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미> 리뷰
디안과 스티브의 격한 몸싸움, 이후 음악이 흐르며 표출되는 자의식, 중반 즈음 관객은 선택하게 된다. 영화를 계속 볼 것인가, 그만 꺼버릴 것인가. 자비에 돌란 영화에서 모자(母子) 관계는 중요한 모티프로 작용한다. 모티프 자체는 평범하다. 일기장에도 쓰는 엄마와 자식의 이러쿵저러쿵 부딪히고 깨지고 운 좋으면 타협하는 이야기. 돌란은 10년 전 데뷔작 <아이킬드마이마더>에서 엄마에 애증을 품은 아들 이야기를 보여줬다. 자신이 직접 아들 역 후베르트를 연기했고, 독백을 비롯한 여러 장면에서 자전적 요소(아버지와의 관계, 성정체성)를 드러냈다.
<마미>는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이상행동증세와 (엄마에 대한) 지나친 애착을 보이는 아들 스티브와 그의 ‘마미’ 디안을 그린다. 돌란의 영화 안에서 그들(모자)은 여전히 소리 지르고, 무언가를 때려 부순다. 그럼으로써 관계로부터 상처받고 짓이겨지는 인물들의 감정선은 섬세하게 묘사된다. 이를 위해 돌란은 색감과 빛을 감각적으로 사용한다. 영화는 강렬하게 기억되었으면 하는 순간에 원색의 필터를 끼워 넣고, 다양한 각도에서 빛을 활용한다. 얼굴 측면에 빛을 비추거나, 역광에서 얼굴 정면을 클로즈업 하는 식이다.
한편, 돌란의 영화는 ‘과잉’이라는 평가에 매번 부딪힌다. 음악 영화도 아닌데 뮤직비디오처럼 음악이 과잉 삽입되고, 화려한 색감의 조명과 소품의 향연은 마치 상업 광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감각적 연출과 별개로 자의식의 과잉, 이미지의 과잉이라는 평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감정 과잉 문제도 끼어있다. 때로 이러한 ‘과잉’은 동시대 감독들에 비해 어린 돌란의 나이와 연관지어 그의 한계성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한편 영화를 본 나는 애초에 그의 연출에서 무엇을 과잉이라고 말할 수 있나 되묻게 된다. 정말로 이 영화에 필요 이상으로 넘쳐흐르는 것은 무엇인가.
과잉에 반문하게 된다. 디안과 스티브가 서로 과격하게 다투는 장면들에서 난무하는 욕설과 몸싸움은 적나라한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생계를 책임지는 디안이 스티브를 전적으로 도맡아 키우기엔 역부족인 상황을 그린다. 더군다나 번역일을 그만두게 되면서 구직 활동을 하느라 정신없는 디안에게 스티브는 마트 카트안에 식재료를 가득 담아와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선물이라고 말한다. 이후 목을 조르고 액자로 머리를 내려치는 격렬한 다툼을 보자면 몇몇 관객들은 혀를 내두를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말과 행동은 영화 서사의 중심축이 되고, 이들의 발화는 이 영화의 선언이 된다. 사랑과 구원은 별개일 수밖에 없다. 돌란은 인물들의 언어와 표정을 연신 흔들리는 카메라로 잡고 색감을 변주해 표현한다. 등장인물들의 거친 감정의 변화를 총천연색 조명으로 표출한다. 이때 돌란은 의도한 과잉을 구태여 도려내지 않는다.
돌란은 이 영화의 도드라지는 특징 혹은 묘기라고도 볼 수 있는 화면의 확장과 축소를 두 차례 보여준다. 장막을 열 듯 서서히 열어젖히고, 조리개를 닫듯 서서히 밀어내는 화면의 전환은 시간 순서대로 지어진 이야기를 읽듯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전환이 필요한 순간에 1:1의 비율에서 1.85:1로의 확장, 다시 1:1로의 축소는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장면 크기 전환의 편집점은 꿈같은 순간과 처절한 현실의 경계 위에 놓여있다. 이 때 카메라의 화면은 돌란의 눈(目)과 동일시되는 것처럼 보인다. <마미>에서 화면비의 변화는 <아이킬드마이마더> 에서 아들의 독백을 엄마가 보게 되듯 관객이 돌란의 세계를 엿보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 처음 화면이 와이드샷으로 변하는 순간은 디안, 스티브, 카일리가 함께 도로에서 달리는 장면이다. 롱보드를 타는 디안은 화면을 열어젖히는 제스처를 취하고, 옆에서 자전거를 타는 디안과 카일리는 웃으며 스티브를 향해 뒤따라 가고 있다. 화면이 다시 축소되는 지점은 디안이 법원에서 스티브의 방화로 인한 배상금 청구를 송달받은 이후다. 좁혀지면서 공간의 분위기도 달라진다. 이후 두 번째 화면 전환은 스티브의 졸업과 결혼을 상상하는 디안의 모습에서다. 확장된 화면에서 뿌옇게 처리된 다른 사람들이 추상적으로 표현되고, 디안은 상상 속에서 견디기 힘든 현실을 잠시 벗어난다. 그럼에도 스티브의 자살 미수 사건 이후 스티브를 위탁 기관에 맡기게 되고, 화면은 펼쳐진 환상에서 비좁은 현실로 돌아오듯 축소된다.
‘나는 엄마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다. (...) 이건 참 모순적이다. 자신의 엄마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 영화<아이킬드마이마더>에서 아들 후베르트가 카메라에 대고 자신의 모습을 녹화하는 독백 장면이다. ‘어머니를 미워하는 것은 죄라고 말하는 이들은 위선이다. 그들 자신도 어머니를 증오하면서 그게 1초이건, 1년이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증오한다는 게 중요하다’ 이때 돌란은 직접 자신이 후베르트를 연기했고, 자전적인 요소를 영화에 녹여냈다. 5년 뒤 <마미>를 풀어내며 돌란은 ‘<아이킬드마이마더> 때를 생각하면 나는 아마도 엄마를 벌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마미>를 통해 엄마의 복수를 청하고 있는 것 같다.’고 밝히기도 했다.
모순된 사랑과 애증의 모자 관계는 맹목적 사랑과 구원에 대한 질문으로 어느새 변화했다. 혈연이라는 이유로 함께 사는 가족 구성원들의 결핍에 초점을 맞춘다. 아버지의 부재로 본능에 충실하고 공격적인 성향을 지닌 스티브, 아들을 잃고 말을 더듬기 시작한 카일라, 자신의 번역일도 아들을 돌보는 일도 녹록치 않지만 희망을 놓지 않으려 애쓰는 디안까지. 돌란의 두 작품은 세상의 시선에 아랑곳않(으려)는 모자를 기어코 쪼개고 붙이는 과정을 반복해 관객들 또한 그들의 입장에 서 보게 한다. 모자관계를 주축으로 변주된 <마미>의 이야기는 지질한 감정들을 집요하게 곱씹도록 만든다.
위탁기관에 보내는 것이 아이를 버리는 일인지, 맡기는 일인지는 어떻게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영화에서 디안의 처절한 자기 외면(스티브를 그곳에 맡긴 건 희망이 있어서다. 나는 승자다)과 현실도피는 곳곳에 드러난다. 마지막 카일라가 토론토로 떠난다고 할 때에 과할 정도의 여유로운 반응을 보였던 디안은 카일라가 떠나고 혼자 남겨진 채 절규한다. 사회의 편견으로 ‘우리(모자)’를 보는 타자에 대한 분노, 동시에 힘이 되어주는 건 서로 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처절한 자기 확신이 버려진 채로 있다. 시설을 나오며 디안은 ‘아픈 애한테 가장 나쁜 건 부모 혹은 아이의 지나친 자기 확신’이라며 ‘사랑과 구원은 별개’라는 조언을 듣는다. 이에 디안은 ‘그건 비관이야’라고 반발하지만, 시종일관 통제되지 않는 스티브는와 악화되는 현실 상황에 힘겨워하며 결국 시설에 위탁한다. 이때 디안의 선택을 두고 <아이킬드마이마더>에서도 표현되듯 ‘네가 내가 되어 보았느냐’고 소리치는 이 울분의 감정에, 그 감정을 드러내는 과잉된 연출에 우리는 과잉이라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돌란의 영화에서 흘러넘치는 것은, 과잉이라 부를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건 (불완전한 존재가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일시적인 낙관이다. 얕은 낙관에 기반한 희망이다. 그들은 처한 현실에 비해 지나치게 희망적이고, 희망을 품는 것 외에 달리 할 게 없는 현실을 살아간다. 돌란은 그 거품 섞인 희망마저도 영화 끝에 가서 걷어낸다. 카일라는 자신의 가족에게로 돌아가고, 디안은 절규하며, 스티브는 도망친다. 그리고 다시 음악이 흐른다. 다시 어떤 기대를 하게 될까. 낙관으로 애써 현실을 외면할 수밖에 없나. 이 영화에 넘쳐흐르는 게 있다면 공상에 지나지 않는 처연한 두 모자의 희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