깊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추석(秋夕))]


1년 중 가장 풍족한 이맘때 가족, 이웃들과 맛있는 음식들을 나눠먹으며 좋은 시간을 가져보자는 것이 명절의 참 의의다. 젊은이들에겐 '취직/결혼/자녀계획의 3대 빌런 질문에 대처하는 법'이 유머 게시판의 최고 인기글이 되고, 명절 직후가 이혼 접수 건수가 가장 높다는 말로 글문을 트는 칼럼들이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도배하고, 명절 제사를 지내던 가족끼리 칼부림이 났다는 비보가 9시 뉴스 메인 데스크를 장식하는 것이 명절이라면 어쩌면 코로나 시대의 비대면 명절을 '하이브리드'한 형태로 '스마트'하게 활용해야 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만이 답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아직도 확진자는 치솟고 있지만 치사율이 낮은 변종들의 득세 덕분에 올해는 다양한 축제들도 모임들도 명절들도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은 듯하다. 물론 감사할 일이다. 다만 코로나에 대한 불안을 보내고, 대신 명절 스트레스와 명절 후유증에 대한 짜증을 되돌려 받는 건 아닐까 걱정이다.


올해 달은 100여 년 만에 가장 완벽한 '구'에 가깝다는 뉴스 기사를 봤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눈으로 보기에도 지난 수 십 년 간 내가 본 그 어떤 한가위 보름달보다 매끈한 동그라미로 보였다. 완벽한 구 모양의 보름달처럼 너무 완벽해서 비현실적인 소원을 두 손 모아 빌어본다. '서로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는 '명절의 제발 List'를 만들어 공유한 뒤 반드시 지키기로 합의된 사람들끼리만 대면 명절을 보낼 수 있게 해주는 법을 제정해주세요.'


저 보름달처럼 모난 구석 없이 동그란, 그래서 아무도 찔리고 다치지 않아도 되는 명절을 소원한다.


황서영@https://link.inpock.co.kr/stand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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