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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월 Oct 31. 2019

리뷰, 무엇이 되어야 하나요

리뷰의 확장을 꿈꾸다




그림책 같은 편지, 또 한 편의 리뷰


  누군가의 마음을 흔드는 편지를 보낸다는 건,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 편지가 대단한 글이 못 되더라도, 깊숙한 울림을 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선물을 할 때 카드나 편지를 쓰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고민을 해봤을 것이다. ‘어떻게 써야 받는 사람에게 마음이 잘 전달될까.’ 누가 받아도 상관없을 만큼 진부하거나 의례적인 말은 안 적은 것만 못 하니 말이다. 편지를 받는 상대를 고민하고, 몇 번의 실패를 거치며 우리는 네 맘이 내 맘 같지 않다는 사실을 배워간다. 그렇기에 마음을 흔드는 편지를 읽는다는 건 행운이면서도 어쩌면 각고의 정성과 노력의 산물을 받는 것이기도 하다.

  몇 달 전 인스타그램에서 한때 글을 같이 썼던 글벗이 그림책을 나눈다는 소식을 읽었다. 그는 늘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읽은 책을 ‘나눔’이라는 이름으로 선물한다. 함께 글을 쓰는 동안에도 책 나눔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받은 첫 번째 책은 『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이었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가 기획한 책으로 직업병을 추적하는 의사들의 이야기다. 노동 르포를 즐겨 읽던 내게 노동자의 건강권과 인권에 관해 쓴 이 책은 꼭 맞는 책 선물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 그에게서 모리스 샌닥의 『깊은 밤 부엌에서』라는 그림책을 나눔 받았다. 다정한 마음이 가득 채워진 카드 편지도 함께. 그림책 포장을 뜯기 전, 그의 편지를 읽고 나는 잠시 가슴이 먹먹했다.

  그는 나의 안부를 물으며 샌닥이 그림을 그리면서 겪은 일화들을 짤막하게 언급해주었다. 샌닥이 그림으로 힘든 시절을 보냈던 때의 이야기였는데, 그 상황과 지금 나의 상황이 겹쳐진 듯 느껴졌다. 세상에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이렇게도 많은데, 내가 글을 쓸 이유가 있나 싶은 순간들이 온 것처럼 샌닥에게도 그림이 그랬던 것이다. 글벗은 카드 말미에 이렇게 썼다. ‘우리가 낼 수 있는 단 하나의 목소리로 찬찬히 글을 써나가자.’ 마치 그림책 같은 편지였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덮고 나면 그 자체로 충분한 그림책. 한 편의 리뷰이기도 한 편지. 편지는 무엇이 될 수 있나 생각해보게 된다.



리뷰란 무엇이 되어야 하나요


  글벗이 그림책으로 아이들과 이야기를 공유하는 동안, 나는 동네 영화 리뷰 모임을 만들었다. 책과 영화로 글을 쓰거나 토론하는 모임에 참여하려면 매번 서울에 가야만 하는 게 피곤하던 참이었다. 경기도 외곽 지역에서 출발하면 보통 왕복 두세 시간을 걸려 다녀오게 되는데, 집에 돌아오면 물먹은 솜처럼 허리와 다리가 무거웠다. ‘왜 우리 동네에는 이런 모임이 없나’ 잠시 한탄하다가 동네에서 할 수 있는 모임을 내가 꾸려볼까 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에서 청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이 있다는 소식을 접했고, 오픈 마이크 사전 신청을 통해 프로젝트나 모임에 대해 소개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강연을 기획한 동네 문화생활센터는 청년들의 문화 동호회나 체험 프로그램을 지원해주고 공간 대여 서비스를 하는 곳이었는데, 운 좋게도 강연 시작 전 10여 분간 모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거창한 목표나 포부는 없었다. ‘영화를 본다는 건 영화를 보는 나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기도 하죠, 나로부터 출발한 글감으로 함께 영화를 보고 감상을 공유하고 싶어요.’ 더듬더듬 말을 끝맺었다. 다행히 모임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 연락을 주었고, 간단히 참여하게 된 계기를 물었다. ‘감상을 나누며 소통하고 싶어서요’, ‘좋은 영화를 같이 알고 즐기고 싶습니다’, ‘뭔가 보고 생각한 걸 글로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생각과 글을 공유하며 변화하고 싶어요’라는 답이 왔다. 다양한 사람들이 영화를 매개로 자신을 돌아보고 감상을 나누는 글쓰기에 관심이 있었구나 싶었다. 동시에 글을 많이 써보지 않아서, 잘 쓰지 못하는데 모임에 참여해도 괜찮을지 묻기도 했다.



  책과 영화를 보고 리뷰를 쓴다는 게 뭘까. 모임을 구성하고 나서야 그런 물음을 정리하게 되었다. 글을 쓸 때 참고했던 책들을 뒤적였다. 그중 은유 작가의 『글쓰기의 최전선』은 책과 영화를 본 뒤 리뷰를 쓰기 시작할 때 지침이 되었던 책이다. 필자는 책에서 ‘기성의 관념, 도덕, 규범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뒤집으며 기존의 가치 체계를 흔드는 사람(p.127)’이 예술가라며, 시대의 가치체계에 질문을 던지고 자신을 비롯한 주변 사람과 이 세계를 낯설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계기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예술가에게만 한정된 영역일까, 전문 평론가에게만 부과된 역할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책과 영화로 읽는 메시지나 이미지들은 책과 영화의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그걸 보는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행위다. 나를 들여다볼 줄 알아야 사회망 안에 놓인 타자에 대해서도 살펴보게 되니, 결국 나로부터 시작한 글이 타자로 확장되는 과정을 밟게 되는 것이다. 나의 문제에 골몰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타인의 세계에 발을 들이기란 작가의 말처럼 ‘혁명’에 가깝다. 그렇기에 리뷰를 쓰는 건 개인의 정서적 울림에서 얻는 감정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세상과 타자에 대한 편견을 들어내고 이해를 넓혀보는 작업인 셈이다. 흔들리고, 낯설어지고, 기존의 관습에 의문을 가하며 쓴 감상문이 리뷰인 것이다.

  리뷰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리뷰어의 위치는 어디일까. 영화의 한 장면을 두고 ‘나는 왜 이 장면을 좋게 느꼈을까’, ‘영화에서 이 장면이 왜 필요한 걸까’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리뷰어의 삶을 기반으로 표출되면 일상에서 보다 풍성한 담론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동네 영화 리뷰 모임도 그 일환이 되면 좋겠다 싶다.



리뷰의 확장, 리뷰어 정체성


  함께 쓰는 리뷰의 확장을 원한다. 모두가 전문가가 되는 일을 꿈꾸고 소수의 전문가가 하는 말을 수용하기보다는, 잘 쓴 감상문을 공유하는 게 자연스러운 형국이 되는 대중문화를 바란다. 일상에 스며있는 문제, 사소함이 깃든 진실한 리뷰들이 넘쳐흐르면 좋겠다. 문단에 등단하지 않고, 매체에서 청탁하지 않아도 글을 쓰고 메일링 서비스 구독을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시대다. 각각의 리뷰어들은 거대한 담론을 이끌어내는 대신 자신의 삶에서 ‘너무 사소해서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들(p.128)’에 목소리를 낸다. 이 또한 독자에게 정서적 울림을 주고 관습적 사유를 흔드는 것이라면 좋은 리뷰가 될 수 있다. 일부 평론가들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상업적인 영화, 미디어에 자주 노출된 영화에 한정된 취향과 관습적 사유를 지적하며 그들의 해석에 때로 조소로 응하기도 한다. 그럴 때 등장하는 대중의 평론가화는 어쩌면 평론가 중심적인 언어에 가깝다. 평론의 범주에 드는 글을 중심으로 한 기울어진 기준인 셈이다.

  대단한 글을 쓰기 위해 준비하고 머뭇대는 대신, 고유한 특성이 있는 자신의 글을 완성해보는 작업은 그래서 필요하다. 리뷰어가 쓰는 글의 한계성은 늘 도마 위에 오른다. 하지만 뭣도 아니라서 뭣도 될 수 있지 않겠나 싶기도 하다. ‘좋은 디제이는 바로 나한테만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한다(p.164)’고 하듯, 리뷰어의 글이 다양해지고, 글을 써보는 시도가 더욱더 많아져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 편지의 타율이 높아졌으면 좋겠다. 오늘의 이 심야 편지 리뷰는 누구에게 닿을 수 있을까. 닿지 못하게 될 지라도 리뷰에 대해서, 리뷰어 정체성에 대해서 같이 고민하는 사람들과 더 이야기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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