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느 가족> 리뷰
음지(陰地)에서 유영하는 그들에게
쇼타와 오사무가 어두운 밤 항구 옆 주차장에서 웃으며 장난친다. 서로를 잡고 도망가는 모습을 풀 샷으로 찍은 장면은 마치 물고기 두 마리가 어두운 바다속을 유영하는 듯 보인다. 아빠와 아들, 쇼타와 쇼타(오사무). 닮은 듯 다른 둘이 있다. 영화 <어느 가족>은 가족 제도로 묶이지 않은 이들이 모여 가족‘처럼’ 사는 삶을 보여준다. 가정과 가족을 관습적으로 독해하는 사회의 모습도 연출된다. ‘유사 가족’, ‘유사 부모’의 형태로 이루어진 이들은 핏줄 대신 각자의 상처로 연대한다. 그렇기에 영화 속 하츠에의 말처럼 더욱 서로 간의 유대감이 강할지도 모르겠다. 노부요의 동료가 극 중 한 말처럼 ‘왜 내(우리)가 너(네)까지 신경 써야 해?’라고 말하는, 분리와 배제가 만연한 사회다. 다만 서로의 선택에 의해 맺어졌다고 말하는 가족 관계가 나에게는 좋고 나쁨을 떠나 이질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영화 초반부, 선택으로 이루어진 유사 가족 관계의 긍정적인 면만 골라내 보여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나고 나는 한동안 ‘대체 무엇이 가족이게 하는지’ 물어야 했다.
영화는 가족 제도와 사회 구조, 비(非)혈연 가족이 대면하는 윤리적 문제 등을 다양한 관점에서 보게 한다. 윤리적 비난과 질책을 구조적 약자에게만 가하는 건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영화 <어느 가족>도 그렇다. 오사무가 쇼타에게 가르치는 ‘도둑질’이 그렇고, 노부요와 오사무의 (정당방위임에도) 살인 전과도 그렇다. 쇼타가 경찰에 잡히고 그들의 삶은 정상성을 논하는 이들의 언어로 공개된다. 죽은 하츠에의 시신을 집 안 욕실 바닥에 묻은 것, 노부요와 오사무의 전과 기록은 전후 맥락이 제거된 채 뉴스거리로 활용된다. 일용직이며, 워크셰어를 당하고, 연금을 받으며 사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는 영화 속에서 발현되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의 사정은 주류의 언어로 요약될 뿐이다. ‘모두 다 같이 조금씩 가난해지는 거네’, ‘일용직이라 산재처리가 안된다네.’ 별개의 사건임에도 학대 받은 아이를 데려다 돌본 사실로 부당한 질문을 받아내는 것도 그들의 몫이다. 영화는 주류 사회에서 배제된 그들 가족을 정말로 놓으려는 건, 해체하려는 건 누구인가 묻게 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의 ‘가족’과 관련된 문제에 그들의 최선으로 저항한다. 그들의 최선이 돌봄 방식의 윤리와 (결과적으로) 능력의 역부족임을 떠나서 말이다. 유리가 학대 가정으로 돌아가지 않도록(혹은 자신이 데리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일자리를 관두는 것, 일하다 다리를 다치고 산재처리를 구하는 것들은 대부분 무언가를 얻어내기보다 포기하며 얻는 최선이다. ‘물건 훔치는 건 나쁜 일이야?’ 묻는 쇼타에게 ‘가게가 안 망할 정도로만 훔치면 되지 않을까?’ 답하는 노부요의 말도 그렇다. 영화 속 인물들의 행위와 대화 자체만 놓고 윤리와 도덕을 판단하는 것과 별개로 이제는 질문 먼저 바꿔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망하고도 남을 만큼) 이들을 대변할 목소리를 훔치는 사회의 ‘진짜’ 도둑은 대체 누구인가, 우리는 왜 그들을 가족일 수 없게 하는 구조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내지 않는가. ‘진짜’ 가족이 되게 하는 건 무엇인가. 분노도, 슬퍼할 수도 없는 노부요의 마지막 표정이, 카메라를 향한 응시가 이 영화의 뼈아픈 질문이면서 대답이 되지 않을까. “버린 게 아니라 주운 거예요. 버린 사람은 따로 있지 않나요?”
영화는 음지에서 양지로 이동한 장면을 통해 이들이 가족으로 함께하며 살았던 삶을 찬찬히 보여준다. 영화에서 유리는 부모로부터 학대당했을 것이라 짐작되는데, 노부요에게서 유리는 ‘사랑해서 때린다는 말은 거짓말이야. 사랑하면 이렇게(안아주며) 하는 거야’라는 말을 듣게 된다. 유리는 노부요와 함께 목욕하며 자신의 화상 자국을 보여주고 그녀의 상처를 조심히 만진다. 영화에서 유리는 추운 겨울 캄캄한 밤 주택가 난간의 틈 사이로 처음 등장하는데, 마지막 장면에 다시 돌아간 집에서는 햇볕이 들어오는 양지로 나와 있다. 노부요와 목욕하며 배운 숫자 노래를 부르고, 발을 디디고 서서 창가 너머를 바라보는 유리는 추운 겨울밤의 유리는 아니다. 그렇다 해도 이들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윤리적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영화 속에서 이들은 경찰에 잡히고 병원에 입원한 자식을 두고 도망가는 가족, 벽장 속에 아이를 숨기고 떳떳하게 공개할 수 없는 가족, 죽은 노인의 시신을 집에 파묻고 연금을 타는 가족의 모습이다. 낳았다고 모두 부모가 될 수 없듯, 애정과 연대의 감정만으로 가족이라 부를 수도 없을 것이다. 한 때 따뜻했던 보호시설 정도에 그치고 만다. 영화는 비참하지만 현실을 수용해야하는 데에서 오는 몸부림을 보여준다.
쇼타와 오사무가 마지막 밤에 만든 눈사람이 따뜻한 햇볕에 녹아내린다. 뭉쳐진 눈(雪) 알갱이가 물이 되어 흐르듯, 목욕물로 함께 몸을 씻어 내듯, 그렇게 이들은 추운 겨울밤에 쌓인 응어리를 햇볕과 온수로 녹여낸다. 가르칠 게 도둑질밖에 없었다는 오사무의 말과 달리, 쇼타는 오사무의 방식으로 유리를 보호했고, 노부요는 쇼타와 유리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한다. 영화에서 어린아이들을 응시하는 눈이자 거울인 카메라는 극 중 쇼타가 읽은 스위미의 눈이기도 하다. ‘모두가 한 마리의 큰 물고기처럼 헤엄치게 되었을 때 스위미가 말했다. 내가 눈이 될게.’ 기꺼이 눈(目)이 되어 가족을 보호하고자 했던 이들의 ‘가족 되기’ 사투는 어디서도 관찰되지 못하고 버려진 이들의 처절함이자,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어느 가족>은 (좁게는) 가족상의 기본값을 제시하지 않는 영화이자, 가족이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영화이고, (넓게는) 가족이라는 소재로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윤리 또한 질문하게 하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