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안팎을 나누는 경계

영화 <블레이드러너 2049> 리뷰

by 구월




이 영화를 보다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던 장면이 있다면 조이가 마리에트의 육체를 빌려 K(조)를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영혼이 육체에 싱크를 맞추는 건 어디선가 본 듯했지만, 어디에서 본적 없는 장면 같았다. 왜 그랬을까. 이런 경우 주체적 영혼은 본디 진짜 인간으로서 보이지는 않지만 실존하고 육체는 껍데기처럼 기능한다. 한편 <블레이드러너 2049>에서 마리에트의 육체는 실존하고 조이는 인공지능 홀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 휴대용 에메네이터가 없다면 집 밖에서 실행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만져지지 않는 홀로그램 조이에게 K는 ‘너는 내게 진짜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마리에트 또한 인간이 아닌 리플리칸트로, 인간과 리플리칸트를 구별 짓는 거의 유일한 기준은 생식능력이다. 영화에서 넥서스8이 그 가능성을 보여주게 되면서, 진짜임을 구분하는 경계를 무너뜨리고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려는 자들과 기존의 벽과 질서를 지키려는 자들의 싸움에 블레이드 러너 K가 투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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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에 제작된 전작 <블레이드러너>는 2019년을 배경으로 하고, <블레이드러너 2049>는 그로부터 30년 뒤인 2049년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화면에 꽉 찬 초록색 눈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블레이드러너>에 출연했던 데커드가 레이첼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30여년 만에 마주보게 되면서 끝난다. 그들의 딸 애나는 메모리메이커로 무균실에 살며 ‘진짜 같은’ 기억을 만들어 월레스사에 납품한다. K는 그녀의 기억을 자신의 기억이라 착각하며 스스로의 실체에 의문을 갖게 되며, 기준선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할 만큼 불안정한 상태로 변화한다. 다른 리플리칸트들에게도 그녀의 기억이 어릴 적 기억으로 심어져 있다. 모두가 목각 말의 주인공일 수 있다는 희망을 품는다. 자신만은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태어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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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러너 2049>는 K가 일종의 자아의 개념을 갖게 되며 자신의 실체에 대해 혼란을 겪는 면을 조명한다. 애나가 기억과 상상을 통해 인간적인 면을 만들어내고 심는 일, 진짜 나무의 사진과 같은 상징은 그다지 흥미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어릴 적 기억이라 ‘믿는’ 것들로부터 (실제로 누군가로부터 심어진 기억일 수도 있지만) ‘혹시나 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닐까, 진짜 같은 게 아니라 진짜일 수 있지도 않을까’ 희망을 품는 K의 모습에 눈길이 갔다. K가 사퍼를 찾아간 곳 나무 아래에서 진짜 꽃을 발견하고 숫자가 새겨진 목각말을 찾아내는 장면들이 좋았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들을 두고 내 것인지 남의 것인지 의심하는 동시에 믿기를 꿈꾸는 K를 본다. K와 같이 의심과 동시에 믿음을 품는 리플리칸트들을 본다. 그들을 보는 나를 본다. 이들의 모습과 진짜 인간의 모습은 다르지 않다. 진짜 인간이라면 이런 상황에 무엇을 할 수 있나. 그들을 두고 진짜가 아니라 말한들 그게 대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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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카메라는 마치 눈(目)처럼 K가 어떤 화면에서 무언가를 확대하고, 각도를 달리하고, 움직여서 보는 장면을 몇 차례 반복해 보여준다. 그들에게 이미 심어진 기억과 이미지는 리플리칸트가 품을 수 있는 욕망이자 희망과도 연결된다. 전작 <블레이드 러너>가 질문과 대답을 통한 홍채 반응으로 인간과 리플리칸트를 구분 지었다면, <블레이드러너 2049>는 영화 속 등장인물의 말대로 조금 더 ‘복잡’하다. 몇 가지 질문만으로 진짜이고 아니고를 판별하기에 인간이 느끼는 감정과 기억의 실체는 불분명하고 비선형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심어진 기억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에서 ‘그렇다면 기억은 누가 만드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애나의 말로도 표현된다. ‘구체적일수록 진짜라고 생각하지만 인간은 감정으로 기억을 떠올린다.’ 봉인된 기억을 프레임 밖으로 불러내는 건 기억을 가진 자의 해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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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K)와 조이는 영화 속에서 리얼(real boy, real girl)한 존재가 되길 바란다. 마리에트는 자신의 육체를 빌려주며 조이에게 ‘네 속으로 들어가 봤다’고 말한다. 싱크된 두 존재를 두고 무엇을 어떻게 구분하고 명명할 수 있나 생각해본다. 겉과 속의 경계, 실존과 가상의 벽, 혼과 육체의 동기화 사이에서 우리는 인간성이란 대체 무엇인가 고민하게 된다. 인간과 복제인간, 진짜와 진짜 같은 존재들에 대해서도.

이 영화에서 말하는,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건 무엇인가. 리플리칸트를 보며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종종 잊는다는 국장 조시의 말처럼 영화는 진짜와 진짜 같은 존재의 대립이기보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종에서 분화된, 인간의 안팎을 나누는 경계선이 얼마나 불분명한 것인지 보여주는 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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