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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영 Mar 03. 2019

두려움이 형성되는 과정

그리고 역으로 두려움을 타파해보기  

만 33세가 된 겨울, 드디어 나는 생활 운전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지금 면허를 딴 것은 아니다.
면허는 사실 고등학교 친구랑 나란히 필기시험을 보았을 정도로 일찍이 땄었지만 - 그 이후로 운전은 항상 나에게 멀고도 먼 영역이었다.

매장들이 인천에 생기고, 하남에 생기고... 하남에 하나가 더 생기고 할 적에는 이동시간이 거의 편도로 2시간씩 걸리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스타필드를 오픈한 '17년도 이후 한 동안은 꽤 자주 갔었는데 만 2년 동안 계속해서 남의 차 얻어 타기와 대중교통으로 왕복을 잘하고도 다녔다.

운전을 이렇게 오랫동안 미루게 된 것은 순전히 두려움 때문이었다.
몇 년 동안 안 하던 운전을 하려고 할 때마다 사고 날 뻔 한 순간, 혹은 실제로 사고가 난 순간들로 인하여 "나는 운전과 안 맞는 사람"이라는 주홍글씨를 스스로 새겨버린 것이다. 이런 주홍글씨는 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산에서 첫 프로젝트를 판교에 배정받았었다. 지금은 신분당선이 잘 깔려있지만, 바로 그 신분당선을 까는 프로젝트였어서 2010년 초에는 판교까지 가는 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선배의 차를 계속해서 얻어 타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출퇴근 시간이 같이 묶일 수밖에 없는 점이 죄송스러워서 당시 아버지의 차로 한번 판교까지 연습주행을 떠나게 되었다. 20살에 운전면허를 따고 만 5년 동안은 무운전경력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태우고 판교를 다녀오는 길은 처음에는 순조로웠던 것 같다. 하지만 도시 고속도로의 출구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나는 아주 급하게 차선을 변경하였고 아버지는 크게 화를 내시며 '우리는 방금 죽다 살아났으며 이제부터 나는 하느님을 믿어야겠다'며 진심으로 종교에 귀의하겠다고 이야기하셨던 것으로 보아 (하지만 지금도 무교로 살고 계심), 무언가 크게 위험했던 순간이 있었던 것 만 기억에 남았다. 아버지는 이제 너는 운전을 (평생)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면서 그날의 운전 교실은 마무리되었고, 그 날 이후 나는 운전과 한차례 멀어졌다.

두 번째 시도는 결혼한 뒤 연휴 때였다.
설이었는지, 추석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잠실에 살았던 시절 고수부지로 차를 갖고 나갔다. 서울에 차가 없는 연휴였지만- 더더 안전하게 저속 주행을 할 수 있는 고수부지로 나갔다.

남편이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서 나와 자리를 바꾸었다. 운전자 석에서 벨트를 매고 기어를 바꾸며 D에 놓고 좌회전을 하며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순간....! 나는 차를 쳐버렸다. 정말 주차장을 나온 지 3초 만에 생긴 사고였고, 나는 엑셀도 밟고 있지 않았고 차는 정말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는데 나는 너무나 당황하고 오랜만에 운전을 해서인지 브레이크를 재빠르게 밟지도 못했다. 오래된 소나타의 문을 서서히 들이받고 나는 나가서 운전자들에게 사과를 하고 돌아와서는 한없이 당황해서 아라한테 전화를 했던 기억이 난다. 남편은 처음에는 어이없어서 웃다가 나중에는 화를 냈다. 왜 나가자마자 갑자기 차선을 뛰어넘어 좌회전을 하고, 사고를 낸 이 순간에 왜 갑자기 친구한테 전화를 하냐며. 지금 그럴 타이밍이냐며. 사실 나는 가장 당황하고 난처했던 순간이고 그 순간의 기억을 빠르게 해소해야 한다는 마인드의 안전장치(?)로 아라한테 전화를 건 것도 같다.

두 번의 사건 이후로 가족들은 나에게 운전이 맞지 않다고 점지은 것 같고, 이후 연휴 때 한강 고수부지에서 3초 만에 사고를 낸 내 이야기는 가끔 안줏거리로 소비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가 운전을 하면 사고가 낼 사람이라고 강력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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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두려운 게 많지 않다.
살아있는 동안 아프거나 기력이 없는 것은 두렵지만, 죽음은 두려운 적이 없다.
맛있는 걸 많이, 돈 생각 안 하고 먹을 수 있으면 좋을 정도로 부자였으면 좋겠지만 당장 돈이 떨어지는 것이 두렵지는 않다. 사람을 만나는 거나 거절당하는 것 또한 두려운 적이 없었다 - 그가 어떤 지위에 있는 사람이든 막론하고.

반면 내가 두려운 것들은 - 운전.
코뼈가 부러진 뒤로는 코에 크게 무엇을 맞을까 봐 잠시 동안 두려워한 적이 있다.
우리 조직의 아끼는 사람들이 떠나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내가 하는 행동이나 말들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거나 아프게 할까 봐 두려웠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의 공통점을 한번 생각해보았다.

1) 실패의 경험이 1-2번 정도 있다.
2) 그 실패의 경험 때 "이 실패는 나의 성향에서 어느 정도 기인한 것이다"라는 판단을 할만한 근거를 갖게 된다.(주로 가까운 사람들이 나에게 하는 이야기인 경우가 많으며, 가까운 사람이 준 피드백이기 때문에 더 진실이라고 강화해버린다.)
3) 다시 시도하려고 할 때에는 이미 스스로에 대하여 어느 정도 주홍글씨를 갖고 있다.
4) 다시 시도할 때 작게 실패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 "역시 나는 안돼”라고 주저앉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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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작년 여름, 어른 사람이 운전을 못하면 독립성이 계속해서 제한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역시나 즉흥적으로 운전 연수를 신청하게 되었다. 연수를 신청한 다음날 바로 첫 연수를 받게 되었는데, 아직도 긴장해서 손에 땀이 계속 나고 어깨가 아팠던 나를 기억할 수 있다. 합정동의 좁은 골목을 벗어나는 데에는 한참 걸렸고, 연수를 시작하기 전에 친구에게 "이제 연수를 시작하는데 무사하게 끝나게 해 줘"라고 카톡을 남겼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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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 선생님은 과묵하고 침착한 사람이었다. 어떠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당황하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리고 나에게 꽤 운전을 잘한다고 이야기를 했고, 더 난이도 높은 코스를 많이 알려주고 싶어 하셨다. 이런 선생님의 반응에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스스로 조금씩 자신감을 형성해보고자 했다. 어디 어디까지 다녀왔는지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어떤 점들이 어려웠고 어떤 점들은 생각보다 쉬었는지 이야기했다. 남편은 선생님이 돈 받고 가르쳐주는 강사이기 때문에 입에 발린(?)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나는 선생님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고는 믿기로 했다. 그리고 꾸준하게 생활 운전을 할 수 있도록 - 없는 재정에 차를 구매하게 되었다.

올해 1월 20일쯤 차가 나에게 왔다. 나는 김포, 일산, 인천, 하남을 혼자서 누빌 수 있었다. 서래마을의 좁은 골목에서도 한번 주차를 했다. 어제는 처음으로 길거리 아무 곳에나 주차를 했다. 아직 완전 장거리를 뛴 적은 없지만 올해에는 국내 여행도 여기저기 다니고 싶다.

사실 아직도 운전은 조금 두렵고, 불편하다. 김포까지 혼자 나가려고 했던 날에는 전날에 내비를 수없이 켜서 길 시뮬레이션을 보았다가도 다음날 아침에 눈이 와서 길이 얼었을까봐 쉽사리 포기하려고 했다. 아직도 시내에 나갈 때에는 지하철이 대부분 더 빠르기 때문에 지하철을 애용한다. 종각, 신도림, 강남 세곳을 이동해야 하는 날에도 아직까지는 피곤하더라도 지하철에 몸을 기대게 된다.

그래도 나는 일단 생활운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운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다.

이 과정을 돌이켜보면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 두려움을 형성했던 과정을 똑같이 반대의 과정으로 밟아가는 것이 가장 쉽다.

1. 작은 성공의 경험을 1-2번 한다.
2. 내 스스로 갖고 있었던 '나는 실패할거야'에 대한 인식을 없애 줄 조력자를 만난다. 스스로의 실력을 잘하는 주변사람과 비교하기 보다는 전세계 단위로 Zoom-Out 해서 생각해본다.
3. 조력자의 조언 혹은 스스로를 Zoom-Out 시켜서 바라본 객관적 시각을 갖고, 주홍글씨를 작은 성공들의 점으로 지워나간다.

차를 산 뒤에도 같은 선생님께 연락을 해서 운전 연수를 받았다.
선생님은 어떤 순간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으시고 내가 하는 실수에 대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라는 것을 항상 강조해주셨다. 심지어 브레이크 밟아야 할 때 엑셀을 밟았을 때에도...


넓게 보면 세상에 그렇지 않은 일이 무엇이 있을까.
내가 운전 초보일 때 하는 실수는 실제로 치명적인 실수들인 것들이 많을 수 있지만, 넓게 보았을 때 전체 운전자들의 실수들과 쭉 나열해보았을 때에는 귀여운 실수인 것들이 많을 것이다. 초보 매니저로써 팀원들에게 주었던 좋지 않았던 영향은 돌이킬 수는 없어 아직도 반성되는 것이 너무나 많지만 - 아주 넓게 보아 전세계 매니저들을 쭉 줄새웠을 때 정말 내가 평생 좋은 매니저가 될 희망이 없는 정도일까? 라고 생각하면 그 정도는 아닐 것이라고 믿어본다. 코뼈가 부러진 운동을 다시 재기하긴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넓게 보았을 때 농구를 하다가 뼈가 부러진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 라고 따져보면 정말 내 주변에만도 약 25%의 비율로 심각한 치명상을 입었던 기억이 난다. 얼마나 많은 농구족들이 어깨 탈골 혹은 인대 파열을 경험했던가.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자기 객관화,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넓은 시야를 갖게 되면 두려움을 해소하는 것도 쉬워질 수 있다. 실패를 타파하는데 도움을 주는 (나같은 경우의 운전 쌤) 조력자가 필요 없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말랑말랑하고 어린 나이에 형성된 자신만의 주홍글씨는 꽤 오랫동안 강화되었기 때문에 극복하려면 꽤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다행히도 나는 두려워하는 것들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준 조력자들을 만날 수 있었고, 지금은 보다 안정적으로 나 스스로를 객관화해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다시 한번 연수 선생님께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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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라는 한 명 한 명의 개개인을 규정짓는 것은 정말 수만가지의 특성(Trait)의 조합이다. 그 특성 별로 우리는 아무리 가까운 사람과도 거리감이 있는 위치에 지정되어있을 수 있으며 - 그 특성의 선 상에서는 서로 너무나 다르게 인지될 수도 있다. 그런 경우 "너는 XX한 사람이야." 혹은 "너는 너무 XX해"라고 단정적인 말들을 상대방에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위의 단정에 숨어있는 것은 "너는 나에 비하여 XX한 사람이야" 혹은 나아가서 "너는 내가 너에게 기대하는 것에 비하여 XX한 사람이야" 일 것이다. 아무리 그런 단정을 들어도 세상에는 나보다 XX한 사람이 수천만명은 존재할 것이기 때문. 누군가가 나에게 기대하는, 혹은 별 기대없이 무심코 던진 단정에 스스로 더 큰 우물을 파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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