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오리엔테이션 시작을 몇 주 앞두자, 본격적으로 학생들끼리의 소셜라이징이 시작되었다.
360명의 모르는 사람들과 수업을 듣기 전, 아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만들어두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 입학생들끼리 사용하는 슬랙에서도 하나 둘 소규모 모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반 개념으로 나누어진 Block 내에서도 같은 블락끼리의 Block Happy Hour 를 가지기 시작했다.
사실 가장 먼저 열린 모임은 내가 주최한 모임이었다.
바로 Wine Gathering!
와인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모아 우리 아파트 선덱에서 함께 와인을 즐겼다.
총 8명의 친구들이 왔는데 비교적 소규모 모임이다보니 한 사람 한 사람 더 깊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냥 취하기 위한 술자리가 아니라 '좋은 와인'을 BYOB로 한 병씩 가져와서 소개하고 음미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더 좋았던 것 같다. 언제나 놀라운 와인의 힘!
하지만 인당 1병을 먹다보니 결국 끝에는 취하고 말았다... 그거 하나만큼은 좀 후회되지만 그 외에는 너무 좋은 친구들도 만나고 참 갖길 잘했다 싶은 자리였다.
두 번째 소셜라이징의 기회는 바로 Stern Hamptons Trip!
작년에 이어 올해에 두 번째로 가게 된 햄튼여행은 입학생들이 자체적으로 주최하는 행사였다.
오리엔테이션 기간 동안 근교나 다른 학교로 여행을 가는 다른 몇몇 학교와는 달리 NYU Stern에는 따로 그런 프로그램이 없는데, 아마도 학기 시작 전 순수하게 즐기며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경험을 만들자는 뜻에서 생기게 된 것 같다. (사실 CBS에서 먼저했는데 따라했다는 거 같기도 함 ㅋㅋㅋ)
너무 비싸기도 하고 해서 애들 많이 안 가면 안 가려고 했는데 약 100명 정도가 신청했다고 한다. 거의 1/3에 가까운 숫자.... 결국 FOMO를 이기지 못해 참가를 신청했다.
프로그램은 간단하다.
배정된 집에서 술 - 다른 집에 놀러가서 술 - 해변에서 술 - 바에 가서 술 - 술게임 - 풀에서 술.....
그냥 술술술!!!!!! 대학교 MT를 생각하면 되겠다.
차이가 있다면 밥도 제대로 안 먹고 술을 마신다. (한국에서는 고기라도 제대로 구워먹지...)
이걸 3박 4일을 하다니.... 얘들아 나의 간은 그렇게 싱싱하지 못해 ㅠㅠㅠㅠ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햄튼 트립은
8할이 고통, 1할은 좋은 인스타 사진감, 0.9할은 그 와중에 좋은 사람들 만나는 기회, 0.1할이 즐거운 추억 정도였던 것 같다... 사진은 참 행복해보인다만 ㅋㅋㅋ
근본적인 어려움은 물론 영어였다.
첫 날은 그런대로 할 만 했는데, 술이 들어가고 그 다음날 hangover 를 이겨내며 영어를 하려니 정말 쉽지 않았다. 뇌가 안돌아가서 한국어도 안 나올판인데 아침부터 밤까지 숙식을 함께 하며 영어를 듣고, 말하자니... 말 걸 지 말아주겠니 엉엉
두 번째 어려움은 술이었다.
평균 나이가 어려서 그런가.... 어떻게 이렇게 술을 잘 마시는건지 모르겠다.
둘째날은 아침 점심도 거르고 술을 마셨는데 결국 술병이 나서 그 날 저녁 스케쥴은 아예 스킵했다.
셋째날도 9시쯤 만취해서 들어감 ㅋㅋㅋㅋㅋ 어휴 한 때 박술녀였던 나 어디갔는지 모르겠다. 나이가 웬수...
세 번째 어려움은 우리와는 다른 문화.
한국에서는 그룹이 정해지면 그 사람과 꽤 대화를 나누고, 대화 주제가 맘에 들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들어주고 정 안되면 핑계라도 만들어서 예의를 차리며 자리를 옮기는데, 미국은 정말 그런 게 없다. 대화를 몇 분 나누지도 않고 대화가 재미없다 싶으면 금방 일어서서 자리를 옮겨버린다. 가차없음. 더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려고 그러는 걸수도 있고.... 대화 상대가 바뀌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첫 날에는 정말 진이 빠졌다. 나는 이 사람들의 이름을 알아가고 페북 친구를 맺기위해 여기에 온 것인가...
프로그램도 따로 없다보니 그냥 하루 종일이 어떻게든 어딘가 들어가서 대화에 껴야 하는 서바이벌이었다. 그러다보니 한 시도 마음이 편할 새가 없었다. 4명이서 대화를 나누다가 그 중에 3명이 대화의 주가 되면 나머지 1명은 챙기지도 않는다. 역시 가차없음. 어떻게 대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하더라도 조금만 재미 없으면 얘는 또 다른 그룹을 찾아갈테고, 그럼 또 나는 내가 낄 수 있는 그룹을 찾아서 뭐라도 말하면서 들어가야겠지... 무엇보다 지금 나에게 너무 친절하게 웃어주고 있더라도 언제 일어나서 갈 지 모른다는 게 참 ㅋㅋㅋㅋ 에너지 소비가 상당한 일이었다.
네 번째 어려움이자 가장 컸던 어려움은 바로 사람. 위의 문화적 어려움을 배가 시키는 요인이었다.
그간 학교에서 진행한 설명회나 소규모 와인 모임에서 만났던 친구들이 하나같이 너무 좋아서 그런 사람들만 있을거라고 나도 모르게 기대를 했었지만 역시 그렇지는 않았다. 엘리트주의가 강한 친구들도 일부 있었고, 무엇보다 은근히 백인끼리만 모여 노는 그룹이 있었는데 그 부분이 가장 힘들었다. (그들이 바로 우리 집에 있었기 때문에...)
예를 들어 밖에 나가서 둘러앉는데 은근히 자리 배치를 자기들끼리만 앉을 수 있게 해놓는다거나 (원을 닫아버림 - - ) 풀장에서 놀고 있을 때 동양 사람들이 풀장에 가면 갑자기 하나 둘 풀장에서 나와서 갑자기 자리를 옮긴다던가. 같은 얘기를 동양애들이 하면 무시했다가 그 그룹에 있는 백인 친구가 얘기하면 갑자기 엄청 적극적으로 반응한다던가. 처음엔 설마 내가 오해하는거겠지.. 했다가 시간이 갈 수록 명확해졌다.
재밌는 것은, 그 그룹에 있는 친구들도 어쩌다가 혼자 있는 상황이 되거나 하면 갑자기 다가와 말을 걸고 훨씬 더 친절하게 변한다는 것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관계... 이것이 냉정한 미국 소셜라이징의 세계인가 싶다.
+이후 여행이 끝나고 오빠랑 얘기하면서 생각해보니 미국에 Fear of missing out 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러한 자리들도 Let's all have a good time 같은 열린 태도라기보다 '내가 조금이라도 이 사회에서 높은 위치의 그룹에 속해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알아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들을 알아야 하는데' 따위의 두려움에 기반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마 모두가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힘들었겠지...
여하간 이런 여러 요소들 때문에 에너지소비도 많고 스트레스가 너무 커서 아침마다 방을 나서기 전에 30분씩 명상을 해야 했다. 결국 햄튼 여행이 끝나고 돌아와 맨하탄 땅을 밟자마자 힐링 시작. (원래 그 반대여야 하는 거 같은데) 그래 햄튼은 나랑 안 맞았어.... I had enough!
피로가 너무 컸기에 안 좋은 이야기만 쏟아낸 것 같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것은 당연히 아니다.
사실 더 많은 사람들이 성숙한 태도로 새로운 문화, 새로운 사람들을 진심으로 알아가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뒤로 갈수록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유의미한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영어야 여전히 어려웠지만 적어도 마음은 편했다! 나도 누군가를 챙겨주고 다른 사람도 나를 챙겨준다는 느낌이 드는 최소한의 '의리'가 있는 사람들.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의견에 관심을 갖고 배워가려는 사람들.
그 와중에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다니 다행이고 참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학기 시작에 대한 걱정은 여전하다.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빡빡하게 채워진 오리엔테이션 기간 동안 오빠도 없이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우리 블락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을지, 그리고 그 안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영어는 어떻게 할지.....
걱정을 덜기보다 안고 온 여행인 것 같아 참 생각이 많지만
어떻게든 시간은 지나고 힘들겠지만 이겨내겠지....
스스로야 힘내보자.
"I'm not telling you it's going to be easy.
I'm telling you it's going to be worth 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