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 베스트셀러 Educated
동료의 추천으로 읽게 된 책, 배움의 발견(Eduacated)는 정말 오랫만에 맛보는 경영/자기계발/영어공부가 아닌 순수한 독서의 경험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이야기에 사로잡혔다. 뜻하지 않은 내 과거의 거울 같은 이야기였다.
극단적인 모르몬교 신자로 병원과 정부를 불신하며 세계 종말에 대비해 벙커를 짓던 타라의 아버지는 꿈같이 아마득하던 나의 어린 시절을 다시 마주하게 했다.
나의 아버지는 독특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마흔 살에 죽을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아 무엇에도 열심이지 않았던 사람. 마흔이 지나고는 줄곧 자신이 암에 걸렸다고 굳게 믿었던 사람. 은행을 믿을 수 없다며 돈을 땅에 파묻고, 전쟁이 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지하 벙커를 준비하던 사람.
그에게 지배받던 어린 시절 동안 나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기억을 잘 하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 특히 집 안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래서 그 시절의 많은 것에 대해 내 기억은 희미하고, 파편적이고, 불완전하다. 그저 이미지로 남아있는 장면들이 더 많다. - 바닥을 나뒹굴던 가구들과 구겨진 지폐들. 깨진 유리창, 이불 안에서 잠든 척 하던 밤들, 추운 밤 옥상에서 쳐다보던 달, 나를 안에 두고 닫혔던 옷장.
군인처럼 아이들을 다루기를 좋아했던 그의 지배에 따라 자녀들 넷은 매일 집합했고 얼차려를 받거나 매번 한 두시간을 넘어가는 긴 설교를 듣거나 이유를 알 수 없는 군기잡이의 대상이 되곤 했다. - 살 빼자며 아파트 단지 뺑뺑이를 돈다거나 아빠가 라면을 먹는 동안 옆에서 계속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어야 한다거나 하는 - 그런 시간이 끝나면 억지 웃음과 함께 <사랑해요> 하며 아무 문제가 없는 척 포옹하고 헤어지는 순간들의 반복이었다.
단순히 알콜 중독이나 가정 폭력이라는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 그의 영향력은 한 때 나와 우리 가족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군림했다.
타라의 아버지도 잘못된 믿음으로 가족들을 고통이나 위험에 빠뜨리곤 했지만, 타라는 그것들이 사랑에서 비롯했다고 믿는 듯하다. 하지만 그녀와 달리 나는 내 아버지가 나를, 우리를 사랑했는지에 대해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에게 논자 맹자를 논하며 '자신이 옳다고 믿는' 뭔가를 가르치려고 했으니 우리를 사랑했던 걸까? 하루 한 권의 영어 책을 외우지 않으면 잠도 재우지 않고 우리를 길렀으니 우리를 사랑했던 것일까? 만약 그랬다 하더라도 그 사랑은 어딘가에서 길을 잃어 나에게 전달된 적이 없다.
나의 어머니는 별개로 보면 다정하고 현명한 어머니었지만(그리고 지금은 매우 존경스러운 어머니지만), 적어도 당시에는 타라의 어머니처럼 아버지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했다.나는 엄마를 원망하지 않지만, 종종 엄마가 <그래도 너한텐 제일 덜 그랬어> 라는 얘기를 할 때면 마음 속으로 소리내어 외치고 싶었다 <그렇다고 내 아픔이 작아지는 건 아니에요>
아닌게 아니라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나는 나를 어린 시절 내내 자책해왔다. 머리로는 옳지 않다는 걸 아는데 왜 더 용기를 내어 이 부당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할까. 왜 다른 가족들을 보호할 수 없을까.
숀 오빠가 팔을 휘고 몇 변이고 변기통에 타라의 머리를 처박을 때, 분노하면서도 결국은 그의 말을 따랐던 글쓴이 타라의 이야기 - 그 이야기들에 나는 동질감을 느끼고, 그 누구에게 받았던 위로보다도 더 깊은 위로를 받는다. 그래, 누구에게나 그런 상황에서 벗어날 용기는 쉽지 않아. 피해자에게 곧바로 벗어날 용기가 없었다고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다보면 벗어나는 순간도 분명히 온다.
교육은 타라를 구원했듯이, 나를 구원했다.
대학에 가고 다른 곳으로 떠나 새로운 직업을 잡으면 이 곳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한 줄기 희망이 나를 지탱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대학 선택이라는 반항을 끝으로 (아버지는 학비를 명목으로 부산에 있는 대학에 나를 보내려고 했지만 장학금을 받겠다는 다짐으로 서울로 온 것은 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이었다) 그 꿈은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수많은 시도 끝에 우리 가족은 마침내 그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Long story short - 어느덧 나의 매일은 그 때의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하고 밝다.
옛날의 일기장들은 다 잃어버려서 나는 타라처럼 우리의 이야기를 책으로 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그 순간들을 떠올리면, 자욱한 안개 속을 보는 것처럼 까마득하게, 때로는 다른 사람의 일처럼 느껴진다.
마치 어느 전생에선가 내가 겪었던 일인 것만 같이 그 때 장롱에 숨어있던 나는 죽고, 지금의 내가 태어났다.
비록 그 변화는 한 번에 오지 않았지만 마침내, 왔다.
아주 조금씩 수많은 넘어짐과 실패를 반복한 끝에 마침내, 왔다.
지금 누군가 그 안개 속에 있다면 이 책, 혹은 이 글이 그런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당신은 스스로를 구할 수 있다.
변화는 느릴지라도 반드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