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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ra Jul 22. 2020

할머니와 할머니의 며느리, 내 엄마 이야기

누군 누구야, 내 며느리지.


할머니를 오랜만에 뵙고 왔다. 본인의 기억력이 가물가물한 할머니는 처음에 나를 엄마, 즉 당신의 며느리로 아셨다. 그래서 이름을 천천히 말씀드리니 그제야 나를 알아보신다. 그리고 엄마가 들어오니 “내 며느리 여기 있네.”하며 세상 반가워하신다.


우리 할머니는 다정하고 정이 깊은 분은 아니셨다. 내 어린 기억 속에는 억세고 모진 분이셨다. 그래서 어린 나는 잘 모르지만 엄마는 무수한 생채기를 안고 사셨다. 태생이 잔병이 많고 약해서 방에 앉아 옷을 짓는 일 하던 엄마는 논밭일에 단련된 할머니에게는 세상 쓸모없는 며느리였다. 그리고 당신의 큰 아들이 애지중지 엄마를 아끼는 모습을 무척 미워하셨다. 역시나 무뚝뚝한 할아버지에게 깊은 사랑 한 번 받지 못한 할머니에게 아들이 며느리에게 보이는 사랑이 얼마나 미우셨을까.

나도 어른이 되고 여자가 되니 알겠더라. 그러나 세상 아빠만 믿고 귀하게 자라다 시집 온 병약한 엄마에게는 온 우주가 흔들리는, 태어나 처음 경험한 모짐과 무시무시한 시절이었던 것이다.


내 며느리, 내 며느리


그런데 지금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 그리 미워한 여자, 며느리라니. 온전하지 못한 정신 속에서도 엄마만 보시면 눈물이 그렁그렁 해서는 “내 며느리, 내 며느리”이러신다. 아직도 온 우주가 두렵고 무서웠던 시절이 엄마 가슴에 깊은 생채기로 남아 있는데 이렇게 무너져 내리는 할머니를 엄마는 힘들어하신다. 아픔이 가라앉지 않은 자리에 갑작스러운 나약한 할머니의 손짓이 그저 황망할 뿐이다. 차라리 예전처럼 막 말을 하거나 모질게 대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도 하신다. 이렇게 어느 날 갑자기 나를 못살게 굴어 미웠던 사람이 한없이 나약하고 슬픈 모습을 하고 있으니 마음대로 미워할 수도 없고 모진 시집살이 시절을 누군가에게 꺼내놓고 풀 수도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어쩐지 할머니 마음도, 이러한 엄마의 마음도 다 알 것 같은 나지만 그 시집살이 시절, 아주 어렸던 나는 엄마 마음에 깊이 새겨진 생채기를 잘 모른다. 우리에게도 무서웠던 할머니가 어른인 엄마에게도 무섭구나 정도로만 기억나는 정도이다. 아빠는 그 당시 외국에 계셨기에 어린 오빠와 나만으로는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가 자주 눈물을 흘리다 우리가 들어오면 눈물을 얼른 닦고 웃어주던 모습만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때 우리는 엄마가 아빠가 보고 싶어 우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듣고 보니 아빠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한다. 그저 무섭고 두려웠다고 한다. 그러니 이제 와 내 며느리, 내 며느리 하며 눈물짓는 할머니 모습이 당황스러울 수밖에......


더 늦어 후회하기 전에 다 놓고 이해해 드리자고 했다. 엄마도 그러고 싶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런 할머니를 볼 때마다 강하고 모진 할머니는 온데간데없이 전혀 다른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닌 거 같아 누구를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신다. 정신없으신 와중에 제일 반가운 사람이 며느리라니 아이러니하지만 또 생각해 보면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이라서가 아닐까 혼자만의 생각을 이어가 본다.


시집와 남편이 아껴주고 바느질 잘해, 깔끔하게 살림 잘해, 논밭일 빼고는 다 잘하는 여자가 바로 당신 며느리였으니. 아마 그 여자가 이웃 동무였다면 서로 오가며 부족한 것 서로 채우며 좋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와 할머니가 엄마를 제일 좋아하는 건 그 시샘과 질투를 다 잊을 만큼 그 마음 깊이 갖고 있던 선망만 남아서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야윈 할머니 손을 잡고 꼭 안아드렸는데 그동안 병원에 다닌 줄도 모르시는데 나를 보고 자꾸만 ‘건강해라, 내가 늘 기도한다.’ 하신다. 기도가 늘 부족한 나를 대신해 이 와중에도 기도를 한다고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내 부족한 기도는 할머니가 채워주고 계셨구나. 그 기도가 마음을 따스하게 했다.


할머니, 내 할머니, 부디 건강하세요. 오래오래 계셔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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