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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ra May 04. 2020

에스프레소의 맛을 알아버린 어느 남자 이야기

믹스 커피만 마시던 남자가 에스프레소를 사랑하기까지

 드르륵 드르륵 쓱쓰르르 쓱쓱


수동 원두 분쇄기에 원두가 갈리고 있다. 둥글고 길쭉한 갈색의 원두가 가루가 되어 가는 명상과 같은 느긋한 시간이 흐른 후 저울에 물 양을 맞추어 모카포트 보일러에 물을 쪼르르 따르고 원두 바스켓에 분쇄된 원두가 들어가면 쏵쏵~ 모카포트 본체를 결합한다. 이제부터 기다림. 똑딱똑딱 3분쯤 전후 사이 치이이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커피 향이 가득 퍼지면 크레마를 품은 진한 에스프레소 추출이 완료된다.


에스프레소를 내려 줄 준비물들. 곧 요란한 소리와 함께 커피 향이 집안 가득 퍼질 것이다.


작은 티스푼으로 설탕 2스푼을 잔에 넣고 이제 막 추출된 크레마가 가득한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부어주면 수염을 깎던 남편은 입이 귀에 걸려 한걸음에 달려온다. 이제 잔에 담긴 에스프레소와 설탕을 고르게 저어 준 후 마시는 일만이 남았다. 한 번에 털어 먹기 아깝다며 찔끔찔끔 마시기도 하고 회사 가는 출근길에 들고 갔다가 차에서 내리기 전 툭 털어 넣기도 한다며 미소를 머금는 남자. 매일 아침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이 남자가 아직도 참 신기하다. 원래 이 남자는 믹스 커피만 마시던,  커피 맛을 모르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커피 취향이 변했다.


처음 남편을 만났을 때 이 사람은 커피를 입에 달고 살기는 했는데 대부분이 믹스 커피였고 아메리카노를 마실 일이 있으면 시럽을 꾸욱 꾸욱 눌러 시럽을 마시려는 건지, 커피를 마시려는 건지 알 수는 설탕 커피차(?)를 마시곤 해서 ‘커피국 설탕시 시민’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설탕을 넣어 달기는 하지만 쓰고 진한 에스프레소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을까? 오히려 믹스 커피를 마시지 않고 다양한 원두와 추출 방법을 나름 찾아가며 마시는 나에게도 약처럼 쓰고 찐~~~~ 한 에스프레소는 아직 넘사벽인데 말이다.


삶 속에 여러 가지 루틴이 변화되어가듯 취향도, 입맛도, 당연히 커피 선호도 역시 변화되어간다. 남편의 커피 선호 루틴의 변화는 이랬다. 믹스 커피 - 시럽 가득한 아메리카노 - 믹스 커피- 믹스 커피 - 시럽 가득한 아메리카노 - 믹스 커피 - 사럽을 넣은 더치 커피(간간히) - 믹스 커피 - 시럽이 덜해진 아이스 아메리카노 -  드립 커피(간간히 설탕을 빼기도 함) - 믹스 커피 - 시럽 없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 갑자기 에스프레소. 


 갑자기 에스프레소로 건너뛰게 된 가장 큰 사건은 역시나 로마 여행이었다. 로마에서는 어디를 가든 카페에 서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멋들어진 이탈리안들과 1유로 남짓의  동전으로 흰색 셔츠에 검은색 앞치마를 입은 멋진 이탈리안 바리스타가 즉석에서 순식간에 뽑아주는 근사한 에스프레소를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카페만 보면 지나치지 못하고 ‘caffe(이탈리아의 가장 평범한 커피로 당연 에스프레소이다)’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서서 한 입에 털어내는 에스프레소의 맛에 빠진 남편은 카페만 보며 달려들어가기 일쑤였다. '뭐야, 믹스랑 설탕 커피차만 마시던 사람이?' 이상한 반응이었다. 그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이면 짜릿하게 머리가 쨍해지는데 그 끝의 달디 단 맛이 목 넘김을 더욱 풍부하게 한다나 뭐라나...  그리고 잔에 남겨진 설탕을 싹 긁어 먹으면 마지막 디저트처럼 완성된 느낌이라니 뭐라나.... 호기심에 나도 옆에서 한 잔 시켰다가 쓴맛에 혼이 쏙 빠졌는데...


우리는 언젠가 이탈리아 일주를 꿈꾸고 있다. 꿈꾸는 여행을 가게 된다면 북쪽 베네치아의 플로렌스에서부터 남쪽 나폴리의 감브리누스까지 수백 년 전통을 가진 오래된 카페들을 가볼 작정이다. 언젠가 그런 날이 우리에게 허락하길....


커피 취향에 결정적인 변화를 야기했던 로마의 커피들. 바리스타와 분위기 만큼은 정말 최고였던...




삶 속에서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무언가가 생겼다는 것은 분명 활력이며 열정이 있다는 것이리라. 열정이 있는 한 늙지 않을 테고 삶이 지난하지 않으리라


청춘이 끝나간다는 나이 듦에 우울한 때에 알게 된 사무엘 울만의 '청춘'을 떠올려 본다.


청춘

- 사무엘 울만 -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시기가 아니라
마음 가짐이다.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부드러운 무릎이 아니라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오르는 열정을 말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성한 정신이다.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선호하는 마음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뜻한다.
때로는 스무 살 청년보다 예순 살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다.

나이를 더해 가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 것이다.
세월은 피부에 주름살을 늘게 하지만
열정을 잃으면 마음이 시든다.
고뇌, 공포, 실망에 의해서 기력은 땅을 기고
정신은 먼지가 된다.

예순이든 열여섯이든 인간의 가슴에는
경이로움에 이끌리는 마음
 어린아이와 같은 미지에 대한 끝없는 탐구심
인생에 대한 즐거움과 환희가 있다.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마음 한가운데
수신 탑이 있다.
인간과 하느님으로부터 아름다움, 희망, 기쁨, 용기
 힘의 영감을 받는 한 그대는 젊다.

그러나 영감이 끊어져 정신이 싸늘한 냉소의 눈에 덮이고
 비탄의 얼음에 갇힐 때
스물이라도 인간은 늙는다.
머리를 높이 쳐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여든이라도 인간은 청춘으로 남는다.


남편의 에스프레소 사랑 덕분에 커피 빛으로 물들어 가는 모카포트를 끼고 사는 조금은 있어보는 대한민국 아줌마가 되었다. 남편이, 혹은 내가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수동 원두 분쇄기에 원두를 가는 일로, 드르륵 드르륵 쓰스슥 쓱쓱...... 원두가 분쇄되는 소리는 익숙한 아침 소리가 되었고 에스프레소가 추출되면서 풍기는 커피 향은 익숙한 아침 향기가 되었다. 지니가 램프에서 스르륵 나오며 소원을 물어보는 행운처럼 모카포트에서 에스프레소가 추출되는 순간은 우리에게 더 없는 행운의 순간 이리라.


이 청춘의 마음과 열정을 응원하기에 출근 준비와 아이의 온라인 개학으로 바쁜 아침, 남편의 행복 한 잔을 위해 , 쓰디쓰고 달디 단 인생을 닮은 청춘의 열정을 위해, 오늘도 바지런하게 모카포트를 꺼내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며 하루를 시작해 본다.



남편이 사랑하는 커피 한 잔의 행복 =  살짝 귀찮지만 행복한 얼렁뚱당 바리스타가 내린  한 잔의 에스프레소 = 요술 램프 지니가 주는 행운 같은 행복의 시작



에스프레소 한 잔 같이 하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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