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글쓰기 3주 차
'감정 글쓰기' 코칭 수업 수강생들의 글을 모아 편집한 글을 발행하고 있습니다.
강의/코칭/편집
황서영 no.more.thinking.and@gmail.com
“엄마, 엄마는 왜 2층에 있는 빈방은 렌트를 주면서, 지하실은 사람들에게 렌트를 안주는 거야?”
“너 황금률이라고 들어봤니?” “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거야.”
아이가 알듯 모를듯한 표정으로 미나를 빤히 쳐다본다.
“엄마는 별로 지하실에서 살고 싶지 않거든"
미나는 몇 해 전 겨울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저녁식사를 다 끝내고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며 뒷정리를 하던 중이었다. 그때 딸아이의 외마디 비명소리가 2층에서 들렸다. ‘아이가 어디를 다쳤나?’ 걱정이 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틀림없이 나방 아니면 바퀴벌레가 나왔을 거라 확신하며 후다닥 뛰어 올라갔다.
“엄마, 저기.. 저기 벽 좀 봐!” 세상에나, 하마터면 미나도 미나가 딸보다 더 크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흰 벽 위에 새까만 쥐 한 마리가 보였다. “어어.. 어어. 저기.. 어떡하지?” 순식간에 애기 손바닥 만한 쥐는 사라졌고 그때부터 미나는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아무리 벽장을 열어보고 방을 뒤져 보아도 새끼 쥐가 숨을 만한 구멍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새끼 쥐가 아직도 딸아이 방 어딘가에 웅크리고 숨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더 소름이 끼쳤다.
다음날 이른 아침, 1층 주방 불을 켜는 순간 미나는 다시 한번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경험을 했다. 식탁 다리 밑으로 검정 쥐가 휘리릭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제는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하면 쥐를 잡을 수 있을까 고민하며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음식물을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는 믿기 어려운 글들이 쏟아졌다. ‘아니 부엌에 음식이 있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어떻게 음식을 완전히 없앤다는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며 기분이 우울해지려 할 때 세탁실에서 뭔가가 유리병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이건 또 뭐지?’ 재빨리 세탁실로 가보니 아무래도 생쥐가 여기 어딘가에 숨어 있는 듯한 예감이 들었다. 예전에 꽃배달 받았던 빈 꽃병들이 눈에 들어왔다. 얼른 아이를 학교에 내려주고, 출근해야 하는데, 쥐 생각에 눈앞이 캄캄하고 기가 막혀서 그냥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도대체 이 쥐는 언제부터 우리 집에서 같이 살기 시작한 걸까?’
같은 공간에서 쥐와 동거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이 집에서 행복했던 모든 순간에 대한 배신감마저 드는 기분이었다.
미나는 그때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자기야, 큰일 났어. 내가 정말 출근이고 뭐고 그냥 다 때려치우고 울고만 싶어.” 전화기 건너편에서는 뭐라는 거냐며 천천히 설명해 보라고 다그쳤다. 미나는 짜증이 극에 달해서 정신없이 쏘아대기만 했다. “자기야, 내가 뭐라고 했어? 응? 절대로 지하실에서 군것질하지 말라고 했잖아!”
지하실 창문틀에 쥐의 분비물들이 여기저기 있다는 것과 생수병 바닥 쪽에 쥐가 이로 물어뜯어서 물이 새고 있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건 다 남편 너 때문이라며 울분을 삯이지 못했다.
몸은 직장에 가 있어도 마음은 온통 집을 휘젓고 다닐 새까만 쥐 생각에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그날 밤도 자다가 침대 머릿 쪽 벽에서 쥐가 벽을 긁는 소리에 소스라치며 놀랐다. ‘아, 이제 온 집안이 쥐 세상이 되었구나.’ 난감하고 우울한 기분에 가만히 자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불을 켜고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쥐가 나타났을 때 2-3일 안에 재빨리 대처해야 쥐를 잡을 수 있다는 블로그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젠장 큰일 났네.’ 쥐가 나타났을 때 곧바로 행동에 옮겼어야 했는데, 미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걱정만 하고 아무 대책도 없이 시간만 보냈었다. 이제 5일이나 지났으니 도대체 몇 마리나 이 집에 같이 살고 있을지 미나는 눈앞이 캄캄하기만 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회사 옆 홈디포에 갔다.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미나는 착하게 생긴 중년의 남자 직원에게 다가갔다. “저기, 우리 집에 쥐가 나타났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 직원은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원래 겨울철이 다가오면 집 밖에 살던 쥐들이 따뜻한 집안으로 들어오는 거라며 쥐 잡는 용품들이 가득한 진열대로 미나를 안내했다. 일단 쥐가 잡히면 권총 발사 소리 같은 ‘딱' 소리를 내는 쥐덫과 밟으면 꼼짝 못 하는 ‘끈끈이’, 먹으면 죽는다는 초록색 ‘쥐약'을 넉넉히 사가지고 왔다.
쥐가 처음 발견 되었던 딸아이의 방구석마다 쥐덫을 놓고, 2층 침실 방문 앞에도 쥐덫을 놓았다.
사람들의 출입이 잦은 1층에는 도저히 외관상 쥐덫을 놓을 수가 없어서, 초음파로 쥐를 멀리 도망가게 한다는 플러그 타입의 제품을 사다가 모든 파워 아웃렛에 꽂았다. 미나는 이 무시무시한 쥐들을 다 잡을 수만 있다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액수에 상관없이 돈을 아낌없이 썼다.
그 후, 어디선가 딱 소리만 나면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듯했다. 미나는 잽싸게 쥐덫을 설치해 둔 곳으로 달려가서 쥐덫을 확인했다. 퇴근 후에도 후의 미나의 일과는 제일 먼저 지하실에 내려가서 쥐가 잡혔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2층 딸 방에서 두 눈으로 쥐를 목격했을 때도 공포의 날이었지만, 때보다 쥐덫에 잡힌 쥐를 처리하는 일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공포 이상의 괴로운 일이었다. 일이 더욱 공포스러웠다. 눈을 채 감지도 않고 주검이 된 쥐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어서 멀리서 신문지를 던져 쥐를 덮은 후 작업을 시작해야 했다. 그 겨울의 공포는 그다음 해에도 또 그다음 해에도 겨울만 되면 다시 반복되었지만 미나는 고양이를 키우자니 그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 겨울의 공포> 소냐민정
2001년 여름, 강화도에서의 사건, 성은아 너 아직도 간이 떨리지?
죽음의 길에서 풀려난 그날의 일이 아직도 너의 마음을 울리며 슬프고 무겁게 일어나리라 생각해.
시댁에서 운영하는 여관에 일손이 달린다는 말을 듣고 도와주려고 갔었는데 그곳에서 뜻하지 않은 강도를 만났던 사건. 얼마나 놀라고 무서웠니? 이제 막 갓난 쟁이 티를 벗어 난 딸 하나를 두고 스타킹으로 얼굴을 감싼 복면강도들에게 입을 막히고 얼굴을 가려져서 꿇어 안침을 당했던 시간. 이렇게 복면강도들에게 죽임을 당하는구나 싶었던 순간 ‘아.. 젊은 나이, 나는 30살로 끝이 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아무 희망이 없던 순간이었지. 네 남편은 남편대로 옷장에 가둠을 당해 너희 부부는 숨도 쉬지 못하고 그들의 처분에 조용히 목숨을 맡길 수밖에 없었지.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할 수 없는 그때에 넌 온몸으로 땀을 흘리며 속으론 장대비 같은 눈물만 주르르 흘리고 있었잖아.
너희 부부가 살 목숨이라 그랬는지 지나가던 순경이 열린 창 틈으로 이상한 그림자를 보고는 여관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복면강도들은 붙잡혔고 용케 너희들은 목숨을 건졌었지.
다음 날 신문에 대문짝 만하게 보도가 되었고, 뉴스에도 나와 일가친척이 놀라서 전화가 빗발쳤지. 특히 너의 친정 부모님은 한걸음에 달려와 놀라고 무서웠을 딸, 성은이 너를 힘껏 껴안고 펑펑 우시면서 내내 등을 쓰다듬으셨잖니?
사람이 살며 아무리 여러 일을 만난다고는 하지만 '인생은 요지경', 별의별 일 다 있는 게 인생이라지만 이런 공포스럽고 불쾌한 기억을 가지긴 쉽지 않은 터라 그때 너의 가슴에 얼마나 큰 멍울이 지어졌을까 생각해 본단다. 언제나 밝은 웃음을 날리며 시를 읊조리고 다니던 널 생각하니 연약한 심성에 피의 공포를 불러다 준 그 놈들이 얼마나 괘씸하던지. 그 생각만 하면 아직도 손이 떨리고 화가 뻗쳐 며칠이나 잠을 이루지 못하지..
이제 그 일이 20년이 지났는데 성은아 너 아직도 가끔씩 그 일로 흉몽을 꾸잖아? 하긴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니, 죽음에서 살아온 기적 같은 순간을.
너에게 있어 공포란 그저 ‘프리다 칼로’의 그림에서나 느껴지는 기괴스러움 이라던지 ‘자코메티 ’의 조각들에서 인간의 슬픈 내면을 보여 주는 듯한 앙상한 모습이라던지 종종 영화에서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피의 살육이나 분위기 정도였을텐데 피부로 직접 느낀 공포의 현장을 체험했으니 너의 심장이 어떠했을지 생각할수록 온몸이 녹아든다. 온몸의 털이 곤두선다.
이제 50줄로 들어선 성은아, 넌 그날 이후 “제2의 인생을 선물처럼 다시 살게 되었다.”라고 말하면서 그때의 참혹한 순간들을 예쁜 인생의 색깔로 칠하고 있는 모습에 박수를 보낸다. 그 당시 공포스러웠던 순간을 이겨내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너의 모습에 힘찬 박수를 보낸다.
2001년 여름의 끔찍한 사건을 지우개로 말끔히 씻어 낼 수 있기를 바라며 그런 일을 당했던 사람들의 모임을 주도하여 그들을 보듬고 함께 걷는 너의 일상이 자랑스럽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는 속담도 있는데 넌 오히려 그 쓰라린 경험을 담담히 쓸어내리고 , 연민과 사랑으로 동지애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어떤 두려움도 너를 쓰러뜨리지 못할 거야. 모습을 보니 어떤 두려움도 너를 쓰러뜨리지 못할 거라는 믿음이 선다.
공포를 극복한 성은아, 다시 한번 너를 칭찬한다.
<목숨을 저당 잡혔던 순간 그날 이후 나는 스타킹을 신지 않는다> 최성은 Sue
나는 잘 놀래고 겁이 많다 보니 무섭고 잔인한 드라마나 스릴러 공포영화는 찾지도 않고 보지도 않았다.
언제 내가 처음 공포에 가까운 무서움을 느꼈을까? 생각해 보니 아주 어릴 적 대낮에 자다가 깨었을 때 갑자기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아주 어릴 적 대낮에 자다 깨어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아~ '죽으면 어떡하지' 하고 식은땀이 나고 무서움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사람으로 태어나 살면서 가장 무섭고 두려운 것은 무엇일까? 난 죽음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생각한다.
아무도 모르는 죽음. 자신은 평생 죽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외면하면서 잊고 사는 죽음.
지금도 가끔 죽음을 생각해 볼 때가 있다.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점점 나이가 들고 이제 주위에 친한 친구들의 부모님들이 한 분 한 분씩 돌아가시고 우리 부모님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느낌이 든다. 다음은 우리 부모님 차례가 아닐까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잦아졌다.
얼마 전 갑자기 생각도 못했던 지인 분이 칠순이라고 칠순을 기념하여 가족분들이랑 가족 여행으로 강릉에 여행 가셨다가 다음날 새벽에 혼자 산책 나가셨다가 혼자 한 새벽 산책에 외상성 뇌출혈로 중환자실에 입원해 계시다가 서울에 오시 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다. 사실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 늘 밝게 “크리스탈” 수정님 하시면서 말을 붙이셨던 기억이 내게 남아 있다.
어머님이랑 함께 살다 보니 나이 든 미래를 미리 사는 것 같다. 가끔 외출하셨다가 돌아오시면 팔순이 넘으면 사람 취급을 안 한다고...... 이 나이 되면 산에 누워있으나 집에 누워있으나 다 같은 거라고 또래분들이 지인들이 너도나도 입을 모아 말한다고 말씀하신다. 이제 죽을 일이 가장 큰 일이라고 말씀을 종종 하신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아~나이 드신 분하고 같이 산다는 것이 좋은 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나보다 앞선 세대를 사는 사람과 같은 공간에 산다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한다. 나이 드신 분께는 나이 든 사람 입장으로는 그것이 가장 큰 걱정스러운 것이니 자연스레 얘길 하시지만 젊은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 준우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 중에 하나가 죽음을 너무 일찍 알게 한 것이다. 어릴 적 위인전을 읽으면서 어느 날 "또 부모님이 돌아가시겠지" 해서 깜짝 놀랐다. 왜 위인전에 나오는 분들의 부모님들은 다 일찍 돌아가셨을까?
우리 집은 아들 준우가 태어나기 전부터 7마리 강아지들을 키웠다. 아이들이 나이 들어 명을 다해 하나씩 하늘나라로 가게 되었지만 준우는 너무 어렸다. 첫 번째 큰 강아지 말라뮤트 리치가 하늘나라 갔을 때 나는 중국에 여행을 가 있었고 준우는 유치원에 있을 시간이라 못 보았지만 시츄 아빠 강아지 건강이가 하늘나라 간 모습을 보고 대성통곡을 해서 너무 놀랐다. 내가 죽어도 저렇게 울지 않을 꺼라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이후 (아들은) 모든 강아지들이 하늘나라에 간걸 다 보아서 어린 나이에 너무 일찍 죽음을 알게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문뜩 문득 아~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그래도 때가 되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거 같은데 '남편이 죽으면 어떡하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해주는 남편이 없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 두려웠다?!
죽음 앞에서도 앞에서조차 참 사람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언니는 항상 외출할 때 집정리를 하고 나온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갑자기 자신이 사고로 하늘나라에 갈 수 있지 않겠냐고 그 말을 들은 후 나도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건도 그만 사고 정말 필요한 것만 두고 나눠주거나 버리고, 최소한 것만 최소한의 물건들만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며칠 전 밤에 책을 읽다 웃었더니 시크한 저기압의 아들 평소 다정한 구석은 없던 아들이 왜 웃냐고 물어본다.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주었다.
"곧잘 우울해지는 찰리브라운과 반대로 똑똑한 강아지 스누피는 유쾌하다. 고요한 바다를 지켜보던 찰리브라운 슬픈 생각이 밀려드는 것을 뿌리 칠 수 없다"
"스누피, 어느 날 우리 모두 죽을 거야"
멜랑콜리한 그의 말에 스누피는 발랄하게 대답한다
"맞아 하지만 다른 모든 날엔 살아 있잖아."
가끔 죽음을 생각하면 삶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죽음을 늘 생각하고 살지는 않지만 ‘메멘토모리’ 이어령 교수님 책에서도 다른 유튜브영상에서도 ‘메멘토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이 가끔 떠 오른다.
시간의 소중함을, 삶의 소중함을 기억하고 생활하길 바라는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시지로 ~생각되어 진다. 던져주신 메시지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보다 죽음이 공포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천국을 믿어서도 아니고 50년을 넘게 살아와서 그런지 돌아간다는 말처럼 담담하게 받아 드리고 들이고 아쉬움이 완전히 없을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아쉬움을 덜 남기고 싶다. '껄껄껄' 하다 죽지 말고 '~해볼 걸', '~가볼 걸', '~되어볼 걸' 하며 후회하는 삶 말고, 지금 살아 있을 때 힘겹지만 최선을 다해서 살고 살아낸 다음 마지막엔 평온하게 갈 수 있길 바라본다.
오늘도 다시 한번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기억하고 음미해 본다.
<메멘토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GM김수정
언제부터인가 계속 눈에 띄는 남자가 있었다. 어쩌다 우연히 들린 편의점에서, 퇴근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서, 친구와 저녁약속을 위한 레스토랑에서도 그 사람이 있었다. '저 남자도 알고 있을까? 우리가 이렇게 자주 마주친다는 걸?' 아마도 모르는 것 같았다. 실제로 한 번도 눈을 마주친 적은 없었으니까. 190센티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훤칠한 키에 깔끔하게 정리된 헤어스타일, 그리고 와이셔츠 위로도 느껴질 수 있는 느껴지는 탄탄한 근육... 아마도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는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람이 평범하디 평범한 나 같은 여자에게 관심을 가질 리가 만무했다. 말을 걸어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그 사람이 내 시야에 배경그림처럼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았다. 내 시야가 닿는 배경으로서 존재해 주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그러다 우연히 우리는 그 남자, 그 여자에서 우리가 되었다. 드라마에서만 일어날 것 같은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는 뻔한 스토리. 어떤 물건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중요하지도 않다. 그 사람의 따뜻하고 매력적인 미소만 기억에 남을 뿐이다. 그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너무 편안했다. 그 사람은 모든 것을 나에게 다 맞춰주었다. 영혼의 짝을 만나도 이렇게 잘 맞을 수 있을까 생각할 정도로 우리는 완벽했다. 그리고 결혼을 했다.
시어머님은 말씀이 많지 않으신 분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눈빛은 늘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가족이었다. 의사소통 하나 없이 우리 셋은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심지어 쉬고 싶은 타이밍까지 마치 한 마음 한 몸처럼 착착 들어맞았다. 싸울 일도, 의견이 어긋나는 일도 없었다. 너무나 나에게 최적화된 이런 결혼생활이 마치 미리 준비된 것처럼 완벽하게 들어맞는 나의 결혼 생활을 두고 친구들은 마냥 부럽다고 하지만 난 늘 불안하기만 했다. 느낌... 느낌이 안 좋다. 그의 눈빛도, 어머님의 눈빛도 맘이 편치 않았다.
샤워를 하는 중 화재경보가 울렸다. 분명 집에는 혼자였는데 경보가 울린 터라 부랴부랴 샤워를 마무리했다. 경비원 아저씨, 동네 아주머니들이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곧 잠잠해졌다. 대충 물기를 닦고 나와보니 뿌연 연기가 집안에 가득하다. 가스레인지 위에는 냄비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문밖에선 와이프가 내가 요즘 몸이 안 좋아서 실수를 했다며 연신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그 사람의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렸다.
'내가 그랬다고? 난 그냥 찌개가 먹고 싶다고 생각한 것뿐인데?' 매사가 이런 식이었다. 내가 생각한 건 모두 다 실행되는 뭔가 잘못된 현실. 이 집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더 굳어졌다. '어디로 가야 하지? 언제 도망처야 하는 거지?' 생각이 구체화될수록 그 사람에게 들킬까 봐 무서웠다.
눈을 떠보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잠옷 가운만 걸친 체 침대에 묶여 있었다. 집이 아니었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지하창고...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침대 위에 걸려있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그의 모습은 전혀 딴사람 같았다. 죽음의 공포로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알 수 없는 강한 힘이 그자의 손을 낚아채 나에게로부터 그자를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그자는 누구이고 어떤 상황인가요?)
"너에게 이런 짓을 허락한 적 없다!"
분명 시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목소리만으로 이 사람을 제어할 수 있는 거지? 도대체 이 사람들 나에게 원하는 게 뭐지? 내 맘을 읽는 건 그 남자가 아니었다. 나의 계획, 나의 생각, 나의 감정을 읽는 건 그 남자가 아니라 바로 그녀였다. 텔레파시인가? 그녀의 목소리는 아들에게만 들리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완벽했던 그 사람은 엄마의 도움 없이는 이 세상 그 누구와도 정상적인 소통이 불가능한 저능아였다. 그녀는 지금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아들에게 모든 걸 지시해 오고 있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나의 관심과 사랑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동물적 본능만 남아있는 아들과 이를 컨트롤하려는 엄마와의 거친 실랑이가 계속되는 틈을 타서 있는 힘껏 도망치기 시작했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중력의 힘에 이끌리듯 온 힘을 다해 내달렸다. 뒤늦게 따라온 남자의 짐승 같은 소리와 분노에 가득 찬 거친 몸짓이 먼발치에서도 보였다. 이제 나는 자유다.
<몇 년 뒤>
조용한 시골 공원밴치.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귀 밑까지 옷을 여민후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다. 아무 생각이 없다. 그 어떤 생각도 할 수가 없다. 이렇게 멍 때리며 자연이 나인 듯 내가 자연인 듯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멍하니 자연 속에 앉아 있다 보면, 어느 순간 '안전하구나' 싶은 느낌이 든다. 경쾌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젊고 예쁜 여학생이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다. 난 반사적으로 일어나서 반대편으로 재빠르게 걸어간다. 그러나 곧 여학생은 나를 잡아 세운다.
"당신이 겪은 일을 알아요... 내가.. 내가... 다 봤어요... 하지만 무서워하지 말아요. 난... 진짜 난... 그들과 틀려요. 달라요. 그냥 당신에게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어서 왔어요. 위로해주고 싶었어요."
더 이상 난 갈 곳이 없다.
<숨바꼭질> - 패미로얄
가을 하늘이 오늘따라 더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도록 맑다.
모르핀 약 기운이 돌아 잠시 정신을 차릴 즈음 숙희는 이불 밑 아랫목에 두발을 세워 발바닥 전체에 온기를 느꼈다. 창으로 들어온 햇살 한줄기나 방바닥의 따스함을 앞으로 몇 번이나 온몸의 촉각으로 느낄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올 때까지 약기운이 버텨주길 바라면서 그녀는 잠시 가라앉은 통증에 긴 호흡을 뱉었다. 자기도 모르게 “아휴” 하고 한숨이 섞인다. 앞으로 서너 시간 뒤면 닥칠 통증의 무서운 고통이 세포 하나하나를 세어가며 뒤덮을 것을 알기에 반짝 정신이 드는 지금,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베개 옆에 둔 노트를 펼쳤다. 며칠 전부터는 거동마저 불편해져서 앉아있지 못하고 옆으로 돌아누운 상태로 노트를 넘기니 글씨 쓰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며칠 전에 썼던 ‘살고 싶다’ 네 글자가 ‘가망 없다’로 마음에 와닿아 보였다. 갑자기 머리끝이 쭈뼛 서는 큰 공포가 몰려왔다. 병상에 누운 지 하루 이틀도 아닌데 새삼 죽음에 대한 생각이 무섭도록 소름 끼칠 때는 끼치는 이유는 비단 소멸될 육신에 대한 허무함만은 아니었다. 때문인 것은 아니었다. 새로 이사한 이층 집에서 알토란 같은 자식새끼들과 박서방이랑 잘 살 일만 남았다는 친정 엄마의 말이 허망했다. 그녀의 엄마가 죽을 끓이는지 구수한 냄새가 났으나 숙희는 식욕이 전혀 없었다. 죽 한 그릇도 무섭다 싶었다. 그들보다 먼저 가는 자신이 남길 것은 자기의 죽 그릇에 남겨진 슬픔이고 절망뿐이라 가족들이 느낄 아픔에 대한 미안함이 더 컸다. 숙희는 가까스로 힘을 내어 ‘미안하다.’라고 (노트에) 썼다. 눈두덩에 뜨거운 무언가를 얹어놓은 듯 묵직함이 느껴지더니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더 이상 거부할 수도 없고 삿대질을 하며 따질 때도 없는 막막함 앞에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그날에는 없었던 눈물이었다. 그 막막함의 벽에 서 있는 사람들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인정해야 함이 해야 하는 것이 몸과 마음이 분리되는 것보다 분리된다는 생각보다 훨씬 더 무서웠다.
‘고마웠다’라고 쓰고 나니 한차례 또 눈물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주저리주저리 여러 문장을 쓸 기력은 없어 그녀는 잠시 눈을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옆집에 큰 딸이 피아노를 전공한다더니 오늘따라 피아노 소리는 소리가 슬픈데도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찬란한 붉은빛의 저 낙엽들이 나와 함께 땅속에서 같이 할 수도 있으니 그리 외롭지 않겠지 위로했다. 40 평생 짧은 인생이나마 아등바등하면서도 순간순간 행복함을 위해 살았으니 이만하면 잘 살았고, 내일 신부님께 병자성사까지 받으면 본인의 영혼은 때 묻지 않은 새벽이슬처럼 영롱하고 순수해지리라 믿으며 그녀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옆집에 순이 엄마가 꾸어간 돈을 되돌려 받아야 한다는 집착도 없어졌고, 희미해져 가는 기억 자락에 남편과 새끼들 얼굴도 못 알아먹을까 두렵던 마음도 더 이상 공포라는 이름으로 자기를 아프게 하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며 묵주를 슬며시 집어 들었다. 아이들에게 가끔 매정하리만큼 엄격하게 했어도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며 키웠으니 짧지만 성공한 인생이었다고 자부했다. 긴 글을 남기고 싶었으나 한마디만 썼다.
‘사랑한다. 안녕’
그녀가 친정 엄마를 불렀다. 분명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지만 밝은 목소리를 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말했다.
“엄마, 오늘은 내 속옷 서랍이랑 화장대 정리 좀 부탁해.”
<이제 안녕.> pinkpen
넥플렉스에서 흥행 중인 "더 글로리"를 시청하면서 나의 학창 시절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지금은 외향적이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좋아해서 커뮤니티를 만들고 운영하고 있지만 나도 왕따,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다. 나도 모르게 더 글로리처럼 심각한 학교폭력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 당시에 어린 나이게는 공포스러운 시간이었다. '더글로리'만큼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며 나도 모르게 위로를 받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 당시 어린 나에게는 충분히 공포스러운 시간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에 나는 키도 작고 왜소한 편이었다. 편이었지만 학교 대표로 웅변대회도 나가고 글쓰기 대회도 찾아다니며 상을 받기도 했다. 학교생활에 적극적인 나에게 일어난 하루는 나의 성격을 바꿔 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큰 문제없이 흘러가던 학교생활이 나의 작은 실수 하나로 180도 달라졌다. 유행했던 남대문 지우개를 한쪽 면이 닳아 못생겨진 지우개를 보고 내가 짝꿍에게 "이거 000 집이야."라고 말한 것을 짝꿍이 000에게 전달했다. 일렀다. 그 지우개가 한 쪽면을 많이 써서 달았는데 그게 기분이 나빴는지 못생긴 지우개에 자기 집을 비유당한 그 아이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다. 쉬는 시간에 000가 나에게 와서 확인하고 몸싸움을 걸었다. 쉬는 시간 나에게 다가온 그 아이는 사실 확인을 하고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나는 별생각 없이 장난으로 한 말인데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더 황당했던 건 반 친구들이었다. 싸움을 말리기보다 000 이기라며 를 응원하는 모습이었다. 응원하기 시작했다. 큰 언니가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나의 큰 언니를 알고 있는 친구가 찾아가서 내가 맞고 있는 상황을 전해 언니가 와서 싸움을 말렸다. 이 시기에는 그 당시에는 학교폭력에 대한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해서 나도 선생님께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못했고 학교에서도 어떠한 조치도 없었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고 나는 학교 가는 길이 무섭고 괴로웠다. 피해자가 아이들의 수군거림을 눈치 보며 학교생활을 해야 했고 가해자는 당당하게 학교를 다니는 분위기였다. 당당했다. 활발하고 긍정적이던 내 모습은 사라지고 조용하고 어두워진 나를 보게 되었다. 나는 그 친구에게 왜 때렸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시간이 흐르고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나를 때렸던 친구를 동네에서 만났다. 우리 집은 고등학교 때 신도시로 이사했는데 이 동네 그것도 같은 단지에서 그 친구를 만날 줄이야… 나는 용기 내서 그 친구에게 말을 걸고 걸었고, 같이 차 한 잔을 마실 기회가 있어서 초등학교 시절에 있었던 일을 꺼냈다. 나에게는 잊히지 않은 일인데 역시나 그 친구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 친구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어서일까? 내 기억 속에 학교폭력이 크게 남아있지 않아서 다행이다.
여자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친한 친구 2그룹이 생겼다. 2그룹이 나를 포함해서 3명인데 내가 깍두기가 되어 잘 지내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 어느 날 한 친구가 왜 나만 그 친구들과 친하냐며 시비를 걸더니 나에게 한 방을 시원하게 날린 주먹에 제대로 맞아서 코피가 주르륵 내렸다. 난데없이 내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눈앞에 번개가 번쩍하더니 뜨거운 무언가가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흰 블라우스 교복이 피로 물들어서 친구가 빨아주고 빨리 말르라고 선풍기에 널어주었다. 수업시간 종이 치고 선생님이 들어오셨는데 선풍기에 걸린 교복을 보고 "저 교복 누구 거지? 누가 교복을 선풍기에 걸어? 빨리 걷어"라며 바로 혼내셨다. 나는 그날 친구에게 선방을 맞고 선생님에게도 혼난 슬프고 억울한 날이었다. 내가 만약 선생님이었으면 왜 그랬는지 물어봤을 텐데…
이번에도 초등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선생님에게 상의할 수 없었기에 선생님이나 학교에 도움을 받지 못했다. 다른 점은 친구들이 방관하지 않고 싸움을 말리고 나를 도와주었다.
소아정신과 의사 지나영 님이 학교폭력에 관해 유튜브로 라이브를 한 적이 있는데 하는 것을 본 적 있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괴롭히는 이유 중에 자신과 타인에 대한 가치를 존중해야 하는 걸 배우지 못해서 그렇고 상대가 약자로 보인 경우, 시기, 질투 등이 있다. 소아정신과 의사 지나영 님이 학교폭력에 관해 유튜브로 라이브 방송을 한 것을 본 적 있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괴롭히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것은 타인의 가치를 존중해야 함을 배우지 못한 경우, 상대방이 약자로 보이는 경우, 상대방이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된 경우였다. 피해자는 절대로'내가 부족해서 그런가?' '뭔가 잘 못 했나!'하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절대 피해자가 원인 제공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의 두 번의 악몽 같은 경험은 내가 잘 못 해서가 아니라 그 친구들이 신체적으로 작았던 나를 만만하게 보았고, 내가 친했던 친구와 못 어울린 질투심이었다. 악몽 같았던 두 번의 경험 모두 내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체구가 작았던 나를 약자로 생각했고, 친구관계에 대한 그들의 질투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지금이야 내가 어른이 되어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어렸을 적에는 내가 뭘 잘 못 했나! 왜 나를 괴롭히지!라고 원인을 나에게서 찾았었다.
학교폭력 피해자였던 내가 사회복지사가 되었다. 학교사회복지사를 꿈꾸며 청소년복지를 선택해서 중학교에 가서 학교폭력예방교육 강의도 하고 학교에서 벌점을 많이 받아서 오는 학생들을 5일~10일 인성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했다. 자퇴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검정고시 준비하는 대안프로그램도 운영했다. 여기서 만난 친구들 중에 학교폭력 가해자, 피해자도 있었는데 모두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었다. 학교가 싫어서 자퇴한 아이들이 교복을 만들어달라는 귀여운 제안도 하고 검정고시 날이 다가왔을 때는 자발적으로 야간자율학습을 하겠다고 했었다. 나를 엄마라고 부르며 스승의 날 연락하는 아이도 있었다. 지금도 대안프로그램에서 만난 아이들과 연락이 되는데 검정고시 합격해서 대학도 가고 대부분 결혼했다.
나는 내가 되고 싶은 꿈에 집중해서 학교폭력 피해를 극복했고 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 많은 청소년 아이들에게 진심 어린 관심과 사랑으로 대했던 것 같다.
<무심한 학교폭력 피해의 극복> 캐나다 아하
거울을 본다
이제는 새치가 아니라 흰머리라 불러야 할까?
세수를 해도 베갯자국이 남아 있는 왼쪽 볼
이 자국은 몇 시간이 지나야 사라질까?
미간에 11자 모양 주름은 언제부터 생긴 걸까?
노안이라 불리는 그놈이 내게 선물한 걸까?
영양크림을 듬뿍 바르고 있는 나를 본다
그리고 소리 내어 읽어 본다
‘피부 재생에 효과가 있습니다 ’
거울을 본다
피식 웃어 보며 혼잣말을 한다
너 늙었구나?
옷장을 본다
온통 어두운 색 들이다
좋아하던 청바지들은 어디로 간 걸까?
점점 커져가는 내 몸에 맞지 않아 숨어 버린 걸까?
옷장의 반을 채워버린 트레이닝 바지들이 나를 본다
그리고 소리 내어 읽어 본다
‘스판덱스, 실루엣을 만들어 드립니다 ’
옷장을 본다
또 혼잣말을 한다
너 이보다 더 커지고 싶은 건 아니지?
<매일의 소소한 공포> JAcKY
모든 사람이 주시하고 있었다. 내 주변을 둘러친 모든 사람들이 혐오와 공포가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나를 도와주려 하지도, 내 가까이 다가서려 하지도 않았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않았고 못 볼 것을 보기라도 한 듯 옆으로 비껴 서서 곁눈질로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나병이라고 했다. 누구에게서 전염되었는지 어디에서 옮겨 온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나의 병명은 나병이라고 했다. 병원에 간 것도, 의사가 진단을 내린 순간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나환자인 것은 기정 사실화 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나를 나환자촌으로 이송해야 한다고 웅성대고 있었다. 누구 하나 나를 차에 실어 그곳으로 옮기려는 시도는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내 앞날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란 말인가? 내 몸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 나병이란 병은 내 몸에 어떤 무서운 짓을 하는 병일까? 이렇게 갑자기 내가, 아니 내 인생이 송두리째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단 말인가… 왜? 내가 뭘 어쨌다고?...
어린 시절, 동네에 구걸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의 대부분은 나병환자라고 어른들이 그랬다.
어른 말을 안 들으면 망태기를 짊어진 할아버지가 우리를 잡아서 망태기에 넣어가거나 그 시절 지천에 널린 ‘문둥이’가 우리를 잡아가게 줘버린다고도 했다. 동네에 구걸하는 누군가가 나타나는 날이면 그 사람은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문둥이’가 되어버렸고 우리는 집을 향해 숨이 턱에 차도록 달음질을 쳤다. ‘문둥이’는 그렇게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었다. 도대체 그들 때문에 한시도 마음 편히 놀 수가 없었고 없었다. 늘 주변을 살피며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여차하면 뛰어서 집으로 도망을 쳐야 했으니까.
그런데 지금 내가 그 나병에 걸린 나환자라는 것이다. 저들이 모두 두려워 접근조차 하지 않는 나환자, 그게 내 현실이었다. 요즘은 약이 좋아서 나을 수 있는 것일까?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왜 아직도 나환자 격리촌이 필요한 거냐고…. 그렇다면 격리촌이 아직 있을 리 없을 테니.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한여름인 데도 나의 온몸에는 피가 말라버린 듯 냉기가 돌았다. 가슴이 서늘하다 못해 얼어버린 것 같았다. 숨도 쉴 수가 없었다.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자각에 이르자 나를 땅 속으로 밀어 넣을 것만 같은 절망이 내 온몸과 마음을 내리눌렀다.
시간이 흐르면서, 온 마음으로 부정하고 싶던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나는 나환자다. 사실을 받아들이고 다음에 다가올 상황에 적응해야 한다.
내가 나환우 격리촌으로 이송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가라앉히며 숨을 크게 들이마신 순간 나에게는 다른 하나의 폭풍같이 밀려드는 공포가 있었으니, 그것은 내 몸 이곳저곳이 일그러지고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다. 또 하나의 공포가 밀려들었다. 그것은 내 몸이 일그러지고 결국 사라질 것이라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나환자가 되었다는 그 청천벽력 같은 사실보다도 더 끔찍하고 충격적인 공포는, 언제 나오게 될지 모르는 그곳으로 떠나는 순간, 격리촌으로 이송되는 순간, 나는 내 사랑하는 가족들과 생이별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가족과 분리되는 것이 나에게 가장 큰 공포임을 생애 처음으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차라리 벼락이라도 떨어져 지금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것은 처절하고도 절망적인 공포였다. 등짝이 식은땀으로 젖고 한파 속에 옷을 벗고 서있는 듯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여보, 여보, 왜 그래? 또 꿈꾸었구나?”
걷어차 내버린 이불을 끌어 덮어주며 어깨를 다독다독 두드리는 남편 쪽으로 돌아누우며 나는 깊은 한숨을 천천히 몰아 쉬었다.
<나에게 가장 큰 공포> 빵굽는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