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언노운 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기간 종사하는 일”
사전에 검색하면 나오는 직업의 의미다. 여기서도 어디에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 개인들이 생각하는 직업의 의미는 달라진다. 영화 <언노운 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매춘에 종사한 이름 모를 소녀, 강제 출국이 두려워 다쳐도 큰 병원에 가지 못하는 불법 이민자들에게 직업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다. 전문 병원으로 직장을 옮기려 했던 제니에게 직업은 자신의 적성에 맞고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어디에 방점을 두느냐는 우리의 기대와 희망과는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살다 보니 직업을 얻게 되고, 그 직업을 가지고 살면서 어디에 방점을 두고 살지는 우리가 결정한다.
그렇지만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을 더 넣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맡은 일에 투철한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충실히 수행해야 하며, 도덕적이어야 한다.”
바로 직업윤리의 정의다. 어디에 방점을 두어 그 직업을 택했든 직업윤리에 맞게 일해야 한다는 것이 암묵적인 사회적 약속 중 하나다. 막상 주변을 살펴보면 이를 항상 명심하면서 일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이렇듯 유명무실해 보이지만 사회가 특별히 직업윤리를 엄격히 요구하는 직업들이 우리 주변 도처에 널려있다. 인생을 살면서 한 번 이상은 만나게 되는 교사·의사가 바로 그 예이다.
교사는 전문적 지식을 가지고 학생을 잘 가르치면 된다. 의사는 전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환자를 잘 치료하면 된다. 그렇지만 ‘이들이 적성에 맞는 직업을 선택했고 일을 수행하기 위한 능력을 향상하였다면 그만인 걸까?’라는 질문을 던지면 대부분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 쉽지 않다. 영화 <언노운 걸> 속 진료 시간 이외의 진료는 거부하던 제니의 모습을 보고 의사로서 책임을 다했다고 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교사·의사에게 ‘좋은’, ‘훌륭한’이라는 수식어가 붙기 위해서는 비교적 엄격하게 책임감과 도덕성을 요구된다. 이는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교사는 아이들을 바른 인성을 가진 성인들로 변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의사는 아프거나 죽어가 비정상적 상태에 있는 사람을 정상적 상태로 되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들은 직업윤리를 고려하여 스스로를 평가한다. 스스로도 다른 이들보다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고, 다른 이들도 이들을 볼 때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바라본다. 제니가 직접적 책임이 없는데도 이름 없는 소녀의 죽음에 강한 죄책감을 느꼈던 것은 평소 의사로서 높게 가졌던 책임감과 도덕성이 한몫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사·의사는 어디까지 사명감을 가져야 하고 책임감을 져야 하는 걸까. 물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명감이고 책임감이기 때문에 그 기준을 정하기 쉽지 않다. 해당 직업 종사자에게 일방적으로 그 기준을 정하라고 할 수 없고, 그 직업에 대해 모르는 타자가 현실은 모른 채 그 기준을 정하고 강요할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는 그 기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으면서 무조건적인 타인을 위한 희생과 책임을 강요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희생을 덜 하거나 책임감을 덜 가지고 있으면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비난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과연 이들에게 희생과 책임을 요구할 만큼 ‘훌륭한’, ‘좋은’ 인간인가. 영화를 보고 나서 이미 다 끝난 일이라며 자신의 죄를 회피하고 줄이려는 브라이언의 아버지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까 용기 있게 말하지 못했던 펠리시 콤바의 언니를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