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산을 넘은 후 생기는 고민
예전에 MBA 1학년으로써 2학년을 만나면 항상 인턴십 경험이 어땠냐고 물어보곤 했는데, 그 중 기억에 남는 대답이 '어느 시점에 물어보냐에 따라 대답이 달랐을 것'이라는 답변이었다. 그 땐 그냥 인턴십에 굴곡이 있었나보다.. 하고 별 생각 없이 넘어갔는데 지금 내가 정확하게 그런 상황인 것 같다.
3주차 팀 전체 발표 이후 나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큰 마일스톤은 지난 주에 있었던 VP와의 미팅이었다. VP는 내 매니저보다도 높은 우리 조직을 이끌고 있는 사람이다. 바로 위가 CPO.. 솔직히 처음에는 가볍게 조언이나 듣는 자리이겠거니 했는데 매니저가 그 시간 동안 내 프로젝트 발표를 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바람에 좀 더 부담스러운 자리가 되었다.
높은 사람이랑 만난다는 것도 부담되는 요인이긴 했지만 더 큰 건 전체 미팅에서 관찰한 그의 성향 때문이었다. 날카롭고 직설적인 질문들을 끊임없이 하는 스타일이라 (법조계 출신이라는 데 진짜 변호사가 심문하는 느낌 ㅋㅋ) 그 부분이 특히 걱정이었다. 나올만한 의문들에 빠짐없이 대비해야 한다는 점이..
여하간 이전 발표는 아무래도 비교적 가벼운 분석만 포함되어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유저 인터뷰도 하고 거기에서 나온 가설들을 검증하는 형태로 여러 인사이트를 찾아나갔다. 처음엔 뭐라도 흥미로울 거 같다 싶은건 무조건 분석을 해서 집어넣었는데 나중에 가서는 할 얘기만 너무 많고 전체 스토리가 도무지 정리가 안되는 바람에 매우 멘붕이었다. 그 와중에 매니저는 거의 3.5주간 자리를 비운 상황이고, 매일 저녁 한국이랑도 소통하며 처리해야 하는 일이 생기는 바람에 정말 쉬는 시간 없이 약 1-2주를 보냈다. 그 와중에 리딩해야 하는 다른 미팅들도 있었는데 링글로 준비할 시간 따윈 없고.. ㅠㅠ 진짜 뇌가 휴식을 못하니까 나중에 가서는 미팅을 하는데 말이 너무 안 나와서 미팅 끝나고 나 자신이 답답해서 눈물이 터져나왔다. (영어 너 대체 왜이렇게 안 느는거야....!!!!! #&*@&(ㅃ#ㄲ 대충분노)
하지만 그런 우여곡절 끝에 그래도 80장이 넘어가던 슬라이드를 하나의 스토리로 잘 정리하는 데 성공했다. VP 반응도 좋아서 원래 25분, 1회였던 미팅이 45분, 30분 2회로 늘어났고 매니저도 미팅에 같이 참여해서 내 분석과 제안에 힘을 실어줬다. 끝에는 그래도 'Hope to see you back!' 이라는 얘기도 듣고... 매니저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고.. 정신적으로 고생한 몇 주였는데 좋은 피드백을 듣고 나니 또 엄청 뿌듯하기도 했다.
신기한 것은 중간 중간에 너무 지친다 싶을 때마다 매니저가 어떻게 아는지 미친 타이밍으로 당근을 줬다. 밤 중에 이런 슬랙을 보내질 않나.. (이 디테일한 칭찬 수준을 보라.. 칭찬은 이렇게 하는 거라는 예시로 나와야 할 듯) 여하간 정말 7월 한달은 부담감과 뿌듯함의 롤러코스터였다.
"I am so impressed with your work Claire, seriously. I love two things. 1. The depth you went into. I provided you some guidance with *** but you went very deep in mapping that to our users, understanding their profiles/behaviors and use cases and connect that back to the framework. 2. The marketing and product sense you have. I love all of the ideas you brought up whether on the marketing side but product too. You are also able to break that down into feasible things short term but also longer term."
여담이지만 그간 인턴십에서 놀란 점이 있다면 오빠가 일하는 아마존도 그렇고 내가 일하는 어도비도 생각보다 인터내셔널들에게 굉장히 열려있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우리 학교보다도 더 다양성이 존중되는 느낌. 내가 영어가 부족해도 영어에 집중하는 사람이 정말 1도 없는 것 같다. 표정하나 안 찌푸리고 내용 자체에 엄청 집중해서 대화해준다. 아마존에서는 거의 모든 대화가 사실상 문서로 일어나니 더욱 그렇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커뮤니케이션은 해야하니까 영어가 안되면 나 자신이 답답하다. 그리고 향후 리더로 성장하려면 결국 영어는 극복해야하겠지만. 여하간 이 부분은 놀라운 점 중 하나였고, 조직을 만들거라면 꼭 배우고 싶은 점 중 하나였다.
Anyway, 어느덧 인턴십도 반을 지나 남은 날보다 지난 날이 더 많은 시점이 되었다. 요즘엔 내가 이 일을 진짜 Full-time 으로 하게 되면 어떨까에 대한 고민이 슬슬 생겨나고 있다.
이번 여름 프로젝트는 정말로 내가 딱 원했던 경험이었다. 데이터 분석도 많이 했고, 그동안 팀원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흥미로운 인사이트들도 던질 수 있었고, 프로덕트니 마케팅이니 아무 제한없이 마음껏 아이디어를 낼 수 있어서 정말 너무 재밌었다. 지금은 그 중 몇 개 아이디어의 실행도 하고 있고.. 완벽한 풀세트였다. 하지만 정작 실제로 일을 하게 되면 분석은 리서처에게 맡기고, 제품은 제품 팀에 맡기고 그로스에 한정된 implementation 만 하게 되는 거 아닌가 싶다. 또한 기대보다는 제품 팀과의 협업이 더 어려운 것 같아서 그 부분도 좀 아쉽다.
특히 스타트업에 있다가 대기업에서 일하려니 각종 프로세스에 대한 답답함도 크다. 반나절 만에 보내고도 남았을 사소한 이메일 캠페인 하나도 각종 사람을 거쳐 2-3주나 지나서 나올 수가 있으니.. 매니저는 어도비 내에서는 우리 조직이 가장 빠르다고 하고, 속도도 더 빠르게 바꿀 수 있다고 말하기는 하는데 흠........ 그 부분은 정말로 여전히 걱정이다. (이런 시스템의 장점도 있겠지만 내 스타일이 아닐 뿐..)
난 우리 제품이 너무 좋고, 우리 조직의 중요성이나 비전에 정말 마음깊이 공감하는데, 정말로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핵심에 빠르게 기여하고 싶은 답답함이 큰 것 같다. 과연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조직일까?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위치일까? 남은 한 달은 몇몇 그로스 아이디어를 실행해보면서 정말로 여기서 일하게 되면 어떤 경험일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