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타이야기 1

프롤로그

by 세라 Sera

왜일까. 불현듯 스무 살 적에 선물 받은 책, 장 그르니에의 ‘섬’이 떠올랐다. 누가 선물했는지 어떤 계기로 주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이 문장들에 대한 기억은 또렷했다.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밀’이란 말을 보던 순간 가슴은 왜 그리 뛰었을까. 그 시절에는 ‘남루’라는 말도 왜 고상하게 들렸을까. ‘낯선 도시’에서 머물고 싶었던 꿈을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이 문장이 나를 불렀다. 현실적인 조건도 맞아떨어졌다. 반년 가까이 백수였고, 자신감은 바닥이었고, 혼자였다. 그러기에 누구보다 ‘시간 부자’였고, 바닥을 치고 올라갈 일만 남았고,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기에 좋은 조건 아닌가. 일과 관계에서 홀가분해진 이때 ‘섬’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결국 ‘섬’으로 떠나보자 했다. 이름하여 자발적 유배!


섬으로 가보겠다는 얘기를 꺼내자 친구는 오래전부터 준비해 놓았다는 듯 제안했다.

“몰타(Malta) 어때?”

구글맵에 ‘몰타’를 검색해 보았더니 놀랍게도 몰타는 한 번에 볼 수가 없는 나라였다. 유럽과 아프리카, 나라로 치면 이탈리아와 튀니지 사이의 지중해를 손가락으로 몇 번씩 확대해야 비로소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작아도 이렇게 작을 수가. 몰타는 전체 면적이 제주도의 1/6, 강화도만 한 크기로 6개 섬으로 이뤄져 있는데 그중 세 개의 섬은 무인도라고.


몇 가지 수식어는 몰타에 대한 호기심을 더 자극했다. 첫째, ‘세계에서 가장 게으른’ 나라라고 했다. 번잡하던 일상을 느리게 만들어 할 수 있는 한 게을러지고 싶었다. 둘째, 지중해가 넘실거리며 ‘연중 화창’한 날씨란다. 화창한 곳에서 살아온 밝은 사람들과 만나고 싶었다. 2007년 1월 미국 월간잡지 ‘인터내셔널 리빙’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몰타를 추천했다. 몰타는 우리로 치면 제주도 같은, 유럽인들에게 오래된 휴양지였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필립공의, 그리고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의 신혼여행지. 몰타어를 쓰지만 영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고, 물가는 저렴하고, 무엇보다 치안이 좋다고 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 집에 있는 강아지 몰티즈의 조상들이 살던 곳이다.


게다가 몰타는 오랜 세월 속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낸 곳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몰타가 위치한 지중해의 역사가 만만치 않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대륙을 둘러싸고 있는 지중해는 접한 국가만 해도 22개다. 이들 나라들이 수천 년 얼마나 서로 부대끼며 드라마틱한 역사를 만들어 왔을까. 그 소용돌이치는 무대 한가운데에 있었으니 몰타의 운명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몰타가 매력적인 이야기 창고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여행을 떠날 때 나는 어여쁜 기념품을 수집하기보다 그곳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싶었다. 더 많이 걷고, 더 많이 새로운 세상을 체험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나의 여행이 아름다운 장소를 넘어 아름다운 사람과 이야기가 있는 장소를 향해 뻗어 나가길 바랐다. 그러기에 몰타는 최적의 장소였다.


9월과 10월 사이. 내가 몰타로 떠났던 이 시기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 환절기였다. 계절처럼 내 인생도 환절기인 듯했다. 공연히 달라지고 싶었고, 삶의 방향도, 만나는 사람도, 머무는 곳도 바꾸고 싶었다. 잠자고 있던 연애 세포들도 깨우고 싶었다.


환절기에는 바람도 불고, 날씨도 궂고, 감기에 걸리기도 하지만 ‘다음’이 예비되어 있어서, 기다림이 있어서 좋다. ‘사람은 반드시 잡을 수 없는 것을 향해 손을 뻗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당장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현실 저 너머의 그 무엇에 어딘가에 마음을 두기로 했다. 다음 계절을 기대하면서 몰타에서 보낼 시간이 내 인생 환절기에 은밀한 ‘비밀’이 되리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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