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드라마 만드는 사람>, 송진선, RHK코리아 (2025)
<김비서는 왜 그럴까> 는 '연애와 결혼보다 더 중요한 선택은 없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이고, <방과 후 전쟁활동>은 '뻔한 학원물이 아닌, 10대의 감정과 관계를 다르게 보여줄 수는 없을까?', '졸업을 앞둔 고3들이 느끼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공포를 어떻게 이야기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드라마 만드는 사람>의 저자 송진선 프로듀서는 20편 이상의 드라마에 프로듀서로 참여하였으며, HAJI Studio의 대표이기도 하다. 굵직한 작품들을 커리어로 쌓아오면서 프로듀서로서의 경험담과 창작에 대한 관점들을 정리해놓은 책인데, 꽤나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아서 발췌했다.
직접 겪은 경험담에서 나온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주로 재밌게 읽었고, 교과서적으로 당연하고 뻔한 말들은 비교적 추상적으로 느껴져서 아쉬웠다.
가장 좋았던 챕터는 후반부 " 나와 대중이 원하는 것 사이에서 " 라는 부분이었다.
p.170~ 171
모든 것이 변하는 와중에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게 하나 있다면 감정의 본질이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 그리움과 외로움, 어쩔 수 없이 미워하면서도 다시 품고 싶은 마음 같은 것들. 그건 유행이 아니라, 인간이 원래 그렇다. 그래서일까. 이미 누군가 수천 번 다룬 이야기라도, 그것이 진심이라면 또 한 번 통한다. 클리셰에도 진정성이 담기면 다시 누군가의 마음을 건드릴 수 있다.
(...)
결국 좋은 이야기는 ‘무엇을 말했느냐’보다 ‘어디서 바라봤느냐’에 달렸다. 이미 다뤄진 이야기라도, 그 인물의 다른 면에서, 다른 자리에서, 다른 시선으로 들여다보면 그 안에 다시 살아나는 감정이 있다. 누구도 주인공으로 삼지 않았던 주변 인물에게, 진부한 관계 속 숨겨진 결핍에서, 클리셰 너머에 있는 또 다른 감정에서 말이다.
: 드라마를 보는 이유, 존재하는 이유, 만들게 되는 본질적 이유가 되지 않을까.
숏폼이 성행하는 와중에 롱폼이 계속해서 갈 수 있는 건 우리는 결국 무엇을 말하는 드라마인지 그 결말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드라마가 펼쳐가는 과정 속 녹진한 감정들을 겪기 위해 본다. 인간이 원래 그렇다는 것에 공감.
책 속 문장 발췌
p. 35
기획서를 쓰는 일은 단순히 개요 정리를 넘어서, 인물이 어떤 감정을 따라 어디로 이동할 것인지를 상상하고 서사의 지도를 그리는 작업이다. 하지만 이때 중요한 것은 계획만큼이나 ‘여백’이다. 작가에게 지나치게 구체적인 회차별 줄거리를 요구해 미리 고정해 두면, 대본을 쓰는 과정에서 인물의 감정이 진화하거나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창작의 가능성을 제한하게 될 수 있다.
p.39
결국 드라마란 ‘결말’이 아닌 ‘경로’로 기억되는 이야기다. 시청자는 마지막 장면보다도, 그 장면에 이르기까지 어떤 예측할 수 없는 감정의 곡선을 따라왔는가를 더 오래 기억한다.
p.56
특이한 것, 새로운 것만 찾다보면 오히려 시야가 좁아질 수도 있다. (...) 하지만 진짜 특별함은 ‘튀는 것’이 아니라, 평범하게 보이는 이야기를 낯설게 혹은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데서 온다.
p.64
기획자는 자주 설정에 매몰된다.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인물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에 관한 ‘정보’를 정리해 두면 안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건, 그 행동을 이끌어 낸 감정의 근거와 변화의 과정이다. 주인공이 어떤 상실을 겪었고, 어떤 세계를 바라보며, 무엇을 판단했기에 그 선택에 도달했는지를 기획자 자신부터 이해하고 납득해야 한다.
p.65
대사란 다이얼로그 재치가 아니라 감정과 관계에서, 상황과 감정에 맞게 하느냐가 중요.
p. 71
연애 감정이 아니더라도 서로의 존재가 위로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했고, 그 흔적이 곳곳에 녹아들길 바랐다.
p.162 ~ 163
때로는 드라마보다 세상에 더 의미 있는 일이 많다고, 괜히 바쁜 척하지 말라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드라마를 만드는 것’은 내게 직업을 넘어 하나의 소명이다. 인물과 이야기로 누군가의 하루에 작은 울림을 주는 것, 그것이 내가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다.
: 투자 받기 어렵고 편성이 어려운 드라마 시장에서 오히려 '소명'이라고 말하는, 진지한 저자의 말에 오히려 읽다가 멈춰서게 된 순간. 팔릴 만한 이야기를 써야한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얘기다 아니다, 등등 상업성 짙은 이야기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앞선 가치로 느껴지는 요즘, 속으로야 소명이고 사명이고 그게 곧 직업 정신인 것처럼 생각할 순 있어도 남들이 어떻게 볼까 싶어 끝내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얘기라고도 생각한다. 진지하게 책에서 이런 언급을 해주셔서 한편으론, 어떻게 하면 업계에서 오래 관록을 쌓아온 프로이면서도 순수한 소명의식을 마음에 품고 일할 수 있는 걸까? 란 생각을 해보게 되는 지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