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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월 Sep 27. 2020

착한 방관자들의 세계

『미안함에 대하여』, 홍세화

 





<미안함에 대하여>, 홍세화



이 책을 처음 마주했을 때, 

표지에 세로로 적힌 부제를 보며 멈칫했다. 

'착한 방관자는 비겁한 위선자일 뿐이다.' 

옳은 말, 맞는 말은 정면으로 맞서기 참 힘들다. 


너무 훅 찌르니까 외면하고 싶었던 얼굴 앞에서 고개를 피하듯 그렇게 책을 한참 꽂아만 놓았다. 

그럼에도 한겨레 서평단을 신청했고, 글을 써야 하니 어쨌든 한장씩 두장씩 틈날 때마다 읽어나갔다.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읽는 사람도 있겠지만, 읽기 전까지 고민하다가 한두장씩 넘겨보는 사람도 있을테니까. 


이 리뷰는 후자의 사람들을 위해 읽혔으면 싶다. 

어찌되었든 책장을 넘기며 뼈 때리는 말이 가득하겠지 싶었던 칼럼들 앞 서문의 제목은 이러 했다.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 

              







맞다. 이 책은 '미안함'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도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 미안함을 말로 고백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무엇에 대해 왜 미안한지를 글로 써내는 일 또한 간단한 과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요행으로 살아남았다는 데에 미안함, 누군가는 지겹다고 쉽게 외면할 수 있는 데에 느끼는 미안함, 

성소수자와 난민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의 고통과 고난에 대한 미안함. 자책과 분노와 안간힘은 이러한 미안한 감정 혹은 상태와 함께 한다. 회의하는 자만이 미안함도 지속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미안함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글을 쓰고 정리하고 다시 정리하는 사람만이 찰나의 자책, 순간의 분노가 아닌 결국 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미안함에 대해 마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책을 다 읽은 뒤 여러 밑줄 가운데 몇 가지만 추렸는데도 A4 3장 가량의 글들이 나왔다. 나중에 책을 다시 열어보게 된다면, 이 밑줄들이 책의 내용을 가늠하게 해줄 것이고, 책을 읽기 전 지금 이 리뷰를 읽는 사람들에게는 책과 작가가 어떤 톤으로 미안함에 대해 말하고 있는 지를 가늠하게 해줄 것이다.  

              

서문에서 작가가 말했듯, 이 책 또한 '그저 지금 여기의 고통과 불행, 불안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목소리를 안간힘처럼 내보는 것'이다. 미안함에 대해서, 미안함으로 엮인 이 무수한 칼럼의 글들 또한 그저 살아남은 자의 안간힘으로 쓰인 책일 것이고, 이 책을 읽는 사람들 또한 한 사람이 말하는 미안함에 대해 그저 찬찬히 읽어낼 뿐인 것이다. 우리 모두 요행으로 살아남았으니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살아남았으니 읽을 수 있다. 


미안해할 기회가 있다. 

이 리뷰와 책 속 몇몇의 문장들에 마음이 조금이라도 움찔한다면 한번쯤 읽어보길 권유드린다.

하단에는 책을 읽으며 밑줄 쳤던 많은 문장들 중 몇몇을 발췌하였다.

               




                   

≪오만함의 층위≫     

p. 25 오만함에도 층위가 있다. 조금이라도 겸연쩍어할 줄 아는 오만함이 있는가 하면, 오랫동안 내면의 절제나 외부의 견제가 작동하지 않아 공격성까지 띠는, 뻔뻔한 오만함도 있다. (...)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독재로 치닫는다.     


≪’굴뚝 농부‘가 된 노동자≫     

p.33 우리는 익숙함을 경계해야 한다. 나쁜 것에 익숙해지면 더 나쁜 것을 별 저항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p.36 노동자는 많지만 노동자 의식은 드문 곳에서 부당하고 억울한 일에 맞서 싸우지 않으면, 노동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인식하기 어렵고, 연대 의식의 토대 또한 탄탄해지기 힘들다.     


≪나는 앨라이다≫     

p.42 내가 ‘적극적인 앨라이(Ally, 성소수자들LGBTQ이 겪는 차별에 반대하고 평등사회를 위해 연대하는 사람)’가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이 땅에 만연한 무지와 편견, 차별과 배제에 시달리는 성소수자에게 동시대인으로서 미안함이 앞서기 때문이다. 또한 ‘한 사람이라도 자유롭지 못한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선한 사람의 무관심이 악을 키운다”는 18세기 영국의 보수주의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의 말을 내 가슴에 새기고 있기 때문이다.     


p.44 정치사상가 레지스 드브레는 “정치는 공포와 희망의 두 요소로 구성된다”고 말했다.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정치의 공포 마케팅이 더욱 강화된다.     


≪착한 방관자는 비겁한 위선자≫     

p.47 혐오가 지속적으로 정치적 힘을 갖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선 혐오는 감정이기 때문에 합리성으로 해소하기 어렵다. 또한 혐오는 약자와 소수파를 차별·지배하기 위한 강자와 다수파의 감정기제이기 때문에 제어가 되지 않는다. 특히 혐오는, 전두환 무리가 그렇듯이, 탄압은 물론 살육까지 마다하지 않는 세력에게 양심의 짐을 없애준다.     


p.48 사랑이 우리 눈을 멀게 하듯이, 혐오는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 혐오는 파장력이 강력한 만큼 굳이 다수가 혐오감정을 갖지 않아도 된다. 혐오에 분노로 맞서지 않는 ‘착한 방관자’가 다수이기만 하면, 그래서 일해공원을 찾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다수이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혐오의 정치학이다.     


≪혐오의 뿌리≫     

p.55 누군가 지적했듯이, 백인과 결합한 가족은 ‘글로벌 가족’, 비백인과 결합한 가족은 ‘다문화 가정’이라고 부르게 하는 것이 바로 지디피 인종주의다. 한국의 현대사 속에서 교묘히 결합한 물신주의와 인종주의는 지디피(GDP) 인종주의로 발전했다.     


≪비대칭성의 무서움≫     

p.116 그렇게 일반 민중이 개와 돼지처럼 배만 채우면 되던 시절, 높으신 분들의 심성 안에는 추위와 배고픔이라는 비참함에 대해 서양에는 기독교의 ‘긍휼’, 동양에는 공맹사상의 ‘측은지심’이라는 것이 있었다. 지체 높은 분들 스스로는 추위와 배고픔을 겪지 않았어도 공감능력은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추위와 배고픔이 사라진 만큼 세상도 좋아졌다. 그런데 그와 함께 긍휼과 측은지심도 엷어졌다. 물론 『레미제라블』을 쓴 빅토르 위고의 “온정, 시혜에 관해 사람들은 받는 쪽이 아닌 주는 쪽에서만 생각한다”는 말이나, 『주홍글씨』를 쓴 너새니얼 호손의 “온정과 오만은 쌍둥이”라는 말이 시사하듯, 온정과 시혜를 필요로 하는 사회보다는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가 더 나은 사회라는 것은 분명하다. 남의 온정과 시혜가 필요한 상황, 그것 자체가 이미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된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은 사적 온정과 시혜의 영역에서 공적 분배와 권리의 영역으로 확장되었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노동삼권 등으로 자본주의사회에서 약자의 권리를 신장해왔다.     


≪“왜 우유를 안 사?”≫     

p.139-140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은 ‘돈이 있으면 죄가 없고 돈이 없으면 죄가 있다’는 의미에서 훨씬 확장되어야 한다. 돈이 없으면 죄가 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아예 죄까지 짓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벗어날 수 없는 가난 속에서는 생존 자체가 범법의 경계에 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 그 뿐이 아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유전무병, 무전유병’과 결합되어야 한다. 벌금형을 받은 사람 중에는 기초생활수급자도 많은데다 자신이 아프거나 가족이 아픈 경우가 너무 많다. 병이 들어도 치료받지 못하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김수영 시인도 개탄했듯이, 작은 일에만 주로 분개한다. 작은 도둑은 빠짐없이 법망에 걸리는 반면, 큰 도둑은 법망을 잘도 피한다. 그래서 우리가 비난하고 냉대하는 쪽은 후자가 아니라 전자다.     


p.141. 정치가 고귀하다면 보이지 않는 사회적 연대의 실현이 정치의 기본 소명이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행동하겠는가≫     

p.154 본디 실종자라는 말은 올바른 정명(正名)이 아니었다. 공자는 『논어』에서 “명칭과 실질은 일치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p.158 돈벌이에, 자본의 이윤 추구에 바빠서, 사람의 안전은 고려 사항에 들어가지 못한다. 온통 탐욕의 덩어리가 되어버린, 차라리 뻔뻔함이 성공의 열쇠가 된 사회다. 중고 배를 수입해 증축해도 안전 검사를 쉽게 통과하고, 컨테이너를 결박하지 않은 채 과적해도 단속당하지 않는다. 이것이 세월호만의 일이겠는가. 사회 전체적으로 만연되어 자리 잡힌 경향이고 흐름이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시대, 자본과 국가기관은 탈규제에 있어서 한통속이었다. 모든 규제를 암이라고 규정한 박근혜 정권의 시대에는 더 이상 말해 무엇하겠는가.     



≪무엇으로 진보인가≫     

p163.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의 저자 조지 레이코프는 “자유를 빼앗기는 것도 위험한 일이지만, 자유 개념을 빼앗기는 것은 더 위험하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진보 개념을 빼앗기는 것 또한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묻는다. 문재인 정권은 무엇으로 진보인가?     


≪상징폭력과 정신의 신자유주의화≫     

p.176 피에르 부르디외에 따르면, 상징폭력은 피지배자에게 사회적 위계를 정당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물리력에 의존하지 않고도 복종하게 하는 지배 기제다. 몸에 가하는 폭력과 달리, 상징폭력은 피지배자에게 지배자의 세계관, 의식, 욕망을 내면화하게 한다. 그 결과 피지배자는 열등감, 즉 스스로를 부정적이거나 무가치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래서 노동자와 서민은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 정치인, 연예인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 반면, 자기와 같은 처지의 노동자 서민에게는 무관심하다. 관심이 없으니 노동자 서민이 당하는 고통과 불행에는 분노를 느끼지 않는 반면, 좋아하는 정치인과 연예인이 겪는 작은 고통과 불행에는 열화와 같은 분노를 느낀다.     


p.177 분노는 논리적이지 않다. “조국이 무너지면 문재인이 무너진다”고 비약하고, 여기에 노무현을 잃었던 지난날의 울분이 결합되어 두 달 전까지 적폐 세력 청산의 주역으로 영웅시되었던 검찰이 분노의 화살을 집중적으로 받는다.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위해≫     

p.195 제임스 퍼거슨은 구조적 대량 실업 상태에 빠진 남아프리카에서 노동에 기반하지 않은 분배가 점점 그 역할을 확장한 방식을 고찰하고, 그의 저작 『분배정치의 시대』를 집필했다. 그는 책에서 남아프리카의 한 노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소개한다. “나는 집에 대한 권리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집을 원합니다.” 우리 헌법 제34조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의 ‘권리’ 또한 텅 빈 기표에 지나지 않는다.     


≪외침의 빈자리≫     

p.231 ‘표현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말은 본디 ‘진실과 공익의 추구’라는 말과 결합되어야만 유효하다. 하지만 북한이라는 타자와 관련된 혐오, 증오, 위협의 선정적 보도는 검증의 어려움이 있기에 더욱 제어되지 않는다. 최근에 한국어로 번역된 『세계의 진실을 가리는 50가지 고정관념』의 저자 파스칼 보니파스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해석할 때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유혹으로 ‘전문가에게 맡기기’와 ‘단순화하기’를 들었다. 특히 단순화하기가 사이비 언론의 선정성과 만나면 우리는 섬세한 안목을 갖는 대신 ‘선과 악’, ‘흑과 백’의 이분법적 사고 틀에 갇힐 위험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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